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뉴스쉽] 전쟁터라면서 왜 이렇게 평온해요? 직접 들여다 보니…

우크라이나 전쟁 100일…전쟁은 끝날 수 있을까?

"너, 그 취재 안 가면 안 되냐?"
한 번도 딸의 선택에 반대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적잖게 당황했다.
"아니, 제가 가는 지역은요, 우크라이나 서부라 비교적 안전한 곳이에요. 별일 없을 거라니까요."
"네가 전쟁을 아니? 예측할 수 없는 게 전쟁이야. 전장에는 적군과 아군이 있지만, 희생에는 적과 아군이 없는 거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아버지는 전선을 함께 누비던 친구 둘을 잃을 줄 몰랐고, 베트콩의 게릴라 전을 제압하기 위해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로 평생을 투병하게 될 줄도 몰랐을 것이다. 다행히 딸은 지난 4월 12일부터 33일간 우크라이나 전쟁을 취재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월 24일 '특수군사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00일이 지났다. 6월 3일이 꼭 100일째다. 양국의 군사력 차이로 금방 끝날 것으로 예상됐던 전쟁은 우크라이나가 결사 항전하면서 장기화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 들었다. 러시아는 동부 지역으로 화력을 집중하면서 돈바스 지역의 요충지 세베로도네츠크의 대부분이 함락된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의 무기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의 반격도 더 거세지고 있다. 전쟁 100일 동안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지만, 여전히 치열한 총성이 울리고 있다.

뉴스쉽 우크라이나편

"안전한 곳에서 취재하면서…" 위험을 취재할 자유는?

전쟁 시작을 전후로 한국 언론사들도 앞다퉈 현장으로 뛰어갔다. 대부분 우크라이나 인접 국가인 폴란드와 루마니아에서 취재했다. 하지만 총성이 울리는 우크라이나 현장에서 취재하는 기자들은 없었다. 전쟁을 피해 우크라이나를 떠나오는 사람들은 만나면서도, 정작 우크라이나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을 직접 취재한 기자는 없었다. 우크라이나 현지 상황을 외국 언론들이 취재한 내용을 받아쓴 기사뿐이었다. 기사마다 'CNN, BBC는 폭격 현장에서 보도하는데, 인접 국가에서 무슨 취재를 한다는 것이냐?'는 날 선 댓글들이 달렸다. 현재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취재하는 1천여 명의 외신 가운데 한국 취재진은 단 한 명도 없다.

변명 같은 사실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8월부터 '여권법'에 따라 취재 기자들에게도 여행금지 제도를 시행했다. 샘물교회 피랍사건 이후 여행 금지 국가의 입국은 예외적으로 허가를 받도록 법이 바뀌면서 국내 언론은 우크라이나 상황을 외신 보도를 통해 접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발발 한 달여가 지나서야 일부 취재진이 정부의 '허가'를 받아 우크라이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나마 갈 수 있는 지역은 수도 키이우에서 500km넘게 떨어진 서남부 체르니우치주였고, '하루 4명 이내, 방문 기간은 3일 이내' 조건이 붙었다. 한국기자협회보 김고은 기자는 "기자들은 전쟁의 공포가 아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취재한다. 그 과정에서 위험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이를 감수할 자유와 책임이 언론에 있다. 언론의 자유는 안전한 상황에서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위험한 지역일수록 정보가 제한되고 통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진실을 대신해서 전할 책무가 언론에 있다"고 보도했다.
취재지역 변화
유럽 주재 특파원 등 한국 언론인들은 "언론 자유에 대한 통제"라며 현지 취재를 보장하라는 성명을 냈다. 4월 25일 외교부는 기자들의 비판에 서부 거점 도시 르비우 등으로 방문 가능한 지역을 확대했다. 취재 기간도 2박 3일에서 4박 5일로 늘렸다. 하지만 이곳 역시 전장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외교부는 5월 26일 다시 취재 목적의 우크라이나 방문에 관한 기존 방침을 변경했다. 보도 목적으로 방문 가능한 지역을 키이우, 르비우, 체르니우치 등 중서부 11개 주로 확대했다. 방문 가능 기간은 2주, 방문 인원도 20명 이하다. 오는 9일, 전쟁이 시작된 지 100일이 훌쩍 넘어서야 키이우를 취재하게 된다.

"평온해 보인다고요?" 거대한 난민캠프가 된 '체르니우치'

처음으로 취재가 허락된 곳은 우크라이나 남서부 인구 25만의 작은 도시 체르니우치다. 언뜻보면 유럽의 평화로운 도시 같아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이곳도 조용한 전쟁을 하고 있었다. 많을 때는 하루 다섯 번씩 공습경보가 울려 주변 방공호로 대피를 해야한다. 경보 기준이 정확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러시아 비행기나 미사일이 관측되거나 주변 지역을 지나갈 것으로 예상될 경우 경보가 발령된다.

이 작은 도시에 6만 명이 넘는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피란캠프다. 전 세계 구호단체와 봉사단체가 이곳에 몰려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와 체르니우치 주가 운영하는 난민 보호 시설도 이곳에 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주변국 자원봉사자들이 마련한 거대한 난민 구호 캠프가 들어섰다. 하루 세 끼 식사, 이발 서비스, 아이돌봄서비스를 제공하고 임시 숙소도 마련돼 있다.
체르니우치
치열한 전투끝에 지금은 러시아의 점령된 마리우폴을 아내와 함께 탈출한 올레그 씨.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는 부모님과 여동생을 두고 체르니우치로 왔다. 러시아군의 총격과 지뢰를 겨우 피해 마리우폴을 빠져나온 그는 신이 도왔다고 표현했다. "그곳에서 살아서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였어요. 제가 떠나고 2,3일 후에 출발한 사람들은 이동 중에 러시아군에게 총을 맞고 폭격을 당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다른 피란민을 위한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 포탄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평화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전쟁을 치르고 있으니까요."

전쟁 중에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

체르니우치에 있는 한 초등학교. 점심시간이 끝나 한창 아이들이 시끄럽게 뛰놀 시간인데 조용하다. 젊은 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말이 학교지 온갖 구호물자가 쌓인 창고였다.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눌러 그린 그림이 복도 벽을 채우지 않았다면, 초등학교라 믿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구호 물품 창고로 쓰이는 1층에는 이웃 나라에서 보내온 생활용품, 옷가지, 신발 등이 질서 정연하게 쌓여 있었다.

눈발 날리던 한겨울 시작된 전쟁은 유채꽃이 필 때까지 이어졌고, 학교는 얇은 옷이 필요한 피란민들이 언제든 가져다 입을 수 있는 창고를 마련했다. 교사들은 매주 생필품이 필요한 지역으로 물건을 보낸다. 또 체르니우치로 피란 온 피란민들에겐 무료 생필품 보급소 역할도 한다. 실내 체육관과 운동장에 있는 축구 골대와 배구장 그물은 아이들과 선생님 손에서 위장막으로 재탄생했다. 우크라이나의 모든 초등학교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대면 수업을 중단했다. 수업은 온라인으로 대체됐고, 대신 학교는 피란민 쉼터와 군수 물품 보급소, 군사훈련 시설이 됐다.

학교 3층 낡은 실내 체육관에서 경쾌한 음악과 박자를 맞춘 발소리가 들렸다. 우크라이나 국립민속 무용단이 우크라이나 전통음악에 맞춰 신나는 춤사위를 펼치고 있었다. 수도 키이우에서 활동해 왔지만, 전쟁통에 공연장과 연습실이 없어 체르니우치까지 피란해왔다. 화려한 무대 대신 야외 공원에서 무료 공연을 한다. 무용단 책임자 다니엘의 말이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춤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희망'을 주제로 한 공연을 할 겁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요" 지구과학 교사이자 이 학교 교장 선생님인 세르게이는 "최선을 다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댄스팀

"커피 마시다가…" 미사일 폭격으로 민간인 사망

4월 25일 외교부에서 서부 르비우 지역에 대한 예외적 여권 허가를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5월 7일 새벽 통금시간을 지나 우크라이나에 다시 입국했다. 러시아의 대대적인 공습이 예견된 전승전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르비우는 서방 국가들이 지원한 무기들이 집결되는 곳으로 여러 차례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철도, 물류창고, 발전소 등 곳곳이 폐허로 변했다. 지난 3월 27일 러시아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폴란드 방문일에 르비우를 순항 미사일로 공격해 연료 저장 시설이 불에 탔다. 4월 18일엔 러시아군이 서방의 군수보급망을 포격하는 과정에서 건물이 무너져 커피를 마시며 출근했던 민간인 4명이 사망하는 등 최소 7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다쳤다.

현장
취재진이 르비우에 도착하기 3일 전에도 러시아가 변전소를 폭격했다. 새벽 4시 공습경보가 울렸고 러시아의 미사일이 발전소를 직격했다. 르비우 시내는 순식간에 정전이 됐다. 폭격으로 시커멓게 변한 발전소의 모습은 처참했다.
발전소

르비우와 수도 키이우에는 전 세계 취재진들이 모여있는 미디어센터가 있다. 미리 프레스카드를 발급 받아야 현지에서 취재가 가능하다. 폭격 현장, 어린이 병원, 기차역, 시청 앞 광장 등 어디서 취재하든 수차례, 때론 수십 차례 씩 취재증과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우크라이나 취재증

미디어센터가 제시한 취재 주의사항을 읽어보니 다시 한번 이곳이 전시 상황임이 실감났다. '군복과 헷갈릴 수 있는 녹색의 옷은 입지 마십시오', '투항에 대비해 흰색 천을 갖고 다니십시오', '안테나가 달린 장비는 갖고 다니지 마십시오. 간첩 혐의로 기소될 수 있습니다', '무기와 비슷하게 생긴 물건을 소지하지 마십시오' '구급약을 항상 휴대하십시오' 등의 내용이다.

취재증1

전쟁터에서 아들이 돌아왔다…매주 합동 영결식

5월 11일 수요일 오후 3시. 르비우 시청 앞 성당에 조화를 든 사람들과 군인들이 모여들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아들을 맞으러 온 어머니는 운구 차량에서 내린 아들을 맞았다. 따뜻한 볼에 얼굴을 부비지 못해 온기 없는 관에 여러 번 입을 맞췄다. 르비우를 떠나 전장에 갔던 아들들은 결국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이 성당에서는 매주 고향을 떠나 전사한 군인들의 합동 장례식이 열린다. 보안상의 이유로 군인들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돼 있지만, 장례식 취재는 허락해 주었다. 현지 취재를 도와준 우크라이나인 세르게이는 "이렇게 매일 누군가의 사랑하는 아들이자, 다정한 남편, 기둥같은 아버지가 목숨을 잃고 있다"며 "전쟁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꼭 보도해 달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합동 영결식

전사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정확히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보기관 추정치를 인용해 우크라이나군 전사자가 4월까지 5,500~1만1천 명 수준이라고 보도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일 룩셈부르크 의회 영상 연설에서 러시아 침공 이후 군인과 민간인 등 우크라이나인 1만4천 명이 숨졌다고 밝혔다. 지난주 유엔은 우크라이나의 민간인 사망자가 4천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러시아는 올해 3월 군인 1,351명이 숨졌다고 밝힌 이후 희생자 수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최소 3만명의 러시아 군인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토의 약 5분의 1이 러시아에 점령됐다" 밝혔다. 또 "점령당한 면적이 12만5000㎢로 이는 베네룩스 3국(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을 합친 것보다 큰 면적"이라며 "30만㎢에 달하는 국토가 지뢰와 불발탄으로 오염됐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에 점령된 우크라이나 영토는 한반도 면적(약 22만3000㎢)의 절반에 달한다.

"우리 집이, 마을이, 도시가 사라졌어요…이젠 어디로"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찾아오면,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조차 사치인 사람들이 있다. 전쟁으로 살던 집과 마을이 아예 없어져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러시아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동남부 지역 피란민들이 그런 상황이다. 르비우 외곽에는 이동식 주택 단지가 문을 열었다. 3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80채의 집이 들어섰다. 피란민 캠프나 보호소가 아닌 기간 제한 없이 장기간 생활할 수 있는 곳이다. 침실과 공동 식당, 샤워실이 마련돼 있다. 이런 시설들이 비교적 피해가 덜한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속속 마련되고 있다.

이동식 주택
동부 루한스크에서 어머니와 딸과 함께 피란 온 옥사나 씨 가족도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녀의 집과 마을은 전쟁으로 없어져 돌아갈 곳이 없다. 고향이 재건될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때까지는 르비우에 머물며 일자리를 찾을 생각이다. "르비우에서 공부해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아야 하니까요"
옥사나
정든 고향을 두고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피란민 가족들은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취재진에게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꼭 한국에 알려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기자에게 사진을 청하며 품에 안긴 10살 베로니카는 도네츠크주 크라마토르스크에서 온 아이였다. 크라마토르스크에서는 지난 4월 러시아군 집속탄 공격으로 피란민이 몰린 기차역이 폭발해 민간인 50여 명이 죽고 300여 명이 부상했다. 이 아이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이들

잔혹한 전쟁…"도망치는 여성들 감금해 집단 성폭행"

"피해자들은 대부분 러시아군에 의해 집단 성폭행을 당했어요.
러시아군 점령 지역에서 도망치는 과정에서 발생다고 말합니다."

르비우에 본부를 두고 있는 우크라이나 여성변호사협회에서 변호사 헤리스티나를 만났다. 협회는 지난 4월부터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이 돕고 있는 여성들은 대부분 러시아군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민간인 여성들이다. 협회는 피해자들의 심리 상담과 치료를 지원하고 법적인 자문을 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협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 빙산의 일각이에요. 98%는 아직 입 밖으로 그 얘기를 꺼내지도 못했으니까요."
변호사협회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군이 민간인 상대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폭로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러시아군이 퇴각한 수도 키이우 북부 도시 부차의 집단 매장지에선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여성의 시신이 잇따라 발견됐다. 우크라이나 의회 인권감독관 류드밀라 데니소바는 여성 25명을 한 지하실에 감금한 채 조직적으로 성폭행한 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성인 여성뿐 아니라 소녀, 심지어 한 살 배기 아이까지 러시아군이 저지른 성범죄의 희생자가 됐다. 이리나 베네딕토바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은 "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연령대의 우크라이나 남성과 여성을 상대로 러시아군이 저지른 성범죄 사례를 수집했다"고 말했다. 또 러시아가 성폭행을 의도적인 전략으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시민 사회를 위협해 우크라이나가 굴복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1만 5천여 이르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세르히 드보르니크 유엔 주재 우크라이나 대표부 고문은 2일(현지시간) 국제법 위반에 대한 책임과 처벌 관련 유엔 안보리 공개 토론에서 전쟁 100일 동안 1만5000건 이상의 전쟁 범죄가 벌어졌고 지금도 매일 2~300건씩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군 퇴각 후 키이우 지역에서만 1200구의 민간인 시신이 발견됐다. 80여 일 간 결사항전 했던 동남부 마리우폴의 경우 러시아군이 장악하고 있어 그나마도 피해 상황 집계가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아동을 상대로 한 범죄 사건도 1,042건 제기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까지 어린이가 최소 261명 사망하고 260명이 부상했으며 145명이 실종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러시아로 강제 압송된 어린이는 2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잔혹한 전쟁…총상 입고도 이웃 주민 구한 15살 리사

르비우에 있는 한 어린이 병원을 찾았다. 보안 상의 이유로 정확한 숫자는 밝히지 않았지만 르비우의 이 병원에는 전쟁으로 다친 어린이들이 다수 입원해 있었다. 러시아 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거나, 피란 중에 다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다. 그곳에서 15살 리사를 만닜다. 15살 여느 중학생과 다름 없이 밝은 리사는 취재진에게 먼저 악수를 건네며 반가워했다.

리사가 고향 도네츠크를 탈출하는 과정은 험난했다. 리사는 포격 소리를 듣고 폭탄이 떨어진 곳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남성 2명이 폭탄 파편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습을 목격했다. 병원은 차로 1시간 거리. 전쟁터 한복판에서 운전하려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자 리사는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18살부터 운전면허를 딸 수 있지만, 리사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운전을 배워 운전을 할 수 있었다. 지뢰와 시체가 깔린 곳을 지나야 했고, 러시아군의 총격으로 리사는 다리에 4발의 총을 맞았다. 다리를 다친 채 32km를 더 달렸고, 다행히 20분 뒤 우크라이나 군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서 리사와 부상자는 목숨을 구했다. 리사는 일부 발가락을 잃고, 무릎 뼈가 부서졌다.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도록 그대로 둘 수는 없었어요. 무엇이든 해야 했죠."
리사

우리가 원하는 것은? "종전이 아닌 승리"

체르니우치에서 만난 알렉산드르 씨는 취재진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2014년부터 2년 간 친러 분리주의 반군 장악 지역인 도네츠크에서 복무한 군인이었다. 못 다한 학업을 마치기 위해 고향인 체르니우치로 돌아와 민간인 신분이 됐지만, 러시아 침공 이후 지역 방위군으로 다시 전쟁터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전쟁터로 나갈 모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지금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어요. 세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알렉산드르 씨에게 그의 바람을 물었다.
 
"제 아들이 12살입니다. 이 아이가 6년 뒤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지 않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는 것이 바람이냐고요? 아뇨. 종전이 된다고 해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반복될 것입니다. 종전이 아닌 승리를 원합니다. 다시 이 땅에서 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이죠."

군인
물론 우크라이나에 알렉산드르 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기를 바랄 것이고, 누군가는 승리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 하면서 전쟁 종식에 대한 입장도 엇갈린다. 우크라이나가 일부 영토를 내주더라도 전쟁을 멈추는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서방에서 나오고 있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크름반도와 동부 돈바스 일부 지역을 러시아에 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우크라이나와 주변국들은 영토 침해를 용납할 경우 향후 또 다른 전쟁의 구실을 마련해 줄 뿐이라고 강력히 반발한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우크라이나 키이우 국제사회학연구소가 지난 13~18일 우크라이나 국민 2천 명을 대상으로 의견을 물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사람 중 82%가 '영토 포기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했다.

영토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인식 조사

어쩌면 뉴스 너머 먼 곳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석 달 내내 본 식상한 뉴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몇 차례의 미사일 공격, 사망자와 희생자 수, 오르는 국제 유가와 물가. 누군가에겐 숫자로 헤아려지는 세계사의 한 장면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도 러시아의 폭격 소리 속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우리가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을 꼭 세상에 알려달라'고 취재진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33일 간의 취재를 마친다.

(구성: 장선이 기자, 콘텐츠디자인: 옥지수)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