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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마다 '귀 접기'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북적북적]

책장마다 '귀 접기'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24 : 책장마다 '귀 접기'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긁어야 하는 가려움과 같다." (데이비드 민스, [춤추지 않을래](레이먼드 카버 作)에 대하여)

조금은 해이해졌던 것처럼 느껴지는 몸과 마음의 근육을 깨워 다듬어야만 할 것 같은 연초입니다. 아무래도 기합은 들어가고 여유는 부족해지기 쉬운 이 시기, 집어들 때는 부담 없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때는 뭔가 뿌듯한 기분으로 '새로운 것들을 읽었다'는 느낌을 남길 수 있는 책을 선택해 봅니다. 15개의 영미권 단편이 실린 소설집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입니다.

그냥 지나치기 힘든 이 멋진 제목은 여기 수록된 15개 이야기 중에서도 맨 앞에 실려있는 작품 [히치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의 한 문장을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국내 출간 제목으로 선택된 이 문장만큼이나 인상적이고 여운 깊은 문장들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는 책입니다.
 
"그의 엄마는 검시관이 말한 모습대로 죽었는데, 그 사실을 증명해줄 신문기사 스크랩을 잃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기사 조각을 잘 접어서 1년 반 내내 청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는데, 하나밖에 없는 그 바지에서 인쇄물은 보풀로 변했다가 주머니 자체가 되었고, 나중에는 청바지 자체가 어릴 때 엄마가 부스럼에 발라준 달걀껍데기처럼 얇아지고 회색으로 변해버렸다." (조이 윌리엄스 [어렴풋한 시간] 中)

이 책은 일단 구성이 재미있습니다. [파리 리뷰]라는 문학지가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1953년에 창간된 영문학 계간지입니다. 사실 근현대 영문학의 유산은 파리라는 도시와 여러모로 맥이 닿아 있습니다.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를 비롯해서, 현대 영문학의 가지 몇 개 정도가 아니라 아주 굵은 기둥이 파리에 한때 터전을 닦고 '노닥거렸던' 이른바 전후 익스팻들로부터 자라났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 맞은편에 있는 독립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근현대 영문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파리를 방문하면 꼭 한 번 들르곤 하는 영문학계의 명소입니다. 우리에겐 좀 낯설지만, [파리 리뷰]도 그렇게 은근히 뿌리깊은 '파리의 영문학'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잡지입니다. 이 책의 서두에 실린 역자 설명을 보면, 타임 지가 이 문학 계간지를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문학잡지'라고 일컬었다고 합니다. 이제 창간 70년을 헤아리는 이 잡지에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자기 작품을 싣거나 인터뷰를 해왔습니다.

이 책은 지난 11월말에 국내 출간됐습니다. 아직 따끈한 신간입니다. 하지만 사실 미국에서는 지난 2012년에 나온 책입니다. 당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영문학권의 작가 20명에게 지금까지 [파리 리뷰]에 실렸던 작품 중 무엇을 제일 좋아하는지 뽑아달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작품에 대한 해설 또는 비평까지 한 꼭지씩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묶어져 나온 20쌍의 '이야기+해설' 중에서 15쌍이 이번에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에 실린 것입니다.
 
"양탄자를 처음 본 건 다른 동네 뒤뜰에서였다. 위층 베란다에서 높다란 회색 장대까지 도르래 빨랫줄이 뻗어있는 2층 주택 모퉁이에 화사한 색깔이 나부꼈다. 그러더니 차고 뒤쪽에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양탄자가 얼핏 눈에 들어왔다. 허리 높이까지 자란 옥수수와 토마토가 있는 밭고랑 사이에서 밀짚모자를 쓴 이탈리아 노인들이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한 번은 두 채의 회칠한 집 사이에서 쓰레기통 높이로 가볍게 날아가는 양탄자를 본 적도 있다. 길쭉하게 뻗은 띠 모양 잔디밭 끝자락에서였다." (스티븐 밀하우저 [하늘을 나는 양탄자] 中)

무려 47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이지만, 단편집이기 때문에 언제든 내킬 때마다 하루에 한 편 정도씩 골라 읽을 수 있습니다. 더 내키면 각 이야기마다 바로 뒤에 붙어있는 해설을 곧바로 읽든가, 또는 내 생각을 먼저 정리한 다음에 다음날쯤 해설을 찾아보는 식으로 읽기 좋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연초에 뭔가 새로운 것을 읽었다', 독서의 지평을 살짝 더 넓혔다는 뿌듯함을 느껴가기 좋은 책입니다. 대다수 한국 독자들에게 조금은 낯선 느낌으로 다가올 작품들이 여럿 실려있습니다. 지난 70년 동안 다양한 문학적 실험과 시도가 이뤄졌던 영문학 잡지에서, 그것도 창작자들끼리 '나는 남의 작품 중 이것이 좋았다'고 뽑은 단편들입니다. 전통적인 이야기 서술방식을 따르지 않는 작품들이 보입니다. (심지어 요즘에도) 작가들이 많이 차용하지 않는 '모더니즘 글쓰기', 의식의 흐름대로 전개되는 글쓰기 방식의 영향을 꽤 받은 작품들도 있습니다.

맛과 재미의 스타일이 모두 다르되, 다만 공통점은 어떤 종류의 재미이든 각각 꼭꼭 들어찬 단편들이라는 점입니다. 보르헤스나 레이먼드 카버 같은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도 실려있지만,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의 작가들 작품도 단편 특유의 짧지만 굵고 오래가는 여운을 진하게 남깁니다. 강렬하고 선명한 이미지 한 두 장을 남기는 것만으로 충분히 차고 넘치는 이야기도 있고, 은근히 내밀하게 스며드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그야말로 술술 읽히는 보편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나 문제의식을 풀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도 합니다.

'미국적 현실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궁전 도둑) 이른바 부르주아 중산층의 삶을 소재로 하는 무수한 연속극들이 시즌 내내 달성하고자 노력하는 그 무언가를 단 몇 페이지의 문장으로 달성해 버리는 작품도 있습니다. (브리지 부인의 상류사회) 마치 사이렌처럼, 쓸쓸하고 비일상적인 기분의 늪으로 사람을 유인해 익사시켜 버리는 것 같은 느낌으로 삶의 이면들을 들춰보게 하는 단편들도 마력적입니다. (어렴풋한 시간, 라이클리 호수) 신랄하고 자조적인 유머와 풍자가 그 자체로 대단히 문학적인 작품(스톡홀름행 야간비행), 뭐라고 이름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해서 미처 존재가 의식되거나 이름을 붙여주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하지만 실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결코 작지 않은 성장기의 비밀들을 마법처럼 구체적인 언어로 소환해 내서 고정시켜 놓는 위업을 달성한 작품도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양탄자)
 
"게이브, 1978년 1월 13일 금요일인 내일이면 나도 예순여섯 살이 되고, 평생 소설을 써왔지만 어떤 곳에서도 단 한 글자도 출판해주지 않았어요. [파리 리뷰]에 내 소설이 실릴 수만 있다면 내 왼손 새끼손가락을 줄 거예요."
게이브리얼은 곧바로 흥미를 보이면서 구매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다음 날 연락하겠다고 했고, 나는 결국 내 말대로 했다. ……..(중략)……. 드디어 내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도디폴 박사를 찾아가 마취 상태로 손가락 제거 수술을 받았다. 수간호사 케이트 크래커너츠가 면붕대로 제거한 손가락을 감싸고 다시 붉은 박엽지로 포장한 다음 노란색 리본으로 묶었다. 나는 소설을 발표한 작가가 되어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갔는데, 들어올 때보다 몸무게가 85그램 줄어 있었다. 이 일로 돈도 벌었다. 수술비용이 50달러였는데 소설 원고료로 60달러를 받았기 때문이다." (댈러스 위브 [스톡홀름행 야간비행] 中)

영문장은 언어의 갈래가 크게 다른 우리말로 그 맛을 옮기기 정말 힘듭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멋진 문장들을 만나고 있다는 것에 문득문득 기뻐하게 되는 책입니다. 번역도 깔끔하거니와, 이토록 미묘하고 다채로운 색채와 냄새, 질감들이 시시각각 새롭게 우러나는 문장들을 원서로 다시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딱하게도 내 생각이 질주했다. 출장 중인 세일즈맨이 혈관 내막이 벗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약을 먹였다. 턱이 아팠다. 나는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일어나기도 전에 모든 일을 감지했다." (데니스 존슨 [히키하이킹 도중 자동차 사고] 中)

게다가 쟁쟁한 작가들이 남의 작품에 한마디씩 얹는 구성이다 보니, 해설이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작품들입니다. 첫머리에 인용했던 문장 "위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긁어야 하는 가려움과 같다."도 단편 중 일부가 아니라 여기 실린 작가 해설 가운데 한 문장입니다. 이토록 절묘하고 깊이있는 표현들, 통찰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멋진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책장마다 '강아지 귀 접기'를 하느라 책이 기분좋게 누더기가 돼버리기 쉬운, 그런 책입니다. (e북의 경우라면 '형광펜 줄긋기'가 난무할 것 같습니다.)
새해에도 이렇게 새록새록 재미있는 책읽기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골라읽기 뿌듯한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로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도서출판 '다른'의 낭독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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