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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다큐멘터리는 힘이 세다 '미싱타는 여자들'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세상이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바뀌면서 사라지고 잊히는 것들도 점점 늘고 있습니다. 서울과 비서울의 경계선 언저리에서 유년기를 보낸 저는, 지금은 뉴타운으로 바뀐 그곳을 지나갈라치면 신체의 일부를 잃어버린 듯한(‘밀어버리는 건축’에 대한 건축가 최욱의 표현)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마음이 아프다’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되는 감각입니다. 이런 상실은 이제 서울 변두리뿐 아니라 불과 4,50년 전 당시 신도시였던 강남 한복판에서도 벌어집니다. 얼마 후면 재건축될 반포주공아파트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들을 저는 적잖이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친 뒤 사라지는 것들은 어떤 형태의 기록이라도 남아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사진을 남겨서 추억을 더듬어 보듯이 말입니다. 개인의 작은 기록이라도 남기면 추억을 넘어 기록이 되고, 그것들이 모이면 미시사(微視史, Microhistory)의 바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시대적 한계 때문에 또는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공식적인 기록이 남겨지지 못한 채로 사회적으로 중요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역사의 상당 부분은 유실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나 역사학자, 사회학자들은 구술사(口述史, Oral history)를 중요한 학문적 연구방법론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구술사는 스스로 문서 기록을 남길 능력이나 기회가 없었던 민중의 기억과 체험을 채록해서 역사적 사실의 장으로 끌어들입니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의 한 장면" data-captionyn="Y" id="i201632765"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20129/201632765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v_height="562" v_width="1000"> 
  다큐멘터리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은 학자도 아닌 영화감독이 해낸 근래 보기 드문 구술사적 성취입니다. 주요 스토리텔러(주연)는 70년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소녀공으로 일했던 이숙희(70), 신순애(68), 임미경(59) 씨입니다. 김정영, 이혁래 감독은 이 세 사람을 비롯한 14명의 소녀공과 4TB 하드디스크 3개 분량, 260여 시간에 이르는 인터뷰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임미경: “엄마, 요새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어요. 잠깐 그냥 보고 ‘아, 그랬구나~’하고 넘어가요. 그러니까 후회없이 하세요” 딱 그러더라구. 우리 딸 말에 그냥 용기 내가지고 (출연)한 거예요.

 임미경 씨는 사람들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사실임)는 딸의 말에 힘을 얻어 영화 출연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영화는 공개적인 상영을 전제로 한 미디어이기 때문에 아이러니하죠.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를 마친 뒤 곧바로 평화시장에서 일하게 됐던 임미경 씨는 1977년 청계피복노조가 운영하던 노동교실이 폐쇄되자 이에 맞서 저항하다 15살에 감옥까지 가게 됐습니다. 이런 ‘화려한 과거’를 자식들이 대학 갈 때까지 숨기던 임 씨는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에서는 10대 소녀공의 마음으로 돌아가 웃음과 눈물로 풀어냅니다. 제가 보기에 임미경 씨는 이 영화에서 용기의 상징입니다.

 신순애 씨는 고전이 된 조영래 변호사의 책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열세 살 소녀공 시다의 실제 모델입니다. 바로 이 대목입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평화시장의 저 참혹한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 열세 살의 한 여공이 있다고 하자. 그 아이의 이름은 시다, 평화시장의 시다이다. 집안이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한창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중학교 1학년 쯤에 다니고 있을 나이이리라. (『전태일 평전』  2부 '평화시장의 괴로움 속으로' 중) 

신 씨는 무료로 운영되는 노동교실에서 공장 들어와서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써보았다고 합니다. 그전에는 늘 ‘7번 시다’ 아니면 ‘1번 오야 미싱사’로만 불렸다는 겁니다. 학비가 없어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했던 신 씨는 검정고시를 거쳐 53세였던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에 입학하고 대학원에도 진학해 평화시장 여공의 생애사 연구로 2012년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이 얼마나 사람의 앞길을 좌우하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얼마나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신선애 씨는 이 영화에서 지성의 상징입니다.

   노조에서 교육선전부장을 했던 이숙희 씨는 노동교실 점거 농성을 진압하러 온 경찰에 맞서 동료들이 자해를 하고 투신을 하려던 아비규환의 현장을 냉철한 이성과 감성으로 정리해낸 여성 리더였습니다. 중용과 리더십의 상징이지요.

이숙희: 경찰들이 막 들어오려고 그러니까 애들이 불을 붙였어요. “불태우고 같이 죽자”면서. 저는 애들한테 막 야단쳤어요.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이거 재단 재산이고, 우리가 다 잡혀가고 죽더라도 이거는 남아서 기록으로 다 보여야 되는 것들이다”라고요.
<미싱타는 여자들><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포스터" data-captionyn="Y" id="i201632769"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20129/201632769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v_height="354" v_width="740">  영화는 이처럼 거의 인터뷰 구성으로 전개됩니다. 러닝타임 1시간 48분. 지루할 법도 한데 이제는 60대의 육신을 가진 소녀들의(내면아이의)  입에서 나오는(구술) 진심 어린 목소리는 남자인 저도 감정이입을 하게 만듭니다. 여자라서, 가난해서, 평화시장으로 일하러 나온 어리고 순수했던 소녀공들의 삶은 인간인 이상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기에, 그치기는커녕 그런 과거를 딛고 일어선 소녀공들이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고 당당하게 그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요즘 한국영화 관객들이 그렇게 싫어한다는 ‘신파’로 빠지지 않습니다.  
 

 구술(사)가 갖는 힘


  다수의 구술사적 연구를  진행해오고 있는 성공회대 시민평화대학원 김영선 교수(젠더사회학 박사)에 따르면 구술사에서는 사건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전개됐는지와 함께, 구술하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주관성’, ‘시간의 지평 안에서’가 구술사의 키워드입니다. 심지어 같은 사건을 같은 사람이 진술하더라도 그 기억과 의미는 50대와 60대, 70대에 다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술을 듣고 정리하는 사람의 해석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김 교수는 또 영상구술사에서는 감독과 촬영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구술하는 과정에서 구술자 본인은 물론 상대(감독)의 삶도 변화한다는 겁니다. <미싱타는 여자들>을 보고 나면 독자 여러분도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삶이 달라질지도 모릅니다.

 저의 뉴스 리포트( 거장들 울린 묻혔던 아픈 기억…영화 '미싱 타는 여자들')가 나가고 난 뒤 진심이 느껴지는 문자메시지 몇 건을 받았습니다. 제작진이 하고 싶었던 얘기를 잘 전달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주셔서 기사를 쓸 수 있었다고 답했습니다. 저 역시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이었습니다. <미싱타는 여자들>이라는 한 편의 소중한 기록이 나왔다는 사실을 다시 방송뉴스라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서 한 사람의 기자로서 감사했습니다. 타인이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용기 있게 털어놓음으로써 스스로 치유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으로서 치유가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인간적인 10대를 거쳐온 그들도 밝은 모습을 잃지 않고 오늘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그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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