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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거짓 정보와 싸우는 사람' - 정은령 SNU 팩트체크센터장

스프 그사람 정은령
SNS에 올린 사진 한 장

1992년 5월, 동아일보 파업 투쟁 당시
지난해 이 사람이 페이스북에 사진을 한 장 올렸다. 그 사진을 보고 '이게 젊음이구나' 싶었다. 여드름 자국까지 그대로 드러난 말 그대로 쌩얼, 그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 사진 한 장으로 이 사람의 청춘이 그려졌다. 1992년 동아일보 파업 현장에서 선배 기자가 찍어준 사진이라고 했다. 1989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니 그때가 4년 차 기자, 사진만 보면 앳된 대학 초년생 같다. 빛나던 시절의 얼굴을 자랑하는 이 사람,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산하 SNU 팩트체크센터장 정은령이다.

SNU 팩트체크센터 일로 일 년에 서너 차례 얼굴을 본다. 교수들과 현직 기자들이 참석 멤버인 그 모임에서 사안을 맥락에 맞게 정리하고, 논의의 방향을 잡아가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한국 팩트체크 저널리즘의 중추적인 인물이고 칼럼니스트로 성가도 높다. 그렇지만 언론사에 적을 두고 있지는 않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연구도 하지만 대학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다. 어느 한 편에 오롯이 속하지는 않은 경계인이자 이 사람 표현을 빌리면 고학력 비정규직 노동자다.

SNS에서 젊은 시절 사진을 본 뒤 이 사람은 그 이후 어떻게 살아왔을지 궁금했다. 대략적인 것이야 알고 있었다. 서울대에서 노래 잘하는 것으로 유명한 운동권 학생이었고,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활약할 때 지면에서 익히 봤던 이름이고, 잘 나가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유학을 간 이야기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긴데 군데군데 빈 구석이 보였다.

만나면 할 이야기가 적지 않을 듯했다. 국내 유일의 팩트체크 플랫폼 책임자이니 우선 허위정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고 「GLOBAL FACT 10」이 임박했으니 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듯싶었다. 한국 언론이 가장 막강하고 화려했던 1980년대 마지막 해에 언론계에 입문했으니, 끝물이나마 좋았던 시절을 누리기도 했지만 그 이후 언론계의 격동 속에서 마음고생, 몸고생을 했다. 그런 경험들이 이 사람만의 경험으로 머물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인터뷰를 요청하니 예상대로 난색을 표했다. 자신은 자기만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끝내 부탁을 거절하지는 못했다. 서로 얼굴 아는 처지에 한사코 거절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다음 주 열리는 국제행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던 듯싶다. 그렇게 해서 지난 12일 오후 서울 목동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평소에 말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고 풀어놓을 이야기도 많지 않다고 하니 인터뷰는 세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 2시에 시작한 이 사람과의 대화는 저녁 자리까지 포함해 밤 10시가 다 돼서 끝났다.
 

글 잘 쓰고 취재 야무지던 문화부 기자

스프 그사람 정은령
1992년 5월, 동아일보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을 때 노조 노래패였다.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했고 서울대 아크로 광장에서 마이크 잡고 노래하던 솜씨를 파업 현장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주일 가까운 파업 기간 내내 손톱이 깨질 만큼 신서사이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웠다. 당시 동아일보 고위 인사가 이 사람의 손톱 깨진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쓰느라 손톱이 깨져야지. 파업하느라 손톱이 깨진 것이 뭐 자랑이냐."고 했단다.

1990년, 동아일보 막내기자 시절
1989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후 주로 문화부에서 문학과 출판을 담당했다. 지금도 정은령 하면 글 잘 쓰는 문화부기자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에 떠도는 김윤식 서울대 교수 인터뷰 기사 등이 그 무렵 쓴 글이다. 출판 담당 기자들의 주 업무는 매주 쏟아지는 신간 서평을 쓰는 일이다. 반드시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 원칙을 지키느라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다.
"그때 정은령 기자는 흔히 말하는 서평과는 다른 글을 썼어요. 정은령만의 결이 살아 있는 서평이랄까요. 그때는 신문 서평란에 신간이 소개되면 다음 날 주문량이 달라지던 때였거든요. 그래서 출판사는 신문에 어떤 책 서평이 나오는지를 주목하곤 했는데 정은령 기자는 남들이 예상하지 못한 책의 서평을 쓰는 것으로도 유명했어요. 자기가 판단해서 널리 알릴 만하다 싶은 책의 서평을 쓰는 사람이었지요."

- 정은숙, 출판사 마음산책 대표

1년 동안 미국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2002년 차장으로 진급하면서 「위크엔드」라는 이름의 주말판 팀장을 맡았다. 몇 기수를 훌쩍 뛰어넘는 승진이었고, 부장이 없는 사실상의 팀장 보직이었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쉽지 않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주말판부터 파격적인 변신을 해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고 그 일을 이 사람에게 맡긴 것이다.

파격적인 승진에 회사 전체가 주목하는 책무를 맡았으니 어깨가 무거웠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연년생 남매의 엄마 노릇을 포기하고 일에 매달렸다. 이 시절이 지나고 보니 꽃시절이었다. 회사를 다니는지 동아리 활동을 하는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신나게 일했다. 하지만 그런 회사 생활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동아일보와의 이별

어느 시사 주간지가 '동아, 너마저'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을 만큼 2천 년대 초반 동아일보의 급격한 보수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그 언론사는 자존심이 강한 조직이었다. 역사와 전통, 성과를 말할 때 두 번째로 언급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조직원 모두가 고심했다.

문제는 그 고심의 방향이 서로 달랐다는 점이다. 당시 논조의 변화를 동아의 자존심을 지키고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독자들에 대한 배신이자 구성원 간에 있었던 묵시적이고 오래된 약속의 파기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동아일보라는 거함에 타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느닷없는 변침에 멀미를 느끼고 힘들어했다. 이 사람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스프 그사람 정은령
"그 시기가 굉장히 제 안에서 고민이 많았던 시기인 것 같아요. 무엇이 좋은 보도인가에 대한 고민, 그런 것들이 많았었고 내부에서 그런 것들을 같이 고민하던 기자들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만든 게 신문연구회인가요?

"신문연구회를 어떻게 아시나요? 맞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신문연구회라는 비공개 모임을 만들었고 그래서 내부적으로 목소리도 내고 그랬습니다. 신문연구회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많이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민을 많이 했던 시기였고, 그 이전부터 해오던 고민들이 더해지면서 결국은 퇴사라는 결정으로 내려진 것이죠."


만 18년 반을 근무했고 부장 진급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전에도 몇 번 그만두려 한 적이 있고 사표를 내고 2주 정도 회사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지만, 2007년 퇴직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더 이상 그 조직에 남아 있는 것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일하는 엄마 밑에서 자라면서 엄마의 빈자리를 자주 느꼈고 그게 상처로 남았는데 자기 역시 아이들에게 같은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가 늘 마음에 걸렸다. 마음이 떠난 조직에서 일을 하느니 내 금쪽같은 아이들과 단 하루라도 더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퇴직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 그런 어려움이나 갈등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떠날 때 그다음 자리가 예정이 돼 있던 것 같진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을로 살아본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거였죠. 그게 뭘 의미하는지를 그만두고 나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걸 잘 견뎌낼 수 있었냐? 힘들었죠. 제가 후회가 될 때가 한 번 있었어요. 고속터미널 앞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여럿이 무거운 철근 덩어리를 이렇게 으쌰으쌰 해서 들어 올리더라고요. 그런데 그 순간에 제가 속에서 울컥 눈물이 치솟았습니다. 그게 힘든 일을 같이하는 거잖아요. 서로를 믿으면서 함께 일하는 거를 내가 언제 다시 해볼 수 있을까. 내 생에는 다시는 그런 일은 없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울컥했던 기억이…"


퇴직은 번지점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일단 뛰어내리면 그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열릴 테고, 다소 우여곡절이야 있겠지만 평형과 안정의 순간이 오래지 않아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동을 빼면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것도 잘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 사람의 번지 점프는 당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눈 한 번 질끈 감고, 비명 한 번 지르면 순식간에 끝날 일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떨어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바닥을 바라보는 시간은 더 길었고 다시 올라올 때까지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미국 유학 4년 만에 학위는 받았지만…

미국 메릴랜드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게 2008년, 회사를 그만둔 다음 날 처음 유학 학원을 찾았다니 준비가 철저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 교수인 남편만 서울에 남고 초등학생 남매를 데리고 떠났다.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1년 동안 연수를 한 적이 있고, 영어에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미국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아주는 언론사 기자였지만 미국에서는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40대 아시아 여성일 뿐이었다.

집밖으로 나서면 하루종일 한국말을 입 밖으로 낼 일이 없는 날이 많았다.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평생 잊지 못할 좋은 스승과 동료들도 만났지만, 편하고 넉넉하고 행복으로 가득 찬 시간은 아니었다. 학위 과정도 쉽지는 않았지만 공부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유학 기간 동안 자신을 한 사람의 여성으로 응원해 준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남동생이 고약한 병을 만나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한국을 떠나는 게 아닌데 싶었다. 아빠 없이 두 아이의 엄마 노릇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마음의 균형이 무너졌고, 한 번 무너진 그 균형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2012년 8월, 모교인 메릴랜드 대에서 박사학위 취득
유학 4년 만인 2012년 박사 과정 입학 동기들 중에서는 가장 먼저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받고 귀국하고 나니 사람들에게 '언제 자리를 잡느냐'는 말을 인사처럼 들었다. 귀국해서 논문을 쓰지 못해 연구 실적이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학교에 자리를 잡고 싶은 의욕이 강하게 일지 않았다.

스프 그사람 정은령
- 학교에 자리를 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적극적으로 노력 안 했어요. 제가 교수 공모에 한 번 지원해 본 거 같아요. 한 번 해보고 떨어졌어요. 왜냐하면 논문이 없으니까 일단 응모할 수가 없고요. 논문이 안 쓰이더라고요. 안 쓰였고, 집중해서 앉아 있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잘못 쓴 논문도 아닌데 제 박사학위 논문이 굉장히 부실하다고 저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렇게 부실하지도 않았던 거죠. 박사학위 논문을 발췌해서 한글로 쓴 논문이 상도 받고 그랬거든요. 그렇게 형편없는 논문도 아니었는데, 그냥 제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안 해버리고. 그때는 그냥 제가 자존감이 완전히 바닥이라서 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냥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랬었던 것 같아요."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한두 과목씩 강의를 꾸준히 하긴 했지만 점점 외부와의 소통에 소극적으로 변했다. 서울대 졸업, 20년 가까운 기자 경력, 미국 박사 학위면 뭘 해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그 시절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이야기를 듣는데 퍼뜩 '이 사람이 많이 아팠구나' 싶었다. 혹시 마음이 아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2년 전에 펴낸 「당신이 잘 있으면, 나도 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군데군데 느꼈던 의문이 풀렸다. '아 그랬구나. 그 말이 아팠다는 이야기구나'.

"제가 정신적으로 많이 방황했던 시기고요. '복구가 힘들 것 같다, 내 인생 복구가 힘들 것 같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러던 시기를 지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책망을 많이 하고 '내가 왜 이렇게 약하지' 자책을 많이 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문만 열고 나가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제 발로 떠난 언론계를 다시 기웃거리고 싶지 않았고, 연구자로서 사는 것도 자신이 없었다. 그 무렵 목숨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관계를 원점에서 생각해야 하는 경험도 있었다. '산들이 움직이고 언덕이 흔들린다 해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은 아프던 사람을 더 아프게 했던 모양이다.

"제가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한 가지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뭐냐 하면 '너 때문이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 때문이야'라는 말이 한 사람에게 평생의 굴레가 될 수도 있는 말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저는 그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상대한테 그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허물이 많은 사람이니까요. 발 밑에 있는 진창에 한번 제대로 넘어져 본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2018년 11월, 서울대 '미래뉴스실습' 수강학생들과 중국 난징으로 떠난 취재 여행
그 시기를 묵묵히 지켜봐 준 남편, 건강하게 자라준 두 아이가 큰 힘이 되었다. 거의 유일한 외부 활동이었던 대학 강의에 성의를 기울였고, 학생들의 강의 평가는 매 학기 좋았다. 젊은 친구들과의 만남이 자신을 더 나쁜 지경으로 빠지는 것을 막아줬기 때문일까. 젊은 세대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위로와 치유의 힘을 보여준 칼럼 「공감」

2016년 말,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 김민아가 경향신문에 칼럼을 써볼 것을 제안했다. 1990년대 같은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보았던 이 사람의 글 솜씨를 김민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이후 별다른 활동이 없긴 했지만 김민아는 이 사람이라면 지면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다. 꽤 망설이다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

동아일보를 그만둔 지 10년 만에 쓰는 첫 칼럼이 무척 어려웠다고 했다. 2017년 1월, 「엄마의 커튼콜」이란 제목으로 첫 번째 칼럼을 썼고 그 글이 조용히 화제가 됐다. 글도 글이었지만 정은령이 다시 글을 썼다는 것도 화제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잘 써야 했다. 그 칼럼은 자존감을 스스로 확인하는 일이었고, 자신이 살아있다는 신호 같은 것이기도 했다. 2017년 1월부터 매달 한 편씩 3년 6개월을 썼다.
"오피니언란이 아주 경쟁이 치열한 곳이거든요. 반응이 없으면 몇 번 쓰고 본인이 그만두기도 하고, 저희들이 은근히 그만두도록 하기도 하는데 외부 필진이 1년만 버텨도 대단한 거예요. 3년 이상 쓰는 경우는 사실 진짜 많지 않아요. 예를 들면 열 분 모시면 한두 분 정도가 3년 정도 가려나요. 그러니까 대단한 거죠. 회사 안팎으로 반응이 좋아서 그만두신다고 할 때도 붙잡았는데, 본인이 팩트체크센터 업무 등으로 바빠서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한 것으로 압니다."

- 김민아,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칼럼을 처음 쓸 때 책상머리 앞에서 손가락만으로 글을 쓰지는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 다짐을 어기지 않았다. 이 사람의 칼럼에는 반드시 '현장'이 있고 '사람'이 있다. 포항 지진 현장, 청계천 평화시장, 서울 구의역, 성미산 마을, 경북 성주 사드 배치 현장, 안산 단원고 등이 이 사람이 찾은 현장이다.

이 사람 글에는 남다른 치유의 힘이 있다. 아파본 사람이라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들에게 깊이 공감한다. 음지에서 살아온 사람은 아니지만 여성으로 겪은 차별, 유학생 시절의 소수자 경험, 고학력 비정규직 노동자의 감수성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서 시작해서 '우리'로 이어지는 글을 쓸 수 있고, 남의 아픔을 달래면서 자신의 상처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들으려고 한다면 풀잎이 스치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침묵도 들을 수 있다"는 자세로 위안부 할머니, 세월호 엄마, 순직한 집배원 가족, 노동자 아들 잃은 어머니, 이주 노동자,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프 그사람 정은령
- 우리 사회의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힘든 사람들을 바라보시더라고요. 어쩌다 한번 눈길을 주는 게 아니라 계속 그런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관되게 음지를 바라본 이유가 있겠죠?

"예를 들자면 경북 성주의 할머니 같은 분들이 제 칼럼을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근데 그 칼럼을 읽을 사람들이 이 문제를 같이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같이 불편했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평생 이런 생각도 안 하고 살면서, 칼럼 쓸 때 뭐 써야 되니까 이렇게 하는 거 아니야? 왜 그런 마음이 없겠어요. 그래도 칼럼을 쓸 때라도 읽는 사람들이 그 마음을 불편한 곳에 두는 것이 그래도 좀 낫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허위정보와의 싸움에 나서다

2017년 서울대 교수 윤석민 등이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산하에 팩트체크 전용 플랫폼을 운영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언론사들이 하나의 플랫폼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따져보자는 취지였다. 거짓 정보와의 싸움에는 진보와 보수도, 업계의 구분이 없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했다. 네이버가 돈을 대고, 운영은 서울대가 맡고, 제휴 언론사가 팩트체크 기사를 낸다는 구상이었다. 이 플랫폼을 운영할 기구를 「SNU 팩트체크센터」라고 이름 짓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2017년 3월의 일이다.

SNU 팩트체크센터는 2017년 출범한 이후 허위 정보와의 싸움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출범 당시 14개였던 제휴 언론사는 32개로 늘었고, 지금까지 플랫폼에 올린 팩트 체크 기사는 4천6백 건이 넘는다.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졌다. 2020년 이 사람이 IFCN, 국제팩트체킹연맹의 이사가 된데 이어 2023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전 세계 언론인들과 팩트체커들이 모이는 「GLOBAL FACT 10」 행사를 국제팩트체킹연맹(IFCN)과 함께 개최하는 게 그 단적인 예다. 그 행사의 한국 측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교 한 명에 학부생 4명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학·석·박사 과정 학생 15명인 조직이 되었고, 오프라인으로 5백 명, 온라인으로도 그만한 인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를 역량을 갖추었다. 혼자 한 일은 아니지만 이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은 필자만의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당신이 이 조직의 성장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냐고 거듭 물었는데 그저 버텨왔을 뿐이라고 했다. 한 때 노래 좀 했다는 것 말고는 자기 자랑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 사람다운 답변이었다.

- 이런 플랫폼이 없었다면 그 기자들이 팩트 체크에 종사하고, 거기에 의미를 각별하게 두는 기자들이 지금처럼 활동하기도 힘들었겠죠.

"네 저는 그 역할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랫폼이 있기 때문에 견인을 한 부분이 있고요. 저는 4,600개 정도 되는 팩트체크 기사의 양도 중요하지만 제가 중요하게 보는 지표는 검증 근거라든지, 기사 길이 같은 것입니다. 이 플랫폼 안에 올리는 기사들은 검증 근거를 반드시 입력하도록 하거든요. 그게 이른바 '저널리즘의 투명성'이라고 하는 것인데, 2017년에는 팩트체크 기사 한 건 당 검증 근거가 한 개가 안 됐어요. 근데 2023년에는 평균 숫자가 한 7개 정도로 늘었어요. 물론 지금도 올라오는 게시물들이 각 사에 따라서 편차가 큽니다. 그런데 잘하는 곳에서는 굉장히 단단한 증거들을 가지고 기사를 많이 써요."


SNU 팩트체크센터가 직접 팩트체킹을 하는 것은 아니다. 불편부당성, 투명성 등의 원칙에 동의하는 언론사들과 제휴 관계를 맺고 각 언론사들이 자율적으로 수행한 팩트체크 기사를 플랫폼에 올려주는 역할을 한다. 팩트체크 대상의 선정이나 구체적인 검증, 판정 등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SNU 팩트체크센터와 제휴를 맺은 32개 언론사의 정치적 스펙트럼은 보수에서 진보까지 다양하다. 검증 대상이 겹칠 경우에는 자연스레 교차 검증이 이루어진다. 극히 드물지만 같은 사안에 대해 어떤 언론사는 사실로, 어떤 언론사는 사실 아님으로 판정한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서로 다른 결론을 같은 플랫폼 안에 나란히 올려놓고 유저들이 스스로 판단하게 한다. 그런 플랫폼의 운영에 필요한 돈은 지난 6년간 네이버가 지원해 오고 있다. 언론계와 학계, IT 기업이 협업하는 이런 모델은 외국에서는 찾기 힘든 케이스다. 이 모델이 한국 언론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적어도 무엇이 '사실'인지를 따지는 공론장은 될 수 있다는 게 이 사람 생각이다.

"우리가 (정치적) 입장 차이는 줄일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만 '사실'에 대한 건 우리가 함께 논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 지금 많은 뉴스의 이용자들이 언론을 회피하는 가장 큰 이유가 너무 편파적이어서 안 본다고 하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사실조차도 그 편파성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우리가 이 다른 정파적 입장은 모두 다 내려놓고 봤을 때 이 사실만큼은 우리가 같이 동의할 수 있다. 이런 지점들이 우리가 최소한 어떤 논의를 할 수 있는 공역대로서 존재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저희 센터의 역할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처음 센터장 자리를 제안받았을 때 몇 달 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일이 7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 조직이 땅 속 깊숙이 뿌리내린 것은 아니다. 늘 외풍에 시달리고 한 발 앞으로 나가는 일이 쉽지 않은 게 실상에 가깝다. 다만 다니던 언론사를 그만두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힘든 일을 함께 할 일이 내 인생에서 또 있을까 싶었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다시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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