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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사이사이, 공간과 사유를 함께 걸어요 《공간력 수업》[북적북적]

책갈피 사이사이, 공간과 사유를 함께 걸어요 《공간력 수업》[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86 : 책갈피 사이사이, 공간과 사유를 함께 걸어요 《공간력 수업》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소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공간이 지닌 힘, '공간력'이다.

이번 주 [북적북적]은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는 분들, 지금 떠나고 계신 분들, 또는, 올여름 휴가의 여유는 누리지 못하고 바쁜 일상에 당분간 붙박혀 있어야 하는 분들 모두에게 권해드릴 수 있는 책과 함께합니다. 새로운 공간을 탐방하러 떠나는 사람들이 그 여행길, 비행기나 기차 안에서 틈틈이 여행에 임하는 기분과 안목을 벼리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렇게 떠날 수 없는 분이라면, 사락사락 넘기는 책장마다 저자가 방문한 공간들과 그 공간들을 누비는 저자의 사유를 동시에 탐방하는 마음의 여행을 떠나기에 적합한 책입니다. 뉴욕FIT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디자인역사학자 박진배 교수가 쓴 [공간력 수업], 함께 읽습니다.
플라뇌르(도시 골목을 정처 없이 걷기 *기자 주)의 핵심은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다른 개체의 삶에 끼어들지 않고 객관적으로 관망하며, 그 자체를 존중하는 자세다. 마치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람은 동물의 세계에 절대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과 같은 것이다. 골목은 보통 사람의 공간이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나름의 주인이 있다. 골목길에 면한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아침에 바닥을 쓸고, 가게 주인은 화분이나 의자를 내다 놓는다. 작은 공간이지만 주변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다 앉아 있는 고양이나 벽면에 놓인 자전거도 골목의 주인이다. 이 공간은 그들의 살롱이다. 플라뇌르를 하는 우리는 잠시 들르는 손님일 뿐이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잘 감상하고 떠나면 된다.

[공간력 수업]은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릴 수 있는 여러 종류의 공간들을 18개의 테마로 나눴습니다.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특유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저자의 시선과 경험으로 그 공간들을 오목조목 뒤집고 쪼개봅니다. e북보다는 종이책으로 읽어보실 것을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습니다. 책의 호흡과 몸짓, 매너 모두가 e북보다는 종이책에 더 어울립니다. 책짐을 더 늘리기 부담스러워 저도 요즘엔 웬만하면 e북을 선호하지만, 그래도 어떤 책들은 단연 종잇장을 사락사락 넘기며 읽는 것이 어울려서 e북으로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공간력 수업]도 그런 책입니다.
파리가 선사하는 최고의 장면은 카페에 앉아서 밖을 바라보는 것이다. 거리에는 멋쟁이들이 지나간다. 마치 패션쇼를 보는 것 같은 즐거움 속에 어느 순간 나만의 세계에 몰입된다.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파리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책이 아니라 생각을 읽고 마음을 읽는 것이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이 도시가 화답한다. 무엇보다 카페에서는 완전한 내가 될 수 있다.

일종의 공감각적인 만족감을 흠뻑 느끼게 독서 경험입니다. 책 제목으로 '공간'에 '힘 력' 자를 붙이고, '수업'이란 말까지 덧댄 게 아주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간이 지닌 힘, 또는 공간이 힘을 지니도록 만들어 가는 문화와 안목, 정성에 열의 있게 초점을 맞춘, 꽉 찬 수업 같은 책입니다. 시간이 가는 게 아쉬울 정도로 재미있었던 그 수업, 한두 개쯤은 누구나 기억하실 겁니다. 청량하고 시원한 물을 마시는 것처럼 신선한 배움이 마음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은 그런 수업 같은 책. 읽는 것만으로도 저자가 방문한 세계 방방곡곡을 새롭게 산책하고 방문하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책장을 넘기는 행위에 이 공간 저 공간을 누비는 산책이 겹칩니다. 그리고 그 공간들 뿐만 아니라, 잘 짜여진 공간처럼 정리된, 치밀하게 건축된 저자의 사유를 탐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입니다. 종잇장을 사락사락 넘기는 즐거움, 종이책의 무게감을 느끼는 물리적인 기쁨 위에 독서 그 이상의 감각들이 여러 겹 선물처럼 드리워집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집을 비롯해 세상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공간은 이용자를 차별한다. 부자는 좋은 집에 살고, 고급 호텔을 애용하며, 비싼 레스토랑에 드나든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비행기 좌석도 가진 부에 따라 다르다. 백화점과 슈퍼마켓, 심지어 병원에서조차 방문객이 구분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이용하는 공간이 있다. 바로 박물관, 미술관, 동물원, 그리고 도서관이다. CEO도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오고, 노동자도 아이와 손을 잡고 박물관을 찾는다. 아무리 부자여도 미술관에 그들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감상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도 마찬가지로 특별 좌석이랄 곳이 없다.

박물관 ·미술관 ·동물원 ·도서관의 공통점은 민주주의다. 역사적으로 도서관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해 왔다. 누구나 책을 접하고 지식을 얻음으로써 무엇이 정의롭고 인간다운 것인지를 인식하고 실현해 왔던 것이다. 진리 탐구의 열정이 담긴 곳이자 문화의 심장인 도서관은 늘 방문객을 평등하게 받아들인다.

여러 구체적인 공간들이 풍부하게 언급됩니다. 제가 가봤던 곳들도 꽤 있고, 앞으로 가보고 싶은 곳들이 더 많습니다. 아무래도 가봤던 곳들에 대한 언급이 더 인상적이기는 합니다. 그 공간에 대해서 내가 이미 갖고 있는 느낌과 이미지에 저자의 사유가 얹어짐으로써 내 감상과 경험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입니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각 에세이의 테마별로 나뉘어 풍부하게 들어있습니다. 낭독 들으시고 나서 이 책을 직접 열어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 사진들입니다. 사진들이 참 좋습니다. 저자가 뉴욕에 거주하다 보니 아무래도 뉴욕을 비롯한 미국 사진들이 많고, 유럽을 골목골목 누비며 찍은 사진들도 그만큼 많이 들어있습니다. 우리 독자들에게는 좀 멀게 느껴질 수 있는 공간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유명한 관광지를 찍을 때든, 그야말로 그 동네 사람들이나 알 법한 골목길을 찍을 때든, 저자가 그 공간 자체의 진면목에 집중할 뿐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어떤 사진들도 과시적이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저자의 사유를 닮았습니다.

제가 그중 제일 좋았던 것은 첫 번째 에세이에 담긴 골목길 사진 모음입니다. 대전의 어느 골목길을 포함해 세계 곳곳의 골목길들이 모여 있습니다. 단지 그 골목길들을 모아 놓은 저자의 시선만으로도 인간이 만든 '도시'라는 공간에 문득 애정이 더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 나는 도시라는 것을 만든 인간이라는 집단의 일원이지. 지구상에 이런 공간들을 문득 남기고 가는 집단의 일원이지.' 그런 밑도 끝도 없는 마음이 새삼 밀려오는 기분이었습니다.
일상에서 시간 관리를 효율적으로 잘하는 사람은 시간의 틈새 역시 잘 이용한다. 공공공간의 디자인은 선진국일수록 발달했다. 시간의 숨겨진 차원을 발견하고 삶의 사각지대를 채워간다는 생각이 디자인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결국 잘 디자인된 공간을 인지하고 향유하는 습관이 삶의 수준을 높인다. 일상의 틈새마다 시간과 디자인이 존재한다.

책 속 단락 중에 [연출된 장면은 안목의 집합체다]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자기설명적인 제목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다양한 공간을 디자인하고 사랑하고 향유해 온 저자의 학자로서의 안목과 사유의 집합체 같습니다. 자기 감상을 강요하지 않고 오로지 학자로서의 사유를 담았을 뿐인데, 그 공간을 더듬어 나가던 학자의 마음을,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뜨거운 여름에도 함께 북적북적, 책 속을 거닐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효형출판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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