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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당권은 어떻게 뜨고 지나…국민의힘 전당대회 15년史 분석

전당대회 역사를 통해 본 당권의 공식

스프 뉴스쉽
국민의힘 전당대회가 지난 8일 막을 내렸다. 신임 당 대표에 김기현 후보가, 최고위원에는 김재원, 김병민, 조수진, 태영호, 장예찬 후보가 선출됐다. 친윤(親尹)으로 분류되거나 친윤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 

전당대회는 당내 권력의 우위와 열위를 판가름하는 박진감 넘치는 공간이다. 특히, 이번은 친윤계와 비윤(非尹)계, 누가 당의 중심 권력인지를 '인증'하는 자리였다. 전통적으로 여당의 전당대회는 대통령과 손잡고 가느냐, 아니면 일정 거리를 유지하느냐, 그 정치적 역설 속에서 수위를 조절하는 과정이었다. 친이(親李)계와 친박(親朴)계가 그랬고, 친박계 비박(非朴)계가 그랬다. 이번 역시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들과 멀리 있는 사람들이 경쟁했고, 전자가 주도권을 쥐었다. 바야흐로 친윤의 시대가 개막됐음을 선언했다.

언론은 당권 경쟁의 치열함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치열한 생존 스포츠의 장막을 걷어내면, 의회 민주주의의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설계도가 드러난다. 의회 민주주의 중심에 정당이 존재하고, 그 정당의 의사 결정은 당권에 의존하며, 결국 당내 권력 지형은 의회 민주주의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전당대회가 결코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이유다.

그렇다. 전당대회에서 드러나는 당권 경쟁은, 곧 우리 공동체 의회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며, 나아가 우리 민주주의 품격을 가늠하는 리트머스지다.

지난 8일 열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김기현 의원이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이번 <뉴스쉽>은 이런 차원에서 국민의힘 전당대회 역사를 톺아보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부터 지금 윤석열 정부 때까지 15년 동안의 전당대회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그간 국민의힘 당내 권력 지형이 전당대회를 통해 어떻게 구현됐는지, 또 그 맥락 속에 어떤 공식이 존재하는지 되짚는다.

민주당 전당대회 역사도 만만치 않게 복잡하고 혼탁했지만, 이건 나중에 민주당 전당대회 기간에 다뤄보겠다. 
 

친이(親李)의 부흥과 몰락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내부 친이계-친박계의 격한 갈등은 친이계 수장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2월 취임했을 때부터 예고됐는지도 모른다. 두 계파 간의 갈등은 이미 곪을 대로 곪아있었다. 대선 경선 때부터 치열했다. 박근혜, 이명박은 두 전직 대통령 임기 내내, 아니 임기 이후에도 발목을 잡았던 BBK, 최태민 일가 논란이 이때 나왔다.

하지만,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은 막강하다. 이 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당내 권력 지형은 친이계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정부 출범 직후 치러진 허니문 선거였던 18대 총선, 친이계의 힘자랑이 시작됐다. 친이계 이방호 당시 사무총장이 주도한 공천 과정에서 박근혜 경선 캠프를 이끌었던 김무성, 서청원, 홍사덕 의원 등 중진 의원이 대거 탈락했다. 언론은 이를 '친박 공천 학살'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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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원들은 공천 문제에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해 7월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친이계 박희태 후보를 대표 자리로 낙점했다. 친박계 대표 주자였던 허태열 당시 후보는 3위에 그쳤다. 친이 강경파라고 불렸던 공성진 당시 후보는 4위로 최고위원에 올랐다. 친이계가 당내 권력의 중심에 있음을 확고히 했다. 전당대회는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당내 권력 구도를 계량화하는 지표이자 판결문이다. 

2년 뒤 열린 전당대회도 비슷했다. 친이계가 주류 권력임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 친이계 핵심 안상수 당시 후보가 대표로 선출됐다. 범친이계 혹은 중립으로 분류되거나 됐었던, 적어도 친박계는 아니었던 홍준표, 나경원, 정두언 당시 후보가 최고위원이 됐다. 친박계 최고위원은 3선의 서병수 당시 후보 정도였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여러 불리한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절반 넘게 남은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를 보란 듯, 친이계는 당내 권력 수성에 성공했다.

하지만, 당내 권력의 위세는 선거 결과에 연동한다. 선거에서 패하면 비난은 주류 권력을 향하고, 자연히 지도부는 도전에 직면한다. 

2011년 4월 재보궐 선거가 그랬다. 국회의원 세 명, 그리고 광역단체장인 강원도지사가 걸려 있었던 꽤 큰 선거였다. 결과는 한나라당의 참패. 국회의원 한 명 당선에 그쳤다. 한나라당 텃밭이었던 성남 분당을과 강원도지사 자리마저 민주당에 내줬다. 분당을은 강재섭 전 대표가 손학규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대선이 2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안상수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해 7월, 다시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렸다. 친박과 친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홍준표 후보가 대표가 됐다. 최고위원 자리에는 친박계로 분류됐던 유승민, 친이계가 지지했던 원희룡 후보가 꿰찼다. 친박계 우세 지도부는 아니었지만, 친이계의 힘이 빠져가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2011년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에 선출된 홍준표 당시 후보가 손을 흔들고 있다.
하지만, 홍준표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 사퇴로 치러진 10월 보궐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인 박원순 당시 후보에게 자리를 내준 것에 이어, 선거관리위원회 사이버 공격, 이른바 디도스 사태로 홍준표 지도부는 출범 5달 만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 공백을 메운 건, 친박계였다. 그렇게 친박의 시대가 시작됐다.
 

친박(親朴)의 부흥과 몰락

한나라당은 2011년 12월 박근혜 비대위 체제가 됐다. 이름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새누리당의 역사는 박근혜의 역사 그 자체였으며, 친박 흥망성쇠의 궤적이었다.

역사는 역시나 반복되는 것일까. 이제 총선 공천은 권력을 쥔 친박계가 주도할 차례였다. 언론이 붙인 명칭은 '친이 공천 학살'이었다. 당대표를 지낸 안상수 전 의원,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진수희 전 의원, 친이계 핵심인 박형준 전 의원,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 등이 나가떨어졌다. 4년 전의 친박 공천 학살은 '친이 공천 학살'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문양은 다르지 않았다.

2012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이 결정된 직후, 서울 여의도 당사 상황실을 방문하는 모습.
중요한 선거의 공식. 대통령 임기 말 선거는 여당에게 불리하다는 것. 정권 심판 구호를 늘 맞닥뜨려야 한다. 하지만, 19대 총선은 아니었다. 새누리당은 의석 과반을 차지했다. 민주화 이후 첫 과반 득표율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 대관식을 올렸다.

이어진 전당대회는 보나마나였다. 친박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황우여 당시 후보가 대표가 됐고, 최고위원도 심재철 후보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친박계 인사들로 채워졌다.

새누리당 첫 전당대회는, 친이의 시대에서 친박의 시대로 완전히 재편됐음을 공식화하는 포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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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여왕은 다음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12월 대선에서 대권을 거머쥐었다. 

친박의 응집력은 박 전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만큼이나 견고하고 단단했다. 달리 말하면, 친박의 위세가 커져갈수록, 주류 권력에서 이탈된 이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언론은 이들을 비박계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친박이 아닌 사람들. 박근혜라는 존재와의 밀착도는 중심 권력과 주변 권력을 구획하는 전선이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치러진 7월 전당대회는 비박의 부상을 알리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다음 총선 공천권을 행사할 당 대표를 선출하는 중요한 전당대회였다. 이른바 공천 학살의 경험이 있는 친박계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전당대회가 중요했다. 서청원 당시 후보는 친박계의 지지를 받았고, 박근혜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진 김무성 당시 후보는 비박계의 대표 주자로 분류됐다. 박근혜의 마음, 이른바 박심(朴心) 마케팅, 청와대 의중 논란이 이어졌다. 그 어느 전당대회보다 치열했고 뜨거웠다. 

2014년 7월 열린 새누리당 3차 전당대회.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당원들은 비박계 김무성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친박계 홍문종 후보는 지도부 문턱을 넘지도 못했다.

친박계 입장에서는 친박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비박계를 보듬고 가느냐, 아니면 더욱 공세적으로 나가느냐. 친박계의 선택은 후자였다. 이듬해 7월, 비박계로 돌아선 유승민 원내대표는 박 전 대통령에게 배신자 낙인이 찍히며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명분은 야당에게 득이 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받아줬다는 것이었지만, 이듬해 총선을 앞두고 친박과 비박 간의 본격적인 공천 경쟁이 시작됐다는 해석이 나왔다.

2016년 총선, 당내 갈등은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공천을 심사하는 공천관리위원회는 친박계가 장악했지만, 최종 결정을 가진 당 대표는 비박계 김무성 당시 대표였다. 김무성 당시 대표가 공관위의 공천 추천에 직인 날인을 거부했던, 이른바 '옥새 들고 나르샤' 사태는 친박과 비박의 갈등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국민들이 이를 좋게 볼 리 없었다. 야권 분열로 새누리당에 유리한 판이 깔렸음에도, 1당 자리를 내줘야 했다. 사실상 참패나 마찬가지였다. 김무성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김희옥 비대위 체제로 재편됐다. 총선 후유증은 컸다.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2016년 8월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이정현 당시 후보가 신임 대표에 선출된 뒤 환호하고 있다.
이어진 8월 전당대회. 비박계 입장에서는 서서히 저물어 가는 친박 주류 권력에 맞서 '굳히기'가 필요했다. 주호영 당시 후보로 비박계 단일화까지 이뤄냈다. 하지만, 결과는 되치기였다. 친박계 이정현 후보가 대표에 당선됐고, 최고위원 대부분이 친박계로 채워지는 결과가 나왔다. 언론은 '도로 친박당'이라고 썼다.

돌이켜보면, 이때의 전당대회는 친박의 마지막 몸부림에 가까웠다. 그해 10월 말, 거대한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져버렸다. 박근혜 없이는 친박이 존재할 수 없었다. 친박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친홍(親洪), 친황(親黃)… 무주공산, 각자도생의 시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당내 권력은 사실상 공백 상태였다. 쇄신을 위해서라도 개명은 불가피했다. 당명을 자유한국당으로 바꾸고, 탄핵으로 치러지는 '장미 대선' 후보로 비주류였던 홍준표 전 대표를 내세웠다. 하지만, 정치적 파산 상태에서 대선 승리는 쉬울 리 없었다. 이미 일부 비박계는 당을 나와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안으로는 와해된 분위기를 추슬러야 했고, 밖으로는 바른정당과 보수 적통 경쟁을 벌여야 했다. 

예상대로 19대 대선에서 패했고, 고된 야당 생활이 시작됐다. 홍준표 대표는 대선에서는 졌지만, 비교적 선전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7월 열린 전당대회, 홍준표 체제가 구축됐다. 당시 최고위원으로 선출된 이철우, 류여해, 이재영 후보는 '친홍계'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친박계로 분류된 김태흠, 이재만 후보 역시 최고위원이 되면서 친홍계와 친박계가 균형을 이뤘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홍준표 대표는 바른정당 출신 의원들 복당을 승인하는 등 친박계 견제에 나서며 조금씩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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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거에서 대패하면 지도부는 도리가 없다. 2018년 6월 지방선거, 보수정당 지방선거 역사상 이런 참패는 없었다. 경북지사와 대구시장 말고 모든 광역자치단체장 자리를 내줬다. 홍준표 대표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친홍계는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유야무야 희석되고 말았다. 이어진 비대위 체제 속 각자도생이 시작됐다. 유명 정치인을 중심으로 계파가 형성됐던 당의 역사는 잠시 휴지기를 맞았다. 

2019년 2월, 3차 전당대회에서 황교안 체제가 만들어졌다. 드문드문 친황(親黃)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주류 세력으로 보기에는 세가 약했다.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새 당 대표로 선출된 황교안 당시 후보.
미래통합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이어진 2020년 4월 21대 총선. 300석 가운데 103석. 또 역사적 패배였고, 대표는 또 사퇴했으며, 또 비대위 체제로 재편됐다. 그해 9월, 당명은 또 국민의힘으로 바뀌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박계가 새누리당이라는 당명과 흥망성쇠를 함께 했던 것과는 달리, 자유한국당에서 미래통합당, 미래통합당에서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잦은 개명은 당의 복잡 다난한 상황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세력이라 할 만큼 응집력이 있는 계파는 존재할 수 없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야당인 국민의힘은 주류 권력과 비주류 권력을 분류하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다.

2021년 6월 전당대회는 그 상징적 장면과 같았다. 당시 후보들은 서로를 향해 배후에 계파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준석 후보는 친유(親劉:친유승민), 나경원 후보는 친박, 주호영 후보는 친이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식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부인했다. 과거를 풍미했던 계파들이 소환되며 공격 소재가 됐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주류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무주공산 상태임을 의미했다. 말은 많았지만, 계파 담론은 별 효능감도 없었다.

2021년 6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로 선출된 이준석 대표가 당기를 흔들고 있다.
결과는 이준석 대표 체제 탄생. 헌정사상 최초의 30대 교섭단체 대표 탄생이라는 혁신과, 젠더 갈등을 조장했다는 비판이 공존했지만, 간만에 보수정당 전당대회가 주목을 끌었다. 나름 흥행한 전당대회로 평가받았다. 이준석 체제는 보궐 선거에서 서울시장을 되찾아오며 순항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전당대회는 이준석 체제 붕괴의 서막을 알렸다. 두 사람은 지지층부터 간극이 컸다. 이준석 당시 대표는 젊은 층, 윤석열 당시 후보는 노년층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원들의 선택은 윤석열 당시 후보였고, 불협화음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준석 당시 대표는 자신을 공격하는 윤석열 당시 후보의 측근들, 이른바 친윤(親尹)계 일부를 '윤핵관'이라고 부르며 불쾌감을 나타냈다. 

대선 승리의 전리품은 달콤하다. 어떻게든 선거는 치러야 하고 이겨야 한다. 둘은 서로 벌어졌다가 봉합하는 걸 반복하며 어떻게든 대선을 치렀고,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앙금은 어쩔 수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당의 무게 중심이 친윤계로 이동하면서 이준석 전 대표의 앞날에도 먹구름이 끼었다.

결국, 이준석 대표가 성상납 은폐 의혹으로 징계를 받고, 뒤이어 수립된 비대위를 통해 사실상 축출당하며 두 정치인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윤 대통령은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라는 텔레그램 대화 내용이 유출 사태로 속내를 들켜버리는 일까지 생겼다.
 

친윤(親尹)의 시대, 그리고…

지난해 2월,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후보 당시 주먹을 쥐며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
이번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대통령을 위시한 친윤계가 주류 권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지, 그 가늠자의 성격이 강했다. 결국, 친윤은 우위를 점했다. 반면, 이준석 전 대표의 지원을 받은 천아용인(천아람, 허은아, 김용태, 이기인)은 모두 낙선했다. 윤석열 대통령 친정 체제가 구축돼 당정관계는 당분간 큰 갈등 없이 순항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 뉴스쉽에서 국민의힘 전당대회 15년사(史)를 훑어본 이유. 전당대회라는 망원경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학습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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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대한민국 대통령의 힘은 세다. 여당, 특히 보수 여당은 결국 대통령을 통해 뭉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위기를 맞은 보수 정당은 공중분해, 각자도생,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친홍, 친황은 구심력도, 충성도도 약했다. 하지만, 여당이 된 뒤로 당내 권력 전선은 친윤과 비윤으로 뚜렷해졌다. 안정적인 링이 형성됐음을 의미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는 이를 '정치적 안정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말했다. 모든 것은 모순을 잉태하며, 모순을 품고 운동하기 때문에 활동성을 지닐 수 있다고. 정반합의 원리, 그 유명한 변증법이다. 어쩌면 권력이란 이런 것이다. 권력의 위세, 그 뒤안길에는 늘 저항이 싹트고, 또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역동성이 존재한다. 

결국, 관건은 저항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주류 권력이, 그 저항들을 처리하는 방식일 것이다.

여러모로 이번 전당대회는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상기시킨다. 두 전당대회 모두 다음 총선 공천권을 행사하는 지도부를 선출한다는 점에서 치열함을 예고했다. 그 치열함은 당내 계파 갈등을 통해 표출됐다. 당시 친박과 비박의 대결 구도는 이번 친윤과 비윤의 당권 경쟁과 거울상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대통령이 있었다. 언론은 두 전당대회 모두 대통령 권력을 가늠하는 중간고사쯤으로 여겼다. 자연히 대통령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통령의 '의중'은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스스로 전당대회에 참석 안 할 수 없었다. 당내 화합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비슷했지만, 최고 권력자의 참석이라는 '의례'의 정치적 의미는 작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한 갈등 뒤 교통정리를 위해 등장하는 계파 갈등 치안권자의 이미지, 결국 친박이든 비박이든, 친윤이든 비윤이든, 계파의 한 편이 아니라, 그 위에 대통령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초월적 메시지 같은 것.

2014년 7월 새누리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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