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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나와 너에게 선물합니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북적북적]

올해의 나와 너에게 선물합니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66 : 올해의 나와 너에게 선물합니다. - 신형철 《인생의 역사》

이제 네 이야기를 너에게 할게.

2022년, 어떤 1년을 보내셨습니까? 각자의 지나간 시간들은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북적북적]을 들으시는 모든 분의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에 설렘이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2022년이 소중하고 멋진 시간이었다면 '새해에도 쭉 이 기세 그대로!' 하는 마음으로, 이제야 끝났구나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면 '새해부턴 점점 더 좋아질 거야.' 소망을 가져보는 마음으로. 바뀌는 연월일, 시간을 따져서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는 게 딱 사람만이 스스로에게 지어놓는 틀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러니까 가장 사람다운 행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시간들에 의미를 부여해 주고,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기도 하면서 잘 정리하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게 얼마나 사람다운가요.
 
그 밤으로부터 수천 년이 흘렀다. 이상은은 [공무도하가]를 불렀고 김훈은 [공무도하]를 썼고 진모영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찍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그들에게도 [공무도하가]는 각별하다는 뜻이다. 상고시가上古詩歌로 함께 묶이는 [구지가]나 [황조가]와는 달리 [공무도하가]만이 언제나 나를 사무치게 한다. '나는 내 뜻대로 안 된다. 너도 내 뜻대로 안 된다. 그러므로 인생은 우리 뜻대로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수천 년 전의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아서 들어본 적 없는 그 먼 노래가 환청처럼 들린다. 나는 백수광부다. 나는 그의 아내다. 나는 곽리자고다. 나는 여옥이다. 나는 인생이다. ('가장 오래된 인생의 낯익음' [공무도하가] 풀이 中)

[북적북적]에선 오늘, 신형철 평론가가 겨울의 문턱에서 4년 만에 낸 에세이집 [인생의 역사]를 읽습니다. 이 분의 신작을 기다려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형철 평론가는 지금 우리말을 하면서 글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대부분 그 이름을 알고 있을 만큼 신뢰를 얻고 있는 작가입니다. 4년 전 마지막으로 냈던 에세이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역시 [북적북적]에서 조지현 기자가 읽었습니다.
 
나는 심지어 제3의 가능성까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를 견인하는 구절이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Thou mayst in me behold" 혹은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in me thou seest"라는 점이 의미심장해서다. 이런 표현들이 미묘하게 강조하는 것은, 겨울이 오고 해가 지고 불이 꺼지는 그런 변화들 자체가 아니라, 그런 소멸의 풍경들을 '그대'가 '내 안에서in me' '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주관적 판단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변함없이 존재하더라도 그대는 나를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대가 그렇게 보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속에서 늙는 것은 나나 그대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 그 자체라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런 모호성은 즐길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의 주제 선율과도 같은 또렷한 메시지를 흔들지는 못한다. 시인은 늙는다. 물론 청년도 늙는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사랑이 늙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진부한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청년도 내 안에는 있다. 그러나 내가 나에게서 황폐한 성가대석과 저무는 해와 하얀 잿더미들을 보게 될 날이 그리 천천히 오지는 않을 것임을 알아차린 시인도 내 안에 있다. 나는 내 안의 청년에게 이 시를 읽어주면서 삶을 더 사랑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고집이 세고 기억력이 나쁘다. 셰익스피어가 옳다. 그가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 ('그대가 잃을 수밖에 없던 그것'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 풀이 中)

[인생의 역사-'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는 신형철 평론가가 한겨레에 2016년 연재했던 '신형철의 격주시화'를 엮어 낸 책입니다. '격주시화'는 작가가 아껴 읽어온 시들, 동서고금의 시적인 작품들을 그의 시선에서 쪼개 보고 되새김질하는 글들이었습니다. 삶 속에서 아껴 읽어온 시들을 쪼개 보고 되새김질함으로써, 스스로의 인생과 사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드러납니다. 작가는 당시의 칼럼들을 조금씩 고치고 책의 앞뒤를 감싸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새로 더해 이 책을 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신형철 평론가의 새 책을 오래 기다려온 사람들 모두 흡족 그 이상의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책입니다. 문장들은 읽는 마음을 부드럽고 푹신하게 감싸다가, 낭독의 발걸음이 저절로 박자감을 갖추며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반석처럼 탄탄해집니다. 사랑해 온 시들을 쪼개 보는 손길이 세심하고 치밀하면서, 늘 그 자신만의 참신한 시야로 한 모퉁이 너머를 더 보여줘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고 설득합니다.

다만, 신형철 평론가의 이번 책 역시 이토록 꽉 차 있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북적북적]에서 소개하지 않아도 이미 중쇄에 중쇄를 거듭하고 있는 베스트셀러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느낌이 퍽 남다를 수 밖에 없어, 2022년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의 한가운데에서 나누고 싶은 책으로 결국 [인생의 역사]를 저는 선택했습니다.
 
셰익스피어에게서 브레히트로 이어지는 이 사랑의 태도에 나는 '조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조操'라는 한자는 세 개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왼편에는 손이 있고, 오른편 아래에는 나무, 그 위에는 세 개의 입이 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면, 물론 그 내용을 전적으로 믿어도 좋을지 모르겠으나, '손으로 나무 위에 있는 새를 잡는' 모양을 따른 글자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거기에 '심心'을 더한 '조심'의 뜻은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이 될 것이다. 손으로 새를 쥐다니, 과연 조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의 조심은 우선 '너'에 대한 조심이다. 나는 물건을 자주 떨어뜨린다. 거기엔 단 한 가지 이유 밖에 없다. 꽉 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는 이유도 하나뿐이다. 떨어뜨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떨어뜨리면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결함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대체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내게 말했다. 제발 손아귀에 힘을 주라고, 이제부터는 결코 그 무엇도 함부로 놓쳐선 안 된다고. 아이를 꽉 쥘 순 없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새를 쥐듯이, 놓치지 않을 만큼만. 그러나 이건 누구나 아는 얘기다. 다시 말하지만, 시인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나'에 대한 조심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아이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새처럼 다뤄야 한다. 새를 손으로 쥐는 일은, 내 손으로 새를 보호하는 일이면서, 내 손으로부터 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내 삶을 지켜야 하고 나로부터도 내 삶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결국 아이의 삶을 보호하는 일이다. 아이를 보호할 사람을 보호하는 일이므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아이에게 가해자가 되고 말 것이다. ('조심,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에 대하여'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풀이 中)

신형철 평론가는 이 책을 2022년 안에 출간하려고 서둘러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인생의 역사]는 그가 2022년에 태어난 아들에게 선물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2022년에 "이 책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그 한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책을 내기 위해 그가 올해 써 덧붙인 여기 실린 글들에서, 본인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세상에 나온 아들을 만났기 때문에 갖게 된 생각과 감정들이 분명한 대목들이 이어집니다. 스스로의 문학 인생을 씨줄 날줄로 짜고 있는 시들에 대한 마음을 엮어 낸 글들을 한 권의 책에 담아 [인생의 역사]라는 이름을 붙이고, 같은 해에 태어난 아들에게 그 사실을 선물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그 한 권의 책으로 2022년을 마무리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는 사실로부터 휘몰아쳐오는 온갖 생각과 감정들을 글로 써 정리하지 않고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쓴 글들을 읽으며 이 시기를 지날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다. 글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후의 무엇이고, 가장 엄정한 객관화와 거리두기의 도구이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적당히 침착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이 정도로 해두자.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의 기쁨과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의 혼합 이상을 넘어서는 감정에 대해서 아버지는 글을 쓸 수 있지만, 감정 이전에 몸으로 당장 이것을 살아내고 겪게 되는 엄마에게는 시간이 좀더 필요하다, 라고요.

제게도 2022년은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한 해였습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 몰입의 경험 때문에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안 그런 척, 쿨한 척, 여전히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인 척 해보려고 해도, 기존의 모든 것들이 부서지는 수준의 몰입을 하지 않고는 무엇 하나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갑자기 내게 다가온, 아직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람보다 동물에 좀더 가까운, 그저 순전하게 존재해서 경이로운, 경이의 존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토니 모리슨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그 밥을 먹고, 소화시키고, 똥이 되고,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는 그 모든 과정 중에서, 오로지 식탁에 차려진 밥을 먹는 것만 해 본 사람이 삶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정확히 한 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만, 이런 의미의 이야기가 [술라]라는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삶을 조금 더 깊이 알아가는 '채비'를 할 수 있는 계기 중 하나를 저는 20여 년 전 [술라]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제게 찾아와 준 벅찬 선물 덕에, 저는 식탁에 차려진 반짝반짝한 접시, 맛있는 한 상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 줄 아는 사람에서 벗어났습니다. 재료부터 하나하나 밑손질하고, 밥짓는 열기가 뜨거운 그늘에서 정성을 다 하고, 뜨거운 냄비에 손도 살짝 데어 보고, 음식물 쓰레기의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도 알게 된, 진짜 밥을 알게 된 사람으로서 삶을 좀더 살고 있습니다. 최소한, 그런 사람에 조금은 더 가깝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제 네 이야기를 너에게 할게. 그러니까 네가 태어났을 때 내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경고했다는 이야기. 조심하라고, 네가 나를 필요하다 느끼는 마지막날까지 나는 살아 있어야 한다고.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에 대한 네 마음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불리건 그게 내가 너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다를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 45년을 살았고 누군가의 아버지로 아홉 달을 살았을 뿐이지만, 그 아홉 달 만에 둘의 차이를 깨달았다. 너로 인해 그것을 알게 됐으니, 그것으로 네가 나를 위해 할 일은 끝났다. 사랑은 내가 할 테니 너는 나를 사용하렴. 나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지. 그래서 내 어머니는 두 사람 몫을 하느라 죽지도 못했어. 너의 할머니처럼, 나는 조심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각오할 것이다. 빗방울조차도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죽지 않을게. 죽어도 죽지 않을게.

[인생의 역사]를 처음 펴 들기 전 저 역시 수많은 새벽녘들에 뜬눈으로 했던 생각들이 지면에 인쇄돼 있어 들킨 듯 놀라웠습니다. 감당하기 무서울 만큼 벅찼는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안심 섞인 용기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삶에서 아껴 읽어온 작품들을 풀이하는 것으로 신형철 작가는 아들에게 이 마음을 맹세해 두었습니다. 아껴 낭독하고 있는 [북적북적]을 통해서 저도 같은 맹세를 여기 세워 둡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2022년을 함께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새해에도 함께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북적북적] 가족 분들 모두 설렘과 함께 새해를 맞으시기를 가슴 깊이 기원합니다.

*출판사 '난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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