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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북적북적]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북적북적]


북적북적 338 :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
 
"10만 통의
익명의 목소리들과
54만 번 그 이야기를 들어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
2018년 12월부터 2021년 12월까지
총 97,934통의 부재중 통화가 수신되었다."
 
직장에서 큰 프로젝트를 맡아 정신없이 일하고 야근을 밥 먹듯이 할 때는 분명히 무리를 하고 있는데 아프지도 않습니다. 정신없이 쭉 달리게 될 뿐입니다. 그러다 그 일을 마무리하고 휴가를 떠나면! 그때 꼭 얄궂게 독감 같은 게 덮쳐오곤 하죠.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놓이면서 그때까지 미뤄뒀던, 하지만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실은 닥치는 게 당연한 심신의 피로가 한꺼번에 올라오는 겁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마음도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참 힘들고 괴로운 일을 한가운데에서 겪고 있거나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때는 오히려 '내가 상처받고 있구나, 아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겨를조차도 없습니다. 사람이 정말로 휘청이는 순간은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났다, 해냈다' 안도한 직후인 경우를 많이 봅니다. 벗어났기 때문에, 미뤄온 것들이 비로소 밀려오는 것입니다. 독한 농약을 대량으로 뿌려대다 땅을 살리기 위해 중단하면 처음에는 생각의 잡초들이 무성하게 올라온다고 할까요. 아프지만, 결국 진정한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의 첫 단계에 진입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참아서 괜찮아지는 건 없구나… '억눌렸던 것들은 꼭 돌아온다, 한 번은 튀어오르게 돼 있다'는 그 말이 정말 맞구나, 나한테 일어난 일들을 소화해서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한 거구나. 저도 깊이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 회복의 첫 단계를 걷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저와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솔직한 대화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게 원망스러웠고, 그런 일을 당했을 때는 정말 슬펐어. 그를 미워하는 게 죄책감이 들었는데, 괜찮은 것 같아. 그가 미운 것과 그를 사랑하는 것, 두 가지가 동시에 내게 있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아.' 혼자서 많이 생각하고, 생각나는 대로 말로 꺼내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마음의 정리가 조금씩 이루어지는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저를 과거에 힘들게 했던 당사자와 직접 대화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열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다른 사람에게 터놓은 것만으로도 내가 '해방되고 있구나' 저절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이 책을 만났을 때, 여기 실린 그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 남긴 말들, 그들이 이 깊고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놓은 심정들을 나도 감히 조금은 알고 있다고 더욱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북적북적 가족 여러분들도 이 책을 펼치셨을 때 저와 같은 마음을 느끼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서로서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또는 당신처럼 나도 그러하다고, 저 속 깊은 곳으로부터 끄집어낸 진심의 이야기들을 마주하게 되는 이 책 속에서 문득문득 가슴 저리게 생각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는 책은 세상에 나온 지 이제 한 달 조금 넘었습니다. 지난 3월 말에 출간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입니다. 광고인으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고, 이제 웹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설은아 작가가 만들었습니다. 어떤 책인지, 이 책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일부 인용하는 것으로 소개를 대신하겠습니다.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는 2018년 12월, 6평의 작은 공간에서 첫 여정을 시작한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전시이다. 전시장에는 여러 대의 아날로그 전화기가 누군가를 기다리듯 벨을 울리고 있다. 전화기에 다가가 수화기를 들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보통 관객들은 이 지점에서 조금 멈칫하는데 수화기 속 목소리가 너무 날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귀 기울여 듣기 시작한다.

전시장 한쪽에는 커다란 공중전화 부스가 있다. (.....중략….) 공중전화의 수화기를 들면 파도 소리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자신의 하지 못한 말을 남기기 시작한다. 부스 안에 놓인 노란 전화번호부엔, '아빠에게 하지 못한 말을 남겨보세요', '꿈에서도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해보세요', '돈 갚으라고 단단히 말해보세요' 등 여러 도움 문구가 쓰여 있다. 남겨진 이야기는 모두 데이터화된다. 먼저 작가가 내용을 들은 후 간단한 사운드 작업을 거쳐 서버에 올리면, 전시장의 아날로그 전화기를 통해 랜덤하게 흘러나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전달된다. 그렇게 이 세상 누군가는 들어주었으면 하고 남겨진 우리의 '하지 못한 말'이 서로에게 닿는다. (….중략…..) 총 97,934통의 부재중 통화가 모였고 (2018.12~2021.12), 전시장의 수화기를 통해 약 54만 번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다.

언제든 전화번호 1522-2290을 통해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에 접속할 수 있는데, 지금도 매일 누군가의 부재중 통화가 남겨지고 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도착하는 한, 계속해서 이 번호를 열어둘 예정이다."
 
이 책에는 이 전시를 기획한 설은아 작가가 그 10만 통 가까운 부재중 통화 가운데 추린 메시지들과 작가의 에세이가 담겨 있습니다. 전시를 시작하고 진행한 순간들, 그리고 이 모든 마음의 말들을 이른바 '세상의 끝'이라고 하는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 가져가 바람 속에 놓아주는 퍼포먼스를 진행한 날들에 작가가 가졌던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에세이들입니다.

이주의 책으로 [세상의 끝과 부재중 통화]를 선택하고 나서, 여기 실린 통화 메시지들 중에서는 딱 10개만 추려서 읽기로 출판사와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꼭 낭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메시지들에 동그라미를 쳐가면서 세기 시작했는데…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10개를 추리기 정말 힘들었습니다. 어떤 메시지들은 읽자마자 눈물이 쏟아져서 오히려 읽겠다고 고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가장 깊이 박힌 또다른 말들은 딱 한 줄짜리, 두 줄짜리 메시지라 제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짧은 메시지만 읽고 나면 약속한 10개가 너무 빨리 차버릴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억지로 골라내고 골라내 봐도 10개만 추리기 정말 어려웠습니다. 오늘도 무심하게 서로서로 스쳐 지난 사람들, 인파들 저마다의 안에 이토록 깊은 감정과 역사가 들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모든 사람은 한 권의 책이다. 펼치는 페이지마다 모두 붉다.'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옛 친구가 자신이 좋아하는 책에 실려있던 구절이라고 언젠가 말해줬던 글귀입니다. 출처가 궁금해 찾아보려고도 했지만 여전히 찾아내지 못했는데, 참으로 공감하게 되는 이 인상적인 글귀를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다시 떠올렸습니다.
 
"잘 있니? 엄마야. 너 간 지 벌써 4년 하고 7개월 정도 되네. 김 서방이 연애를 시작했나 봐. 엄마는 섭섭하지만 너도 김 서방 연애 시작한 거 괜찮지? 어떻게 새 여자를 안 만나겠냐. 규영이(가명)는 잘 있어. 잘 크고 있어. 이제 1학년이야. 엄마 일 많이 잊어버렸겠지? 우리 집에는 가끔씩 오고 있어. 딸아. 엄마 갈 때까지, 엄마 너 찾아갈 때까지 잘 있어. (21,903번째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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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평생 살면서 힘든 일이 많았지만 남은 날이 더 힘들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이제 그만 착하고 싶고 그만 잘되고 싶고 엔딩이 좋아야 한다는 강박감을 놓아버리고 싶습니다. 나에게만 강요된 상황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나빴으니까. 내가 착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놓아버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너무 착해야 되고, 너무 행복해야 되고, 그러다 자기 인생이 떠나가는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빴으니까. 그거 이제 받아줄 수 없습니다. (48,425번째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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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10년 전 제가 가져갔던 돈은 만 원이 아니라 37만 원이에요. 지금처럼 용돈으로 갚아갈게요. 형도 같이 했어요. (71,533번째 통화)"


"아무도 해주지 않은 말이었지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기에 여기에 남깁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누군가가 당신 옆에 있다는 걸 알아주세요. (28,638번째 통화)"
 

설은아 작가가 마련해 놓은 전화기에는 참 많은 이야기들이 담겼습니다. 사랑받지 못해서 슬픈 누군가의 애끓는 마음이 남아있는가 하면, '사실은 널 사랑하지 않았는데 별로 미안하지도 않아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진짜 솔직한 고백도 남아있습니다. 진심이라는 면에서는 아마 어느 한 쪽이 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 부재중 통화 10만 건 가운데 많은 수는 그저, 침묵이었다고 합니다. "역시 말하지 못하겠어요."라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은 메시지도 있습니다. 말이 되고 책이 되어 세상으로 나온 이 모든 메시지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깊은 마음들이, 그런 침묵들 속에 또 하나하나 가득 담겨 있을 것입니다.
 
"'나는 사라져도 좋아.'
이 세상과 하나가 된 느낌. 나는 사라져도 괜찮다는 충분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건 맨날 콩나물국을 먹다가 처음으로 깊게 우려낸 사골 국물을 뜨겁게 들이켜본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작업실에 도착해 자정쯤 되었을까. 조심스레 서버에 접속해 첫 녹음 파일을 클릭했다. 파도 소리가 시작되고 드디어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미사여구 하나 없는 이야기들. 숨소리, 머뭇거림, 떨림. 가슴에 묻혀 있던 것들이 처음으로 목 끝의 작은 구멍을 통과해 터져나왔다. 묻어 놓은 깊이만큼일까? 세상으로 터져나오는 순간, 여리지만 강렬한 파동이 지진파처럼 진동했다.
'말도 안 돼. 다들 전시장에서 재미있게 놀다 간 거 같은데, 내가 오늘 그 현장에 있어서 다 아는데. 정말 이런 이야기들을 남기고 간 거야? 아까 그 평범한 사람들 속에 이런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어?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을 수가 있어. 어떻게…'

가면 없이 드러낸 마음 하나가 무심히 다가온다. 누군가의 100퍼센트 진심 앞에서 나의 방패가 스르르 무너진다. 하나의 마음이 또 하나의 마음과 맞닿아 진동한다. 어느새 눈물 콧물이 되어 책상 위에 휴지가 쌓여간다. 이 세상의 누군가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연 사람들, 그 감당할 수 없는 진심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처음 만난 목소리들. 그 속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즐거운 웃음과 무표정 속에 이런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니. 난 그동안 겉모습만 보고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판단해왔던가. 내가 안다고 했던 건 다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첫날의 부재중 통화 384통.
그 이야기들을 다 들어갈 때 즈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마음의 눈으로 보면 미워할 사람이 없구나.'
오늘의 부재중 통화들은 내일부터 전화기에서 흘러나와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렇게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전시장 뒷면의 모습: 전시 첫째 날] 中)
 
혹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꺼내어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던 말이 있다면. 묻어도 묻어도 잘 묻히지 않는, 해야만 할 것 같은 말이 있다면. 또는 그저 한 번 소리 내서 해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책을 펼쳐 다른 이들이 꺼내놓은 말들을 들어주고, 그리고 내 이야기 역시 용기내어 꺼내보면 어떨까요. 들어줄 것 같은 누군가에게든, 1522-2290에게든, 또는 [북적북적]에게든. 털어놓아 주신다면요.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수오서재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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