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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태영호의 4.3 발언, 사료로 검증했습니다

[사실은] 태영호의 4.3 발언, 사료로 검증했습니다
지난주, 때 아닌 제주 4.3 사건이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국민의힘 최고위원 후보인 태영호 의원이 지난 12일 제주를 방문해 "제주 4·3 사건은 명백히 북한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촉발됐다"고 말한 게 그 시작이었습니다.

주영 북한대사관에서 공사로 근무하다 탈북해 망명한 태 의원은 "4·3 사건은 명백히 김씨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다. 김씨 정권에 몸담다 귀순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며 희생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습니다. 

제주 4.3 단체들은 태 의원의 발언을 역사 왜곡으로 규정했습니다. 단체들은 "4·3을 폭동으로 폄훼해 온 극우의 논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으며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을 유포시키고 있다"고 태 의원의 사과와 최고위원 후보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비판이 계속됐지만 태 의원은 굽히지 않았습니다. 지난 15일에는 기자회견을 열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제주 4.3은 공산 폭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제주 4.3 주동자인 김달삼은 월북 이후 영웅 대접을 받았고, 애국열사릉에 매장됐다"고 근거를 댔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김대중 정권 당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구성되고 2003년 진상조사 보고서까지 나왔지만, 의혹 제기와 이에 대한 팩트체크가 수십년째 쳇바퀴처럼 반복돼 왔습니다. 

이 부분, 다시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SBS 팩트체크 사실은팀이 검증했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1948년 5월, 제주도 서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어린이들. 미국립문서록관리청 소장.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제주 4.3 사건의 시작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제주도 경찰서 12곳과 우익 인사의 집을 일제히 습격했던 게 시작이었습니다. 이 일로 경찰 4명과 우익 인사 8명, 무장대 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 극우 무장 단체인 서북청년단이 무고한 민간인을 좌익으로 몰아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학살은 1954년 9월까지 계속됐습니다. 진상 보고서를 보면 1만 248명이 사망했고 3,578명이 실종됐습니다. 이 과정에는 이승만 정부와 미 군정이 직접적으로 개입돼 있었습니다. 

즉, 4.3 사건이 남로당의 무장 폭동에서 시작됐다는 것, 그리고 이승만 정부가 계엄령 선포하고 공권력을 통해 무고한 제주 양민을 학살했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 없이 모두가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제주도에 출동하는 경비대원을 격려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동아일보 소장.

"김대중 전 대통령도 제주 4.3은 공산 폭동이라고 말한 바 있다"는 태영호 의원의 발언은 김 전 대통령이 1998년 11월 미국 CNN과 했던 인터뷰를 인용한 겁니다. CNN 홈페이지에는 당시 인터뷰를 찾을 수 없었지만, 김대중 도서관에는 당시 인터뷰 발언이 한국말로 번역돼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정확한 발언은 "원래 시작은 공산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입니다. 김 전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발언의 무게는 '무고한 죽음'에 실려 있습니다. 태 의원의 주장은 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읽힙니다.

이 발언은 이승만 정부가 계엄령 선포하고 국가 공권력을 동원해 1만 명 넘는 무고한 제주 양민을 학살하고 고문하고 마을을 초토화 한 중요한 사실을 가릴 수 있습니다. 사실은팀은 태 의원 주장이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판단, 대체로 사실 아님으로 판정합니다.

사실 이런 식의 주장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2018년 3월, 4.3 사건 70주년을 앞두고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김 전 대통령의 CNN 인터뷰 내용을 인용해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SBS 사실은팀 역시 당시 발언에 대해 팩트체크를 한 적이 있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분명한 것은 제주 4.3 사건이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무장 봉기 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이후 벌어진, 공권력에 의해 행해진 민간인 학살 전체를 의미합니다. 김 전 대통령의 발언은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에 불과하며, 이후 후세의 정치인들에 의해 취지에 맞지 않게 특정 부분만 발췌, 왜곡돼 소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태 의원의 핵심 주장은 "4·3 사건이 김일성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주 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 지시가 있었고, 당시 남로당의 지휘권은 김일성에게 있었다며 그 근거를 댔습니다. 이 발언은 이승만 정부의 학살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일단 2003년 발표된 진상 보고서는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설이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는 남로당 지하 총책을 지낸 박갑동의 주장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박갑동은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글'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 지령에 따라 4.3 사건이 발생했다"고 적었습니다. 남로당 중앙당에 몸담았던 당사자의 진술이 나온 겁니다.

하지만, 그가 들었던 근거는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가령, 그는 "남로당 중앙당 지도부였던 이중업, 이재복, 강문식이 제주에 파견됐다"는 이유를 댔지만, 이들이 파견됐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박갑동은 2002년 7월 11일 조사위 진술에서 기존의 주장을 번복했습니다. 그는 "사실은 내가 쓴 글이 아니라 신문 연재할 때 외부(정보기관)에서 다 고친 것이다. 4.3은 본격적인 무장 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북 청년단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털어놨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1948년 11월,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인 제주 주민들. 미국국립문서관리청 소장.

제주도당 내부에서 무장투쟁이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신촌회의' 자리였습니다. 조사위는 신촌회의 참석자인 당시 제주도당 정치위원 이삼룡의 진술도 확보했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1948년 지리산 진압군 사령관을 지낸 고(故) 백선엽 장군, 군 장성 출신인 김점곤은 자신의 책에서 남로당 중앙당 개입설을 부인했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보고서는 당사자들의 증언과 여러 실증적 근거를 통해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물론,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근거가 없는 건 아닙니다. 1982년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1996년 펴낸 『김일성 저작집 4권』, 2000년 『조선대백과사전 제20권』에서 제주 4.3 사건을 높게 평가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나아가 태영호 의원은 2003년 1월 조선중앙TV를 통해 방영된 드라마 '한나의 메아리'를 제시했습니다. 한나의 메아리는 제주 4.3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입니다. 태 의원은 "김일성은 남로당의 무장 폭동을 잘 다루어주지 않았는데, 제주 4.3 사건 만은 다부작 드라마 '한나의 메아리'를 만들어 김 씨 일가에 대한 충실성 교양에까지 이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2003년 1월 북한 조선중앙TV에서 방영된 '한나의 메아리'

하지만, 위의 근거는 4.3 사건 직후 만들어진 '팩트' 중심의 자료들이 아니라, 주로 20세기 후반 북한 내에서 만들어진 '해석'과 관련된 자료들입니다.

오히려 김 씨 일가가 80년대 들어 4.3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양조훈 4.3중앙위원은 최근 제주의 소리와의 인터뷰에서 "북한 정권은 1980년대 이후 제주 4.3 사건을 조명하기 시작하는 데, 정권 차원에서 (김 씨 일가의 업적을 홍보하는 목적으로) 4.3이 이용되는 느낌도 받는다"고 봤습니다.

어느 정도 합의된 역사적 사실이 있을 때, 이에 대한 반론에 대한 입증 책임은 당연히 반론 당사자에게 있습니다.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은 주류 역사학계에서 아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김일성이 남로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아들인 김정일이 남로당의 업적을 기념하는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건 결코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직접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당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설령,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의해 4.3 사건이 발생했다고 해도, 그 이후에 벌어진 7년 동안의 민간인 학살 책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예비 황태자를 암살했던 '사라예보 사건'에서 시작됐지만, 그간 곪아있던 정치 외교적 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의 원인을 단순히 사라예보 사건으로만 보는 역사학자는 없습니다. 사라예보 사건은 1차 세계대전의 '계기'였을 뿐, '원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1948년 4월 3일의 무장 투쟁은 4.3 사건의 계기였을 뿐,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당시 보고서를 보면, 군인과 경찰 토벌대에 의한 희생이 78.1%, 무장대에 의한 희생은 12.6%였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태영호 의원은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의 근거로 4.3 사건 주동자 김달삼의 행적을 제시했습니다. 태영호 의원은 "남로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박헌영과 함께 처형되거나 숙청됐지만, 김달삼 등 (4.3 사건) 무장 폭동 주모자들은 배를 타고 북한으로 도주했고, 북한으로 올라가 영웅으로 대접 받았다. 이후 그는 애국열사릉에 매장됐다"고 말했습니다.

김달삼의 이후 행적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달삼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 투쟁을 일으킨 뒤, 무책임하게 8월 2일 배로 제주도를 탈출해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반발해 열린 8월 21일 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석, 대의원으로 선출됩니다. 

당시 김달삼의 연설문이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연설문 내용을 보면, 김일성의 경쟁자였던 박헌영을 지지하고 있는 반면, 김일성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박헌영은 한국전쟁 이후인 1955년 혹은 56년, 김일성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미국의 첩자 및 정부 전복 음모의 죄목으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대표자 여러분! 저는 박헌영 선생의 하신 선거에 대한 보고를 듣고 감격하였으며, 특히 제주도 투쟁에 언급하실 때 지금까지 적과 가렬한 피투성이 투쟁을 하던 저로써는 생생한 기억이 머리 위에 떠오르는 것을 금치 못했습니다. …… 민주 조선 완전 자주독립 만세!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령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
- 김달삼의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1948년 8월 21일) 연설문

이후 그의 행적은 학계 해석이 분분한데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대한민국 전복을 위한 게릴라전을 펼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언론은 1950년 3월 강원도 정선 전투 중에 사살됐다고 보도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곳으로 알려진 강원도 정선 여량면 봉정리의 한 마을은 남한에서 두 번째로 긴 지명인 '김달삼모가지잘린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반면, 김달삼이 전투를 피해 4월에 월북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만큼 4.3 사건 이후 김달삼의 행적은 알려진 게 많지 않습니다.

즉, 김일성 정권 수립 초기, 북한에서 제주 4.3 사건과 김달삼을 적극적으로 추앙하고 높게 평가한 기록을 별로 찾아볼 수 없는데, 오히려 8~90년대 들어 이런 경향이 강해졌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실제, 평양 애국열사능의 김달살의 묘도 1980년대 조성된 '가묘'로 알려졌습니다. 묘비에는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0년 9월30일 전사한 것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결국, 남로당의 무장 투쟁 가운데, 김일성이 유독 4.3 사건과 김달삼을 추앙했다는 태영호 의원의 주장은 보다 정밀한 사료로 뒷받침돼야 합니다. 태 의원이 제시하고 있는 '한나의 메아리'나 '김달삼의 가묘'는, 김일성 정권이 1980년대 이후 자신들의 업적을 홍보하는 데 이용하고 있다는 정황 증거일 뿐, 김일성 정권이 4.3 사건 발생 당시부터 유별나게 대접하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설령, 태영호 의원이 이를 사료로 입증하더라도, 김일성의 지시를 받은 남로당 중앙당이 제주 4.3 사건을 기획했다는 직접 증거가 될 수도 없습니다. 직접 기획하지 않아도 본인들의 정치적 이해 타산에 들어 맞으면, 마다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후세에 의해 '합의된 사실'이며, 따라서 새로운 사료가 나오면 그 합의된 사실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태영호 의원이 제시하는 증거들은 그간 합의된 사실을 부정할 만큼 위협적이지도 않다고 판단됩니다. 태 의원의 발언은 지금껏 극우 단체에서 주장해 왔던, 기시감 있는 주장들입니다.

태영호 4.3 발언 이경원 사실은 팩트체크
1949년 4월, 농업 학교로 보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귀순자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가려내는 심문반. 제2연대 제주도주둔기 앨범.

제노사이드(genocide) : 인종, 민족, 종족, 이념, 종교 등의 대립을 이유로 특정 집단의 구성원을 대량 학살해 절멸시키는 행위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우리가 역사 책에서 배운 그대로 입니다. 남쪽에서 단독 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남로당은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파업 활동 뿐만 아니라, 각종 테러와 무장폭동, 게릴라전 등을 주도하며 남한 정부를 뒤흔들었습니다. 한국 전쟁 직전인 1940년대 후반, 남로당의 폭동과 진압이 반복됐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수많은 폭동과 진압의 반복 속에서, 왜 유독, 제주 공간에서 이런 참혹한 학살이 벌어졌는가 입니다. 1948년 4월 3일, 폭동의 최초 참여자는 1,500명입니다. 하지만 최종 사망자는 만 명이 넘었습니다. 이런 경과를 보며 '대량 학살'의 '왜'를 찾아가는 게 우리의 임무일 겁니다. 

4.3 연구자인 허호준은 제주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는 과정을 주목합니다. 당시 학살의 가해자였던 육지 사람들이 제주 언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제주어 통역관을 대동하거나, 심지어 일본어로 소통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는 2012년 4.3 64주년 학술 대회에서 "이런 소통 과정은 제주 주민을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 이민족이라는 관념을 갖게 했으며, 제주 사람들을 비인간화 하는 기제로 작용해 대량 학살의 촉발 원인이 됐다."고 진단했습니다. 

이런 통역의 과정은, 제주 주민이 우리와 일상어를 공유하지 않는, 우리와 다른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통역이 필요할 정도로 언어가 완전히 달랐던 그들에 대해, 육지 사람들은 제주 주민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이라는 편향이 생겼고, 그렇게 사악함의 대푯값이던 '빨갱이'라는 정체성을 손쉽게 덧씌울 수 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학살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도덕적 억제력이 손상되는 과정들입니다. 인류사 대부분의 학살은 이런 과정을 거쳤습니다. 제주 주민들의 자구책은 빨리 서울말 배워서 제주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주어는 그렇게 소멸해 갔습니다.
 
나치 트레블린카 수용소장 쉬탕글이 트레블린카에서 희생자들을 '화물'(cargo)로, 파라과이인들이 아체 인디언을 '병든 쥐'(Guayaki)라고 부르며 비인간적 존재로 간주하거나, 베트남 전쟁 당시 사이공 장교들이 농민들을 하위종(subspecies)로 여겨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 게 아니라 반역적인 동물을 절멸시켰다"고 하듯이, 4.3시기 군경과 극우세력의 눈에는 제주 사람들은 '빨갱이', '폭도', 악마'로 간주됐다. (서북 청년단의 플래카드에는 Cruch Red Devils라고 돼 있다) 이는 비인간화 과정이었으며, 비인간화는 학살에 대한 도덕적 억제력을 손상시켰다.
- 허호준. (2020). 제주4·3·여성·삶 : 구술생애사적 접근. 4.3과 역사, 20, 117-158.

이런 까닭에 제주 4.3 사건을 '인종 학살'의 관점에서 제노사이드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해방 공간 남로당의 수많은 무장 투쟁 가운데 왜 하필 제주의 비극이 유독 참혹했는지, 좌우 갈등의 망원경 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홀로코스트 역시 비슷합니다. 디아스포라 이후 늘 박해 받았던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왜 하필 2차 세계 대전 공간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는가, 그 맥락을 추적하다 보면, 히틀러의 사악성 말고도 달리 설명할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수만 명이 희생된 한국 현대사 이 참혹한 비극을, 하나의 시각으로 손쉽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4.3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 배경과 맥락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다양한 층위가 얽히고 설킨 복잡한 결과물입니다.

그 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여전히 생존해 있습니다. 주류 역사학계의 합의된 사실도 있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합의된 역사가 반박의 성역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반박을 하려면 합의된 역사를 위협할만한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진부하고도 설 익은 의혹 제기가 늘 정치권에서 시작된다는 것, 우리 정치의 가벼움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 같아 안타깝습니다.

(인턴 : 강윤서, 정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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