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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2701호' 사태는 예견된 갈등…정몽규 회장이 직접 답해야 하는 이유

[취재파일] '2701호' 사태는 예견된 갈등…정몽규 회장이 직접 답해야 하는 이유
12년 만에 원정 16강 쾌거를 이룬 태극전사들은 이제 기쁨을 뒤로 하고, 속속 일상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뜨거운 가슴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성찰할 시간입니다. 그 첫 번째로, '2701호'에서 있었던 일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월드컵 기간 우리 대표팀 선수들 관리가 적절히 이루어졌나 입니다. 짚어보겠습니다.
 

재활 트레이너는 어떤 일을 하는가

안덕수 트레이너, 한국 축구대표팀(사진='안덕수' 트레이너 인스타그램)

현대 축구에선 물리 치료와 훈련이 긴밀하게 연계되면서 AT(Athletic Trainer)와 PT(Physiotherapist) 등 재활 트레이너의 역할과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감독이 아무리 훌륭한 전술을 짜도, 선수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트레이너는 주치의 진단에 따라 선수에 맞는 훈련 계획을 세우고, 함께 뛰는 일을 맡습니다. 또 훈련과 경기 뒤엔 선수 한 명 한 명의 근육을 두 손으로 직접 관리합니다. 대회기간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바로 이들의 치료실입니다. 트레이너 한 명이 한 선수당 매일 두 시간 남짓, 대여섯 명씩 책임지다 보니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각한 직무입니다.
 

왜 갈등이 끊이지 않는가


건강과 직결된 일이다 보니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주치의와 재활 트레이너, 피지컬 트레이너 영역이 고유한 전문성을 띠면서도 서로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보니 관점에 따라 의견 충돌이 잦습니다. 또 선수마다 부상 이력과 신체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라포형성'이 필수적입니다. 유럽의 주요 명문 팀들이 의학과 물리치료 영역은 물론, 생리학, 영양학, 운동 역학, 약학, 심리학, 데이터분석 전문가를 스포츠 사이언스팀에 한 데 묶어 '팀워크'를 발휘하도록 하는 배경입니다. 시너지를 낼 때 비로소 효과는 극대화됩니다.
하지만 '과학'보단 '직관', '조직력'보단 '학력', '시스템'보단 '개인기'를 앞세워 '가성비'만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에선 학연, 지연, 혈연 등 '줄'에 의존하는 분야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서로 신뢰하기 어려워졌고,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됐습니다.
 

늘어나는 유럽파…눈높이 맞추지 못하는 협회

손흥민 간절했던 마스크 투혼

한 명의 선수를 공유해야하는 소속팀과 대표팀 사이에도 서로 '불신'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남아공 월드컵을 앞둔 2009년, '캡틴' 박지성의 대표팀 차출에 난색을 보이던 소속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대표팀 훈련장에 이례적으로 피지컬 트레이너를 직접 파견해 무릎 관리를 돕도록 했습니다. 이번 대회 직전 눈 주위 뼈, 네 군데가 부러지며 크게 다친 손흥민 선수의 경우도 협회와 토트넘은 긴밀히 협의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정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마찰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토트넘은 주요 자산인 손흥민 선수의 부상 정보를 가급적 공개하지 않으면서 신중하게 접근한 반면, 축구협회 입장에선 같은 정보라도 다소 낙관적으로 해석하며 출전 가능성에 힘을 실어야 했던 입장이었습니다.
입장만 다른 건 아닙니다. 연간 수천억 원, 많게는 조 단위의 예산을 집행하는 '빅클럽'에선 스포츠 사이언스 분야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반면, 1000억원 남짓한 예산 규모에 수년째 머물러 있는 축구협회에선 관련 투자 역시 정체돼 있습니다. 황희찬 선수가 상의 탈의 세리머니를 하며 화제를 모은 전자성능추적장치(EPTS) 도입도 예산 문제로 현장 목소리가 뒤늦게 반영된 경우입니다. 이렇게 스포츠 과학 분야에서 유럽 주요 클럽과 축구대표팀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습니다.
 

끊이지 않는 잡음…예견된 사태


잡음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직전엔 황열병 주사에 대한 주치의의 뒤늦은 대처가 도마 위에 올랐고, 2019년 아시안컵 기간엔 주치의 선정 방식과 의무 트레이너의 처우 문제가 잇따라 터졌습니다. 모두 대회 성패와 직결되었습니다. 브라질에선 1무 2패, 2002년 월드컵 이후 최악의 성적을 받았고, 아시안컵에서도 8강 탈락하며 2007년 이후 3회 연속 4강에 오르던 흐름이 끊겼습니다.
협회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출범한 게 '축구과학팀'이었습니다. 전력강화실 산하에 관련 팀을 편성한 뒤 직무의 전문성, 선정의 공정성, 처우 개선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야심 차게 출범한 축구과학팀은 얼마 가지 못하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정몽규 회장이 직접 답해야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환영 행사, 정몽규/대한축구협회장

이번에 '2701호'에서 일어난 일은 앞서 설명한 여러 부작용의 '종합세트'입니다. 사상 초유의 겨울 월드컵으로 인한 빡빡한 일정 탓에 해외파는 해외파 대로, 국내파는 국내파 대로 크고 작은 부상을 안고 카타르 도하에 모였습니다. 일부 선수들은 채용 당시부터 공정성 시비가 일었던 의무팀장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팀장은 20년 넘는 경력의 '베테랑'으로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지만 무너진 신뢰는 쉽게 복원되지 않았습니다. 선수 생명, 인생을 걸고 나서는 대회에 내 몸을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려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2701호' 입니다. 억대의 부대 비용을 선수들은 갹출했습니다.

그리고 주치의를 비롯한 협회 의무팀과 '2701호'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깎아내렸습니다. 이 갈등을 협회는 중재하지 못하고 '원칙'뒤에 숨어 방관했습니다. 그나마 전례와 달리 이번 대회에서 원정 16강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공식 치료실과 비공식 치료실이 갈등을 빚으면서도 각자 최선을 다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적어도 선수 치료에 있어서는 모두가 한 마음이었습니다.

반복되는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정몽규 회장에게 있습니다. 축구협회는 지난해 정 회장 주도로 조직 개편을 단행한 뒤 모든 분야에서 행정력이 뒷걸음질 쳤습니다. 이른바 '애자일(Agile)' 조직입니다. 축구과학팀도 이 무렵 조직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이후 벌어진 행정 난맥상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민망합니다. 축구협회가 주관하는 가장 역사가 깊은 대회, FA컵(부산교통공사:FC서울)은 보안인력마저 배치되지 않은 채 동네축구보다 못한 환경에서 치러졌고, 아시아축구연맹 23세 이하 아시안컵에 나선 국가대표 선수들은 협회가 귀국 항공편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해 소속팀 합류 일정에 차질을 빚었습니다. 이후 동아시안컵에 나서는 A 대표팀은 '비자 지각 신청'으로 체면을 구겼고, 협회 고위층이 벤투 감독의 용인술을 유튜브 개인 채널에서 비판해 물의를 빚기도 했습니다. 이 와중에 시작부터 완패가 예상된 싸움이었던 아시안컵 유치전은 밀어붙이기식 행정의 극치를 보여줬습니다. 국내 체육 단체 중에 최고의 행정력을 갖췄다고 자부하던 엘리트 조직이 이제는 '역대 최악의 행정력'이란 비판에 직면했습니다.

카타르 월드컵 최고의 샛별로 떠오른 조규성은 '2701호' 관련 질문을 받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 어색한 침묵이 흐른 몇 초가 다른 모든 멋진 발언을 집어삼켰습니다. 스포츠 과학이 발전할수록 선수 관리 체계는 전문, 세분화되고, 선수들의 요구 수준은 높아질 겁니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고, 갈등을 통합하며 미래지향적인 해답을 제시할 책임은 정몽규 회장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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