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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종, 김하종 신부

[그사람] 가난한 사람들의 종, 김하종 신부

1. 30년째 이어지는 한 끼의 나눔


길게 줄을 서서 한 끼의 식사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6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다. 거의 말이 없었다. 웅성거림 같은 것조차 없었다. 배식이 시작되는 오후 두 시 이전부터 묵묵히 줄을 서서 도시락이 오기를 기다렸고 무표정하게 도시락을 받아 갔다. 지난 7일 찾은 성남 안나의집 노숙자 급식 장소인 성남성당 앞마당은 아무리 봐도 축제의 현장은 아니었다. 선의는 넘쳐나지만 밝은 기운이 지배하는 곳은 아니었다. 흥분, 활기, 신명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기묘하다 싶은 침묵이 지배하는 성당 마당에서 '안녕하십니까' '환영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라고 외치는 이 사람 목소리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다.

모이지 않고 흩어지는 것이 미덕인 시대다. 미덕을 넘어 도덕적 의무, 때로는 법률적 강제가 되기도 한다. 모이면 위험하고 흩어지면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 상식이다. 음식점과 카페를 비롯한 대중 이용 시설의 운영이 제한되고 학교, 체육관 심지어 종교 시설마저 문을 닫았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운영되던 무료급식소들도 속속 운영을 중단했다. 안타깝지만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는 사람이 다수였는데 이 사람 생각은 달랐다. 성남 안나의집은 이런 상식과 미덕에 도전하고 반발한다.

급식소 운영을 중단해달라는 공무원들의 종용과 압박, '당신이 지금 감염병을 옮기고 확산시키고 있다'는 인근 주민들의 항의 앞에서 번민은 깊었다. 뜻을 같이 하던 사람들조차 멀어져 가는 게 느껴졌고 밤이면 악몽에 시달렸다. 식은땀으로 잠자리가 축축해질 때마다 "제가 오만한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너무 주제넘지는 않나요?" 절대자에게 묻고 또 물었지만 이 사람 머릿속에 단 한 순간도 급식 중단이란 단어는 없었다. 급식을 받는 노숙자, 독거노인들은 남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 면역력이 강화되고 그것이 우리 공동체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밥을 온라인으로 나눠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하는 대신 도시락으로 바꿨고 마스크 착용과 체온 측정 같은 방역 조치를 강화했다.

-코로나 때문에 어려움이 많으시지요. 자료를 보니 지난해는 후원금도 줄었더군요.
"그래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후원금은 조금 줄었지만 쌀을 포함한 현물 지원이 늘어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학교 급식소를 포함해서 문을 닫은 급식소들이 구입했던 물품을 저희에게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무료 급식 봉사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봉사자나 급식을 받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도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면 급식소 운영을 계속하기는 힘들었을 텐데 지난 2년 동안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기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단체 봉사 활동은 줄어서 개인봉사자들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개인 봉사는 누가, 몇 명이 올지 예상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봉사자가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오후 두 시 반이 되면 7백 50명에게 식사를 주는 것은 인간적인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일입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 계획하지 않은 일, 아름다운 일이 너무 많이 생겼습니다."

성남 모란 시장 옆에 있는 성당 마당에서 매일 벌어지는 풍경은 그것을 신이 만든 기적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물론 착한 마음을 가진 인간들의 합작품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도 감동적인 모습이다. 이 사람의 판단이 과연 최선이었는지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고 불안을 호소하는 인근 주민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없어진 것도 아니지만 밥을 통해 사람 사이의 인정이 오가고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이 메마르는 일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다. 동시에 먹는 일의 엄중함을 일깨우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현장을 30년째 지키고 있는 사람, 김하종 신부를 만났다.
 

2. 저를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 곁으로 보내주십시오

사제 서품 후 첫 미사를 드리는 모습

1957년, 이탈리아 피안사노 지방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지런한 농부였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분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갖게 되면 사제로 만들겠다는 기도를 했고 이 사람은 마치 준비된 길을 가듯 신부가 되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같이 살겠다는 생각으로 헌신과 봉사를 지향으로 삼는 오블라티 수도원에 들어갔다. 학교 다닐 때부터 꾸준히 봉사활동을 했고 신부가 되기 전 1년 동안 세네갈에서 빈민들과 생활했다. 1987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90년 오블라티 수도원에서 한국에 파견한 최초의 선교사 자격으로 서울에 왔다. 타고르의 시를 통해 한국을 알았고 동양 철학에 대한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그때까지 한국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 무렵 이 사람에게 한국은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사람들이 있는 아시아의 먼 나라였을 뿐이다.

한국에 적응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프랑스어, 영어, 그리스어를 배웠지만 한국어는 이 사람에게 외계인의 언어였다. 더구나 난독증 때문에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도 읽고 쓰는 일이 어렵던 사람이다. 힘들면 언제나 돌아와도 된다고 말씀하셨던 부모님 생각이 났고 봉사와 섬김의 삶은 한국이 아니라도 이탈리아나 유럽,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었다. 한국어는 좀처럼 늘지 않고 자신을 이방인으로 보는 싸늘한 시선을 느낄 때마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한국으로 올 때 이 땅에 뼈를 묻겠다고 신 앞에서 다짐했던 것이 아니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에 적응하기 위해 독하게 노력했다. 한국에서는 젊은 사람이 수염을 기르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두말없이 수염을 밀어버렸다. 하관이 빠른 이 사람에게 턱수염은 잘 어울렸지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서울에 온 지 며칠 만에 병원을 찾아 장기기증을 약속했다.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눈다는 생각으로 20여 차례 이상 헌혈을 했다. 사후 시신 기증도 서약했다. 죽어서도 한국에 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고국 이탈리아 음식을 자주 먹으면 고향 생각이 더 날까 봐 이탈리아 음식을 피하기까지 했다.

어린 시절의 김하종 신부와 그의 어머니·아버지

2015년 특별 공로자 자격으로 한국인으로 귀화했다. 빈첸조 보르도(Vincenzo Bordo)라는 이탈리아 이름 대신 성남 김 씨 본관을 창설해서 하느님의 종이라는 뜻으로 하종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멋진 이름을 가진 한국인이지만 모든 한국인이 완전한 한국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긴 했지만 서양인 특유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은 여전하고 특히 어미 처리가 어려워 보였다. 약간의 인터뷰 사례비를 지급하기 위해 본인의 서명과 주소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몇 자의 글을 쓰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한글은 썼다기보다 그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1992년부터 성남 신흥동 성당의 보좌신부로 일하면서 성남과 인연을 맺었다. 서툰 우리말로 강론을 준비하는 일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준비하는 이 사람도 힘들었겠지만 이 사람 강론을 듣는 신자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말로 진심을 다 전할 수 없으니 행동으로 진심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 나섰다. 1993년 <평화의 집> 운영을 맡아 독거노인 급식 사업을 시작했다.

의욕적으로 일을 시작했지만 악전고투였다. 주변 사람들이 손 놓고 멀뚱멀뚱 쳐다만 본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매일 밥을 해서 사람들에게 먹이는 것은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밥을 지을 쌀이 있어야 했고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한두 사람의 한두 번의 선행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돈을 마련하고 자원 봉사할 사람을 모으고 밥을 짓는 일이 온전히 이 사람 몫이었다. 그런 일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에 별다른 인연이 없는 이 사람을 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을 리 없었다.

"안나의집 시작하고 초기에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돈 없고, 아는 사람 없고, 친구 없고…후원 부탁하는 팜플렛 들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성남 은행동 쪽 공장 지역 돌면서 '저는 누구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하면서 오전을 보내고 열두 시에 안나의집으로 와서 그 당시에 직원 한 명 있었습니다. 둘이서 요리하고 밥 지어서 봉사했어요. 굉장히 힘들었어요.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어느 날 수도회 기도실에서 십자가상 예수에게 손가락질하면서 반말로 퍼부어 댔다.

"'나 도와주지 않으면 내일 문 닫을 거야. 당신이 문제야, 당신이 문제라고' 그때부터 예수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분이 많이 바쁘셔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해요. 협박해야 해요. 아니면 말 잘 안 들어주세요."

1994년부터는 성남과 분당 지역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공부방을 열었다. 청소년들과의 만남은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지키는 아지트(아이들을 지키는 트럭) 운동으로 이어졌다. 오전에는 후원금 모으러 다니고 점심부터 저녁까지 밥 짓고 배식하고 밤에는 청소년 공부방을 챙기는 강행군이었다. 그 와중에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가방에 빵과 음료를 가득 채워 넣고 다니며 노숙자들에 나눠줬다. 이 사람이 책에 쓴 '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온몸이 부서진 느낌'이라고 했던 것은 이 시절을 두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1998년 IMF 사태로 노숙자가 급증하자 안나의집을 열고 급식 대상을 독거노인에서 노숙자로 확대했다. 2006년 안나의집이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하면서 안정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매일매일이 위기였고 고비였다.

3. '냄새' 나는 사람


그사람-김하종 신부 이미지

직원 52명, 5개 사회복지시설을 둔 사회복지법인 <안나의 집>대표지만 이 사람은 행정가도 아니고 관리자는 더더욱 아니다. 오전부터 주방에서 쌀을 씻고 무채를 썰고 콩나물을 다듬는다. 입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손과 발로 일하는 사람이다. 백 마디 말보다 칼질하는 모습 한 장면이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제가 신부님 출연한 TV프로그램 보니까 칼질을 정말 잘하시더군요.
"앞치마 입고 이런 봉사한 지 30년 됐습니다. 저는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주방에 들어오면 대표도 아니고 사제도 아니고 그저 봉사자입니다. 지금 코로나 때문에 달라졌지만 원래 안나의 집은 저녁 급식소였습니다.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요리하고 밥 짓는 게 제 주업입니다."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지만 신앙을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성당이 아니라 주방이 이 사람이 신앙을 선포하는 현장이다. 그래서 이 사람 몸에서는 냄새가 사라질 날이 없다. 한국에서 삶은 냄새에 적응해가는 과정인 동시에 냄새와의 싸움이었다. 1992년 역한 냄새를 풍기는 한 독거노인을 안아주면서 신의 음성을 듣기도 했지만 그런 경험을 한 뒤에도 한 노숙자의 상처가 썩어 가면서 나는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토한 적도 있다. 지독한 냄새로 표현되는 가난에 얼마나 익숙해졌는지 궁금했다.

-신부님의 한국에서 삶은 냄새와의 싸움이었을 거 같습니다.
"저는 집에 가면 옷 엄청 냄새나요. 머리부터…오후 한 시부터 7시까지 주방 안에 있어서 요리 냄새 엄청나요. 빨래해야 하고 샤워해야 하고. 이 생활이 제 생활이고 노숙인과 함께하는 것이 제 생활이에요. 냄새나는 것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 냄새에 익숙해지셨습니까.
"익숙한 것보다 이분들은 노숙인 아니고 내 가족이다, 가족으로 보기 때문에 냄새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불편하지 않아요. 겨울에 샤워하지 못하고 잠바 두세 개 겹쳐 입고 땀이 나면 냄새 많이 나요. 괜찮아요. 한순간 느낄 수 있지만 그렇구나 생각해요. 누구든지 부모님 편찮으시고 조금 냄새나면 당연하게 아들로서 돌보고 씻기고 도와줘야 하고…마찬가집니다. 가족입니다."

밥을 나누는 것 말고도 이 사람이 하는 일은 많다. 그중에 하나가 사망한 무연고 노숙자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이다. 무연고 노숙자가 사망하면 자신에게 연락해달라고 성남시 관내 유관 기관에 부탁해 뒀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을 이 사람이 돌본다. 평상시에는 낡은 청바지에 주로 티셔츠를 입지만 무연고 노숙자의 장례식에 갈 때는 가장 좋은 신부 복장을 하고 간다. 가장 초라하게 죽은 사람이지만 가장 엄숙하고 존귀하게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말을 하면서 이 사람 눈자위가 갑자기 벌게졌다. 남의 고통을 직관적으로 느낀다는 이 사람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4. 어떤 힘이 이 사람을 버티게 했을까


그사람-김하종 신부 이미지

약간 톤이 높은 목소리는 쨍쨍했고 발걸음은 늘 남들보다 반보 앞서 걷는 사람처럼 빨랐다. 배식 현장에서 등산화를 신고 분초를 다투며 사는 사람처럼 날쌔게 움직였다. 올해 66살, 여전히 활기차고 건강하게 보였지만 이제는 건강과도 싸울 나이다. 2016년 미사 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고 등산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무릎이 안 좋아 산과는 거리를 두고 산다. 위장에도 문제가 있어 소식을 하고 그 좋아하던 커피도 입에 대지 않는다. 3-4년 사이 부쩍 나이 들었다고 했다. 치렁치렁한 머리가 이 사람 트레이드 마크지만 유심히 보니 머리숱이 헤성헤성했고 회색빛을 숨기지 못했다. 2018년 완공된 안나의 집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마음 고생, 몸 고생을 했고 그 직후에 코로나가 닥쳤으니 나이 들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이방인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제는 자신의 외양을 두고 뭐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지만 1990년 초반 이 사람은 어디를 가도 눈길을 끄는 우리말 서투른 서양 사람이었다. 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차별과 소외를 느끼는 일이 더 잦았다.

"저는 한국 사람이지만 그냥 한국 사람 아니고 이태리 떠난 지 30년 돼서 지금 이태리 가도 이태리 사람 아닙니다. 다른 나라예요. 이태리 사람 아니고 한국 사람 되고 싶지만 한국 사람도 아니에요. 노력하지만 사고방식이나 말이 한국 사람처럼 살지 못해요. 그게 사실이에요. 인정해야 돼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에 있어요."

이 사람에 대한 적잖은 기록을 살펴봤지만 친구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최고의 표현을 아끼지 않으며 찬사를 보내고 존경을 표시하지만 '나의 친구 하종'이라고 이 사람을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부님 쓰신 책에는 후원자나 봉사자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더군요.
"친구들이 많지 않다기보다… 저를 사랑하고 도와주시는 분들은 굉장히 많습니다. 제 생활이 아침부터 밤까지 바빠서 친구들을 사귈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쓰는 시간은 거의 없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 일요일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시간 말고는 모든 시간이 다른 사람을 위한 시간이다. 이 사람에게 난독증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반갑지 않은 친구다. 암기는 물론 집중력과 이해력이 떨어져서 고등학교 때까지 심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친구들이 한 시간이면 해낼 과제를 이 사람은 두 시간 세 시간이 걸렸다.

"학생 때 '나는 바보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열등감 굉장히 심했습니다. 사실은 아직까지 자존감, 자신감이 낮아요."

-지금도 난독증이라는 장애가 있으신 거죠.

우선 난독증은 장애가 아니라며 질문을 바로잡은 뒤에 말을 이어갔다.

"난독증은 태어날 때부터 뇌 자체가 다른 식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다른 프로그램이 있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 가르치 듯하면 안 통해요. 어려워요. 읽기, 쓰기, 외우기가 아직까지 힘들어요."

난독증으로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가깝게 느낀다고 했다. 난독증 덕분에 소수자의 정서를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분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빠르고 정확하게 잘 읽는 능력이 있는 분이에요.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불편함이 있다 싶으면 그것을 빨리 알아차리고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세요." 류희구/ 오블라티 수도회 신부

기쁠 때도 많았지만 외로울 때는 더 많았고, 자주 포기하고 싶었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폭력으로 돌아오는 일도 적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선행을 당연한 자신들의 권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아름다운 일을 한다고 해서 아름다운 일만 벌어지는 것 역시 아니다. 어떤 힘이 당신을 지금까지 버티고 여기까지 오게 했는지 물었다.

1993년 평화의 집 시절부터 이 사람과 함께 하고 있는 오현숙 안나의집 사무국장을 비롯해 10년 이상 같이하고 있는 직원들과 동료, 후원자들이 우선 큰 힘이다. 호암상을 비롯해 올해 만해대상, 2019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비롯한 적지 않은 상과 훈장을 받을 때마다 그 공을 직원과 후원자들에게 돌렸다.

"저는 부족한 거 많아요. 저보다 훌륭하신 분, 잘하신 분 많아서 상을 받을 때 부담 느끼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상을 받을 이유는 단 한 가집니다. 우리 직원들이 잘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표라서 앞에 나서긴 하지만 상은 우리 직원들, 후원자들에게 줘야 합니다."

경기도 성남시 모란시장 옆에서 매일 벌어지는 아름다운 일이 이 사람을 주어로 해서 묘사되지만 이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한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13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안나의 집에서 귀한 땀을 흘렸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단체에 후원금을 보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250만 명이 여기에서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였다. 여기에서 온기가 담긴 한 끼의 식사를 대접받고 새로 살아갈 힘을 얻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받은 것의 열 배 백 배로 다른 사람에게 돌려준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 험하고 힘든 시절을 버틴 것이다.

1993년 여동생은 한국에 와서 한국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 생활 초기 부모와 남동생과 여동생은 이 사람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예수가 없으면 형의 인생은 미친 것"이라고 말하는 남동생은 성당에도 잘 나가지 않지만 변함없는 후원자이자 이 사람이 언제든지 속내를 털어놓는 친구 같은 존재다. 가족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가족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이탈리아 사람답다. 매일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 남동생, 여동생과도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다. 사제라면 세속의 인연을 멀리 하지 않을까 싶은데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는다. 그 뿌리를 통해 힘을 얻고 그 뿌리에 때로는 기대기도 한다. 인터뷰 중에 이탈리아에 있는 노모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 전날 통화할 때 어머니가 열이 높아서 혹시 코로나에 감염된 것은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음성으로 판정이 나왔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단순하게 핵심에만 집중하며 살려고 한다. 이 역시 자신을 지키려는 본능적인 노력으로 보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솔직하게 말한다. 피곤하면 '나 피곤해'라고 말하고 불쾌하면 불쾌하다고 말한다. 속마음과 다른 얼굴을 보여줄 필요를 느끼지 않고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김하종 신부다'라는 게 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전부다. 봉사활동 하는 사람에게 '맘에 안 들면 하지 마세요. 마음에 들면 하세요'라는 태도다.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코로나가 두려워 약속한 봉사활동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나도 두렵기는 마찬가집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의지가 강한 분입니다. 사제로서의 자세가 몸에 배어있는 분입니다. 뭐든지 사제의 시각으로 보려 하고 사제의 마음을 어떻게 온전히 간직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고 기도 중에도 항상 그 부분을 잃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하시는 분이죠." 류희구 오블라티 수도회 신부

무엇보다 이 사람을 붙잡아 준 것은 이 사람이 믿는 절대자의 존재다. 때로는 이 사람 역시 의심스럽기도 하고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코로나 같은 것이 생겨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지, 왜 선한 주님이 지금의 어려움을 단숨에 해결하지 않는 것인지 묻기도 한다. 이 부분은 말로 온전히 설명하기 어려웠는지 자신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보여주었다.

-왜 주님은 천국에서 내려오지 않으시며, 왜 코로나의 혼란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지 않으십니까.
"나 역시 많이 울었다. 나는 고통과 문제들을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마법처럼 없애 주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마법을 쓰는 것은 내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난 너와 함께 걷고 있고 언제나 너의 곁을 지키고 있단다."< 김하종 신부 페이스북 중>

5. 책임은 내려놓고 순수한 봉사자로 남고 싶습니다


1985년 세네갈 봉사활동 시절

따뜻한 온기를 맨 밑바닥에서 전달하는 '의로운 이웃'이지만 볼 때마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푸른 눈의 이방인'이기도 하다. 빈첸조 보르도라는 이탈리아 출신 선교사의 존재는 불편하고 거북한 존재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약하고 아프고 부끄러운 부분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 사람들도 보기를 꺼려하고 외면하려 드는 어두운 구석을 이 사람이 30년째 지키고 있다. 이 사람의 방법이 근본 치료는 아니지만 가장 급한 응급 처방을 이 사람에게 맡겨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도시락을 받아 가는 사람들 가운데 약 70%는 하루에 한 끼로 연명하는 사람들이라는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선진국 입성을 자축하기는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이탈리아에 가도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안달을 하는 사람이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과 이탈리아가 맞붙었을 때 한국을 응원했을 만큼 한국을 사랑한다. 그러나 국경과 민족, 인종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한국이 아니라 다른 외국에 갔더라도, 고국 이탈리아에서 활동했더라도 지금 같은 삶을 살았을 사람이다. 세네갈에서 1년간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봉사 활동을 했고 한국에 온 필리핀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타갈로그어를 익혀 필리핀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지난 30년 동안 한국 사회의 변화 가운데 가장 긍정적인 것을 묻자 제일 먼저 한국 사회 특유의 '우리끼리' 문화가 약해진 것을 들었다. 한국인들 마음이 세계로 열렸다는 것이다. 온 인류가 한가족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반가운 변화인 것이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마음 고생이 심했다는 말로도 들렸다.

-포기하고 싶은 때는 없었습니까.
"그런 생각 많이 있었습니다. 피곤하고 화도 나고 불만이 생기고…그럴 때는 기도하고 샤워하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하는 거죠. 그래도 책임감으로 합니다. 사랑으로 하는 거고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언제까지 하시고 싶으세요.
"저는 안나의집 대표는 그만두고 싶지만 봉사자로서는 계속 일하고 싶어요. 책임 없이 순수한 봉사하고 싶어요. 다른 분을 제 자리에 올리고 저는 내려가서 계속해서 봉사자로서 허락해줄 때까지 봉사하고 싶어요."

이런 삶을 통해 이 사람은 뭘 얻고 깨달았을까.

"먼 하늘나라에 거룩하게 계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에 함께 하는 하느님을 매일 만날 수 있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만나는 분들 통해서 그걸 배웠습니다."

-저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신부님처럼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신부로서 봉사하면서 잘 해야 하고 운동 선수는 운동 잘 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탤런트 있어서 그런 재능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살면 사회 재미없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갈 길이 다 있습니다. 자기 재능에 따라 살면 행복하고 사회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런 생활이 기쁘십니까.
"네. 행복합니다."

-진짜로 행복하세요?
"네. 제 생활 만족하고 마음 안에 평화 느끼고 행복해요."

-외롭지는 않으세요.
"당연히 가끔씩 외로움도 느껴요. 당연하게 외로움 느끼는 순간도 있고…행복한데…뭐랄까요.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고 왔다 갔다 하지만 그런 방향으로 제 생활 돌아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러울 때도 있습니까.
"오, 당연히… 실수 많이 하고… 한 달에 한 번 지도 신부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봅니다. 부족한 거, 잘못한 거 고백하고 예수님께 용서해달라고, 도와 달라고 고백합니다"

-신부님도 용서를 청할 일이 많습니까.
"당연하죠. 전 인간이에요. 부족한 거 많고 어떤 때는 일하면서 긴장해서 불친절하고, 나쁘게 이야기하고. 어떤 날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그럽니다. 인간이라서…"

6. 말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의 종


후원금도 줄고 자원 봉사자도 줄었지만 급식을 받는 사람은 지난해 3만 명이 늘었다. 다른 급식소가 문을 닫으니 안나의집으로 몰리는 것이다. 먹여야 될 사람은 늘었는데 후원금이 줄고 봉사할 사람이 줄었으니 부담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 사람은 물론이고 안나의 집 관계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죽는 소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750명을 먹이려면 하루에 쌀 160킬로그램이 필요한데 아무리 어려워도 쌀이 떨어지는 일은 없고 영 일손이 달리면 다른 직원들이 나서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이 사람과 마찬가지로 안나의 집 다른 직원들도 무모하고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들이었다. 어려운 사람들 밥 먹이는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는 일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책을 포함한 책 몇 권, 세네갈에서 선물 받은 성모상, 사제가 될 때 부모님에게 받은 시계와 목걸이, 그리고 옷 몇 벌이 이 사람이 가진 것의 전부다. 2015년 호암상 상금 3억 원을 안나의 집 신축 자금으로 쓴 것을 포함해 외부 상금은 모두 안나의집에 보낸다. 안나의집에서 교통비로 한 달에 60만 원을 받는다. 올해 88살이 된 이탈리아의 혼자 계신 노모에게 얼마라도 용돈을 보내드리고 싶지 않을까 싶었는데 도리어 아직도 어머니, 형제들에게 후원을 받고 있다.

그사람-김하종 신부 이미지

열 줄로 말할 수 있는 것, 열 줄의 말이 나와야 될 대목에서도 이 사람은 두어 줄의 대답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 종교, 영성 같은 깊이 있는 대화를 한국어로 나누는 것은 이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안 좋은 이야기는 입에 올리기를 원하지 않고 자랑은 숨기고 싶어 했다. 인터뷰 시간이 세 시간은 되겠거니 생각하고 갔는데 두 시간도 못 돼 질문거리가 떨어졌다. 질문이 부족했다기보다 답변이 짧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동이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행동의 무게를 말이 따라가지 못하고, 생각의 깊이를 글이 따라가지 못한다.

2020년 말 코로나와의 싸움을 일기 형식으로 정리한 <순간의 두려움 매일의 기적>이라는 책을 낸 데 이어 지난해 말 <사랑이 밥 먹여준다>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또 냈다. 이 사람이 이탈리어나 영어로 쓴 메모와 자료, 구술을 한국 동료들이 한글로 받아 적고 번역하고 다듬어서 책이 나왔다.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고 자신에게도 버거운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은 작게는 코로나 시대 자신이 왜 <안나의집> 급식 활동을 계속해야 했는지를 설명하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영어나 이탈리아어로 시를 쓴다. 한글로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것이다. 가끔 썰렁한 유머를 던져 좌중을 얼어붙게 하는 재주가 있다.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말할 때 사람이 전혀 달라 보인다. 활기차고 경쾌하고 무엇보다 자유로워 보인다. 난독증의 감옥, 그로 인한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고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 고민을 우리들과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 마냥 설렜던 것은 아니다. 살아온 이력과 자료를 보면 거의 살아있는 성자 같은 사람인데 막상 얼굴을 대하고 보면 실망스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렇게 살아온 사람을 단 몇 줄의 글로 평가하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기도 하다. 만나기 전 자료를 볼 때, 이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그리고 며칠 동안 끙끙거리며 이 글을 쓸 때도 이 사람에게 다른 얼굴이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했다. 그래도 보고 느낀 대로만 말하자면 이 사람이야말로 신실한 하느님의 종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종이라는 것이다.

**김하종 신부와의 인터뷰 풀영상은 밤8시25분 SBS뉴스 유튜브 채널서 최초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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