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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장애를 '미끼'로 흉악 범죄…재판에선 장애가 '방패'됐다

[취재파일] 장애를 '미끼'로 흉악 범죄…재판에선 장애가 '방패'됐다
"그 사건 하나로 저는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것 같아요. 병원 치료를 받느라 직장도 그만뒀고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하는 환자가 돼버렸어요. 무엇보다 힘든 건 누군가를 도와줘도 언젠가 나를 배신할 거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어졌다는 거죠." 

재활 병원에서 10년 넘게 베테랑 방사선사로 일하던 A 씨.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선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마음에서 틈틈이 장애인 봉사 활동도 다니고 장애인 활동 지원사 자격증까지 딸 정도로 열성적이었습니다. 하지만 6년 전 벌어진 '그 사건' 하나로 A 씨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건 지난 2017년 겨울. A 씨가 한창 장애인들의 CT나 MRI 사진 등을 판독해 주고 재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지체 장애 1급인 30대 남성 이 모 씨. A 씨는 이 씨로부터 자신의 CT, MRI 사진을 좀 판독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휠체어를 타고 있어 밖에 나가기가 힘든데 집에 방문해서 판독해 줄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자기가 사고를 당해서 1급 지체 장애인이 됐는데 영원히 못 걷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제가 방사선사였기 때문에 흔쾌히 알겠다고 했죠"  

재활의 희망을 주고 싶다는 선의를 갖고 이 씨의 집을 찾은 A 씨. 짧은 인사를 나누고 준비된 CT와 MRI, 그리고 진료 기록들을 건네받았습니다. 그런데 도와줘서 고맙다며 이 씨가 권한 비타민 음료를 마시고는 곧바로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너무 어지럽고 하더니 그 뒤로부터는 기억이 안 나요. 제가 그날 저녁 7시쯤 병원에서 퇴근하고 갔는데, 깨어나 보니 새벽 5시 정도 됐더라고요. 정신이 없었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게 느껴졌어요. 빌라 2층 집이었는데 실 눈을 뜨고 있다가 기회다 싶을 때 바로 베란다로 달려갔어요. 그때는 정말 무서운 것도 없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어요. "

한겨울에 맨발로 2층 집에서 뛰어내려 도망친 A 씨는 얼마 뒤 파출소 근처 길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후 경찰 수사가 진행됐는데, 조사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났습니다. 사건 당일 이 씨가 A 씨에게 수면제인 졸피뎀을 탄 음료를 먹인 뒤 강제로 추행하고 불법 촬영까지 했다는 겁니다. 결국 이 씨는 마약류관리법위반, 강제추행, 성폭력범죄처벌등에관한특례법 위반 (불법 촬영)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졸피뎀 타서 강제 추행·불법 촬영까지 했는데…법원 "집행유예"

졸피뎀(리사이징) (사진=연합뉴스)
▲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엄벌을 원해 합의도 하지 않았지만, 1심 재판부는 이 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2심 재판부도 항소를 기각했고,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너무나 낮은 형량에 분노하던 A 씨를 또 한 번 좌절하게 한 건 바로 법원의 판결문이었습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은 장애에 대한 편견 없이 호의적이던 피해자를 상대로 범행해 죄질이 좋지 않다", "음료수에 타기 위해 미리 졸피뎀을 가루로 만들어 준비해 두는 등 계획적으로 범행했다", "피고인은 이동이 가능함에도 장애를 방패 삼아 법원 출석을 연기하는 등 불성실한 자세로 재판에 임했다"면서도 초범이고 반성하고 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했습니다.

2심 판결문에도 피고인 이 씨의 장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고인이 지체장애 1급의 장애인이고 욕창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으며 경제적 사정도 좋지 않다"며 이를 유리한 정상으로 판단한 겁니다. 장애를 미끼로 저지른 흉악 범죄인데, 장애를 감형 사유로 판단한 거죠. 
 
"법원, 애초에 양형 기준도 잘못 적용…적어도 실형 선고 가능했던 사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법조계에서는 애초에 양형 기준 자체가 잘못 적용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충분히 실형 선고가 가능한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판사 출신 문유진 변호사는 "판결문을 살펴보면 3가지 범죄 사실(마약류 관리법 위반, 강제추행, 불법 촬영) 중 기본 범죄를 가장 형량이 무거운 강제 추행으로 설정했어야 하는데 마약으로 설정했다"며 "양형 기준표를 자의적으로 적용을 한 걸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기본 범죄란 법정형에서 법률상 가중이나 감경을 거친 후 상한이 높은 범죄를 뜻합니다. 쉽게 말하면 3가지 범죄 사실 중 형량이 상대적으로 낮은 마약이 기본 범죄로 설정되면서 적어도 실형 선고가 가능한 사건이 솜방망이 처벌이 됐다는 는 거죠.

나아가 해당 사건이 검찰 기소 단계서부터 오류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애초에 강제 추행이 아닌 강제추행상해나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기소됐어야 한다는 겁니다. 문 변호사는 "수면제를 먹여서 정신을 잃게 한 경우에는 상해에 해당한다"며 "강제추행은 10년 이하 징역형인데 반해 강제추행상해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보다 무겁게 처벌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한테 받은 피해보다 판결에 대한 충격이 커요. 상대방은 계속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걸 내세우더라고요. 욕창도 있고 건강 문제로 도저히 수감이 안 된다, 이런 내용이 담긴 반성문도 많이 제출한 것 같더라고요. 도대체 뭐가 우선인 걸까, 혼란스러워요."

사건이 발생한 지 6년이나 지났지만 A 씨의 고통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 씨가 음료에 탔던 졸피뎀 성분이 치사량 수준이었기에 아직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고 그날의 트라우마로 정신과 치료도 계속 받고 있습니다. 결국 평생 업으로 삼고 싶어 했던 방사선사 일도 그만둬야만 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게 가장 뼈아픈 일입니다. 선의로 행한 일로 인해 한순간에 범죄의 피해자가 된 A 씨, 사건 당시 느꼈던 극도의 배신감은 아직 씻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장애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장애를 방패 삼아 선처를 호소한 가해자. 그리고 그런 가해자에게 "지체 장애가 있고 건강 문제가 있다"며 장애를 감형 사유로 판단한 재판부. 피해자의 외침처럼 도대체 무엇이 우선인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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