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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길, 책을 만나다 ⑩ '불행할 자유를 원합니다' - 치악산 황골지구 탐방길

유토피아의 역설 /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치악산의 상고대
 
어디론가 떠나는 길은 늘 설렌다. 각박한 도시를 떠나 한가로운 여유를 누리며 걷는다는 것은 온전히 나만의 시간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혹시, 또 어쩌면 기대했던 특별한 풍경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까지 더해진다면 그 설렘이야 말해 무엇 하랴.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이른 새벽길을 떠나야 하는 것처럼 특별한 풍경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에 걸맞는 장소와 상황은 당연하다.

반짝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그 '기대'가 무르익었다. 너무 춥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게다가 얼마 전 내린 눈으로 습도마저 높았으니 어쩌면, 특별한 풍경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 것이다. 그 대상은 겨울 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상고대다. 상고대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높은 습도와 적당히 추운 날씨라는 여러 요인이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일천한 경험일지언정 그간의 경험에 비춰보면 그날이 그날이었던 셈이다.

가자! 산으로~

나름 서두른다고 서둘러 새벽길을 재촉하던 차에 사고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말았으니, 아뿔싸!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되고만 것이다. 아! 아무리 시동을 걸어도 기척조차 없는 그 황망함이라니... 이른 산행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막 길을 나서려던 찰나에 벌어진 일치고는 나름 대형사고(?)였다. 이를 어쩌나. 이른 아침부터 민폐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다 전화를 돌리는 우여곡절 끝에 배터리를 교체했더니,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이 늦었다. 서둘러야 할 판이다.
 
산으로 가는 길의 초입은 1.5km에 이르는 아스팔트길이다.
 
치악산을
오르다


그런데, 햇살이 좋아도 너무 좋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상고대가 생겼더라도 이런 날씨면 금방 녹아버릴 것이 자명한지라, 그나마 품었던 기대마저 포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론 기대가 너무 컸다는 생각과 그 기대를 버림으로써 초래된 상실감은 차라리 바쁜 마음을 덜어낸 편안함으로 치환된다. 어차피 출발도 늦은 터라 하소연할 대상도 없고, 그저 마음을 비우고 유유자적 산행을 즐기기만 하면 될 터였다.

그렇게 도착한 치악산 황골지구.

산으로 가는 길의 초입은 1.5km에 이르는 아스팔트길로, 산의 입구에 위치한 사찰인 입석사까지 한없이 이어진다. 문제는 이 길이 만만치 않은 오르막이라는 사실이다. 산에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나가떨어질 판이다. 그럼에도, 왔으니 가야한다는 단순한 명제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명쾌한 답이다.

치악산의 황골지구 코스는 지리산의 중산리 코스가 그러하듯 치악산(1,282m) 정상으로 가는 최단 코스다. 하지만 짧은 코스의 숙명은 등반시간의 단축을 보장하는 대신 그만큼의 오르막과 거친 등산길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가야할 길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그저 아득하고 멀미가 날 지경이다. 올라가는 이들은 헉헉 입에 단내가 나는지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이내 힘들다는 탄식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온다.

산의 초입부터 시작된 오르막의 돌투성이 길은 올라올 수 있으면 올라와 보라는 듯 거만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어쩌랴.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산에 왔으면 그 가파름의 차이야 있을지언정 오르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오직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만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로 이끌 뿐이다.
 
산의 초입부터 시작된 오르막의 돌투성이 길은 올라올 수 있으면 올라와 보라는 듯 거만하기 짝이 없다.
 
중력을 거역한
대가를 치르다


정상까지는 불과(?) 3km 남짓. 하지만 힘든 것은 힘든 것임을 몸이 먼저 알고 태업의 기미마저 보이니 환장할 노릇이다. 게다가 몇 발짝 옮기지도 않았는데도 목은 또 왜 그렇게 마른지... 땀에 시나브로 젖어드는 육신은 마치 물 먹은 솜 마냥 축축 쳐지는 꼴이 꼴불견도 그런 꼴불견이 없다. 하지만 원래 그런 걸 어쩌랴.

그나마 나보다 두어 발짝 앞서서 올라가던 어느 70대 산악부부의 유쾌한 다툼이 피로를 잊게 한다. 할아버지가 딴에는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셨나보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것도 못 올라가면 어떡하느냐고 통박 아닌 통박을 하신다. 이에 질세라 할아버지는 지리산 못지않게 힘들다고 다시 투정을 하시고, 할머니는 한숨을 쉬시며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어떻게 여기다가 지리산을 갖다 붙이냐며 언성까지 높아지신다. 겨우 여기를 오르면서 꾀병을 부리냐는 타박이면서, 빨리 올라가자는 다그침이었다. 어쩌다보니 할아버지만 혼이 난 것이 아니라 노부부를 뒤따르던 적지 않은 젊은 것(?)들까지 단체로 혼이 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투덜대던 입들은 한동안 잠잠했더랬다.

할아버지는 혼은 나셨지만 그 투덜거림이 그저 농담이었음을 앞서가는 걸음걸이에서 보여주신다. 오랜 세월 산에서 단련된 듯 걸음걸이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 걸음에는 연륜이 그대로 묻어나 가볍고 또 날렵하시다. 그러니 혼쭐 난 표정도 웃음 가득이다. 건강한 노부부의 심심풀이 투정이 뒤따르던 어설픈 산객들을 흐뭇하게, 또 긴장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고 올라도 깔딱고개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두려움은 쉽사리 가시질 않는다. 비로봉 정상까지는 3km 남짓이니 금방이라도 올라갈 수도 있을 것 같건만, 계획과 달리 몸은 그 계획 자체를 모르는 눈치다. '치'가 떨리고 '악'소리가 저절로 나는 산이라 치악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더니 괜한 빈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산에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산은 산대로 제 명성만큼의 수고로움을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것이 제 존재의 이유일 테고, 그 힘듦을 순순히 수용하고 중력을 거역하며 높이를 탐하는 것은 산을 오르는 자의 몫이건만, 사람들은 제 발로 와서 제 몸을 가누는 일을 두고 그 투덜거림이 낭자했던 것이다. 잊지 말지니! 중력을 거스르는 일은 언제나 높이에 비례하는 비용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치악산 황골지구 탐방로 4
 
산에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산은 산대로 제 명성만큼의 수고로움을 사람들에게 강제한다.
 
'선택의 자유'가
재미를 결정한다


어쩌면 산을 오르거나 길을 걸으며 치르는 비용은 산과 길이 제공하는 효용에 비해서는 오히려 헐값인지도 모른다. 그 길 위에 있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 나라의 산하가 오랜 세월을 견디며 마련해놓은 숱한 비경들이며 물소리, 바람소리, 새들의 지저귐은 또 어떠하며, 산과 들에 함초롬히 피어 여행자를 반기는 수많은 꽃들은 그 자체로도 선물이 아니던가. 같은 모습이라도 땀과 노력이라는 적절한 비용을 지불하고 길 위에서 보고 듣고 경험하는 풍경은 사진 속 그 모습과는 천양지차임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땀을 흘려야 하는 이유는 늘리고 널렸으니, 이마저도 그 맛과 멋을 아는 이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그저 소파가 편안한 이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래 전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미래 가상소설, <멋진 신세계>의 주인공은 '불행할 권리'를 달라고 했었다. 아무런 근심걱정도 고통도 없는 지상낙원을 거부한 그가 원했던 것은 바로 '자유'다. 행복도 불행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요구사항이다. 그가 요구한 자유는 바로 '자유의지'. 하지만 자유의지에는 하나의 부작용이 있었으니, 바로 후회다. 후회의 근원은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선택한 무엇의 결과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이든 선택을 하고 나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후회는 필연이다. 다행인 것은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고 저렇게 했더라면....' 하고 후회를 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뜻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행한 일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면 후회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후회라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으니, 후회 역시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치러야 할 비용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 비용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재미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이유로 '선택의 자유 = 재미'인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누군가 억지로 떼밀어 산을 오르라 했다면 산을 오르는 그들 중 몇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산을 오르겠는가. 그들이 굳이, 기어이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제 스스로 결정하고, 제 발로 왔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여기에서 왜 이러고 있나' 류의 탄식을 내뱉기도 하지만, 후회는 잠깐이고 열매는 달다.
 
치악산 황골지구 탐방로 5
 
미얀마의 어느 산자락에서 걸음이 쌓여갈수록, 그 걸음만큼 풍경이 풍성해질수록 걷는 이는 길에 녹아든다.
 
물론 다른 경우도 존재한다. 내 도보여행에 동행한 친구 중 여럿은 처음에는 힘들어 죽겠다고 난리를 치고 후회막급을 토해내다가도 길의 어느 즈음에 이르러서는 걷는 즐거움을 깨달았노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하는 경우도 여럿이었다. 코로나가 우리 곁에 오기 두어 달 전, 미얀마 여행을 함께 했던 금융업계에서 나름 역할(?)을 한다는 진국 형이 그랬다.

출발 전부터 무조건 트래킹 일정이 있어야 한다는 내 의견에 형은 그걸 왜 하냐면서, 볼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걸 하냐고 난리 아닌 난리를 쳤지만 기어이 걸어야한다는 나의 설득 내지 고집에 싫은 티 팍팍 내며 마지못해 승낙을 했더랬다. 막상 트레킹 당일이 되서도 또 오만 인상을 쓰며 툴툴거리기를 여러 번... 하지만 걸음이 쌓여갈수록, 그 걸음만큼 풍경이 풍성해질수록, 느닷없이 의욕이라는 걸 보여주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흘린 땀이 헛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트레킹 코스의 중간 휴게소 역할을 하는 어느 전망 좋은 오두막에서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는데, 갑자기 또 오잔다. 이럴 줄 알았으면 트레킹 일정을 더 잡을 걸 그랬다며 후회 아닌 후회를 하는 게 아닌가. 걷는 게 무슨 여행이냐고, 길 위에서 시간 다 보내면 관광은 언제 하냐고 온갖 밉상을 떨던 형이, 길 위에서 득도(?)를 한 것이다.

"길을 걷는 게 이리 좋은 거가?"
"그라모. 지가 미칬다꼬 걸어댕기긋어요."
"그런데 그 좋은 걸 이제껏 니 혼자만 했드나? 이기 아주 나쁜 놈이구마."

가자고 할 때는 싫다더니 뒤늦은 각성에 사투리까지 써가면서 나를 공박한다. 걷다보면 자유를 깨닫고, 그 자유 안에서 깨어나는 스스로를 느끼게도 되는 법이다. 싱거운 형의 유쾌한 혼찌검에 미얀마 어느 산자락에서 혼쭐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그래도 형이니 어쩌랴. 코로나로 국경이 막혀버린 지금은 그마저도 그저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한편으론 내가 경험한 평화의 나라가 쿠데타의 아픔을 극복하고 다시 평화 안에서 머물기를 기원해본다.
 
미얀마 인레 호수에서 조업하는 어부들.
 
치악산 황골지구 탐방로 6-1
 
미얀마 바간의 일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걷는다는 것은 어쩌면 몸이 느끼는 고단함, 나아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불행의 역설인지도 모른다. 안락함에서 기어이 몸을 끄집어내 고단한 길 위로 억지로 내모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고단한 여정 속에서 우리는 올더스 헉슬리가 말하는 '멋진 신세계'의 역설과 만날 수도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말하는 '신세계'는 발달된 과학문명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불행하지 않고, 아무도 질병이나 굶주림과 같은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고독이나 불안, 절망 같은 정신적 고통까지도 겪지 않는 유토피아의 세계다. 의식주와 관계된 모든 것은 언제 어디서건 풍족하고, 게다가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란 구호 아래 어느 누구와도 성적인 관계를 즐길 수도 있으니, 관계나 소유로 인한 근심걱정이 있을 까닭이 없다. 그러니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런데 그곳에 불행할 권리를 요구하는 이방인이 나타났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추구하는 세상은 '생물학적 결정론'과 '환경결정론'에 입각해 건설되고 운영되는 유토피아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즉 유토피아의 구성원들은 우생학이 지향하는 목적에 따라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해 대량 '생산'되고, 또 '사육'된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당연히 '가족'이란 개념이 있을 리가 없다.

그들에게 '어머니'며 '임신'이며 '일부일처제' 같은 말은 어색하고, 차라리 그런 말은 듣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기피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잠자는 동안 이루어지는 수면 교육을 통해 '만인은 만인의 공유물'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입받는다. 이런 사고로 인해 고정된 파트너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며, 그런 이유로 누구와도 성적 유희를 즐길 수가 있다. 만일 누군가가 4개월째 한 남자(또는 한 여자)만 만난다면 이는 비정상적인 일로 환자 취급을 받게 되고, 게다가 여성의 30%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임 처리돼 태어나므로 임신 걱정도 없으니 거리낄 게 없다.

게다가 과학의 발달로 50대에도 20대처럼 탱탱한 피부를 지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죽는다. 세뇌교육을 통해 죽음마저도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불쾌감이나 두려움, 열등감, 고통 등을 느낄 때에는 '소마(soma)'라고 불리는 마약성분의 알약 몇 알만 먹으면 완전히 해소된다.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걱정도 구속도 없이 완벽한 유희 속에서 살아가는 삶! 그런데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가 이방인의 눈에는 차라리 디스토피아였던 모양이다.
 
책 <멋진 신세계><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표지" data-captionyn="Y" id="i201625494"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20106/201625494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v_height="1216" v_width="912"> 
'불행할 권리를
원합니다'


어느 날, 신세계와 격리된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살고 있던 '야만인' 존이 우연히 유토피아에 초대받는다. 현대의 우리와 비슷한 문화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처음 보는 고도의 과학 문명이 창조해낸 세상은 그야말로 별천지다. 보호구역 내에서는 모두가 생산과 경작의 노동을 감당하느라 휴식 시간조차 빠듯한데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어느 누구 하나 삶의 고단함을 느낄 틈조차 없이 모두가 행복한 게 아닌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설계된 세계가 그저 감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통제받으며 조작된 행복에 길들여진 '백치'와도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깨닫고는 그들의 행복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야만인들에게는 소중한 가치였던 가족이라는 유대가 사라진 세계, 죽음까지도 익숙해지도록 길들여져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성과 인간적 가치, 그리고 스스로 생각할 자유마저 박탈당한 채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수면 학습과 세뇌를 통해 어떠한 의문도 갖지 않고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야만인' 존에게는 어색했고 행복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런 고통도, 근심걱정도, 조금의 의심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정신적인 즐거움도 없이 오로지 육체적인 쾌락만을 쫓으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존에게는 인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니었다. 선별되고 조작된 유전자로 생산되고 세뇌된 채로 사육되는 '멋진 신세계'에 사는 그들에게는 그곳이 유토피아일지 모르지만, 이방인의 눈에는 디스토피아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토피아의 지배자인 총독에게 요구한다.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神)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善)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고 있군 그래."
"그렇다면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中
 
'야만인' 존이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에게는 행복과 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고, 그것은 바로 '자유'라는 것이다. 설사 그 삶이 불행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할 자유를 가질 권리를 인간은 진심으로 원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의지'를 떠올리게 된다. 제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권리. 지금 산을 오르며 투덜대는 그들이, 그럼에도 산을 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치악산 황골지구 탐방로 8
 
온 나무, 아니 온 산 가득 상고대가 만발이다.

상고대,
눈이 깨닫는 감동


그것이 무엇이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비용을 치러야함은 당연하다. 거저 얻어지는 것이 있다 해도 대체로 그것의 값어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제 스스로 감당하고 지불한 비용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고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투덜대며 오른 산의 중턱. 어라!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안개가 스미듯 밀려든다. 그리고 추워진다. 산이 조금만 더 높아지면 이 안개가 얼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상고대를 볼 수 있으리라는, 접었던 기대가 다시 스물스물 꼼지락댄다. 게다가 이곳은 북동풍이 불어오는 방향이고, 높새바람(푄현상)은 100m 높아질수록 0.5℃씩 떨어지니... 조금만 더 올라가면, 아마도 상고대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걸음이 빨라진다.

아니나 다를까. 오래지 않아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이 온통 새하얗다. 온 나무, 아니 온 산 가득 상고대가 만발이다. 이른 시간도 아닌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간에 이곳에서 상고대를 볼 줄이야. 이 행운을 어이할꼬! 벅찬 광경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달리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보기만 할뿐. 어떤 풍경 앞에서 마음이 아니라도 눈이 깨닫는 말 못할 감동도 있는 법이다.

이런~이런~

감탄에 입은 저절로 벌어지고, 이내 어마무시한 호사 앞에서 눈만 희번덕거릴 따름이다. 온 산자락이 그저 온통 은빛 휘장을 두른 채 제 스스로 빛나고 있었다. 이내 놀람도 잠시... 입은 저절로 다물어지고,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소리만 요란해진다. 새삼 길을 걷고, 산을 오르며 흘린 땀방울이며 고통이야 이런 호사 앞에서는 그저 헐값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비용 대비 소득은 언제나 미안해질 정도로 과하다.
 
치악산 황골지구 탐방로 10
 
상고대가 만들어내는 눈꽃 그림의 붓 터치는 날카로우면서도 거칠다.
 
안개가 얼음이 되었다고 해서 '무빙(霧氷)'이라 불리기도 하는 상고대는 영하의 기온에서도 액체 상태를 유지하던 물 입자가 차가운 바람에 의해 나무나 바위 등에 충돌해 얼은 얼음, 즉 서리(霜)다. 그런 이유로 상고대가 만들어내는 눈꽃 그림의 붓 터치는 날카로우면서도 거칠다. 상고대의 모양은 침엽수의 이파리처럼 길쭉길쭉한 것이 날카롭기까지 하다. 물방울이 바람에 의해 바위나 나무 등의 물체에 부딪히고 또 흩뿌려지면서 긴 꼬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하고는 그 입자의 모양이나 생김새가 크게 다르다.

산의 8부 능선부터 시작된 상고대는 치악산의 정상인 비로봉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산 아래에서는 겨울 맞아? 의심이 난무했지만, 1,000m 즈음의 산 위에서는 이렇듯 상고대가 겨울도 한겨울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자연의 신묘함에 대해 어떻게 주저리주저리 떠들 수가 있을 것인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길은 폭설 뒤의 모습처럼 온통 새하얗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해 온 아이젠이 없었더라면 비로봉까지 가는 길은 엄두도 내지 못할 뻔하였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눈길을 걷는 그들처럼 발밑에서 부서지는 상고대의 묵묵함을 느끼며, 그저 침묵 속에서 나아갈 뿐이다. 상고대의 놀라운 풍경마저도 어느 시점이 되면 가야할 길의 또 다른 모습일 뿐, 정상으로 향하는 무심해진 발걸음들은 조심스럽지만 바빠진다.

갑자기 궁금해지는 것 하나. 상고대는 우리말일까? 아니면 한자어일까? 글자의 생김새는 한자어가 아닐까 싶은데 상고대는 순우리말이란다. 17세기 경 문헌에 '산고(花霜)'라고 나오는데 이후 발음에 따른 변화로 상고대가 되었다고 추측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정확한 어원은 알지 못한다.
 
치악산 황골지구 탐방로 11
 
산의 8부 능선부터 시작된 상고대는 치악산의 정상인 비로봉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아! 비로봉
회색빛 적요의 세상


상고대인지 눈인지도 헷갈리는 길을 따라 어렵사리 오른 곳, 치악산의 정상인 비로봉(1288m)이다. 비로봉에는 얼마나 많은 염원들이 모여 쌓였는지 가늠조차 어려울 만큼의 많은 돌들이 3개의 돌탑으로 우뚝 서 있다. 누가 이곳에 이토록 많은 염원들을 모아 탑으로 쌓아올렸더란 말인가. 이 돌탑에도 나름의 사연이 있다.

비로봉 돌탑은 1960년대 초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진수라는 사람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꿈에 치악산 산신령이 나타나 비로봉에 돌탑을 쌓으라는 계시를 내렸다고 한다. 이에 용진수씨는 3년간 하루는 제과점을 운영하고 이틀은 돌탑을 쌓는 일을 반복하며 기어이 돌탑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더니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 간절한 염원이 모이면 이 높은 산꼭대기에도 이렇듯 돌탑을 세울 수도 있나보다. 프랑스의 유명한 수도원인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이 꿈에 나타난 미카엘 대천사의 계시를 받은 수많은 필부들에 의해 세워졌듯이 비로봉 돌탑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비로봉에는 많은 염원들이 모여 3개의 돌탑으로 우뚝 서 있다.
 
돌탑 너머의 산 저편은 그저 새하얄 뿐. 어디가 어딘지 구분조차 어렵다. 세상을 온통 새하얗게 뒤덮은 안개의 행렬은 가없는 적요(寂寥)의 세상. 감히 소리조차 낼 수 없는 고요 앞에서 마음은 가라앉고, 정신은 명료해진다. 가야 할 삶의 길 역시 저 깊은 안개의 너울처럼 깊은 우물 너머에 있을 것이다. 비록 더듬으며 나아가는 길일지언정 길은 걸어가야 할 어느 곳에나 있기 마련이다.

산의 정상에서 바라보는 이 백색의 공간에서 새삼 진실로 '멋진 신세계'를 깨닫는다. 산을 오를 수 있는 '불행할 권리'를 획득한 인간이 누리는 '힘든 즐거움' 말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아무런 노력 없이 누리는 생활의 편리 및 물질의 풍요와 끝없는 쾌락과는 다른, 몸이 감당하는 힘듦을 감수하고 노력이라는 적절한 비용을 지불한 자만이 누리는 환희는 그 자체로 감동이면서 성취다.

인간에게는 맹목적인 행복이나 삶의 물질적 안정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다. 자기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갈 자유가 있고, 그 자유가 자신의 권리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하질 않던가. 인간된 자의 자유는 이렇듯 상고대가 만발한 산으로도 이끄는 법이다. 그래서 독일의 윤리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자기 고유의 길을 찾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놀라워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권리를 존중하라'고 강조했을 것이다. 길을 찾아가는 방법이면서 인간적 삶의 권리가, 바로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라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앞에서 조금은 찬방지축이어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든다. 아무러면 어떤가. 어차피 살아가는 일이 안갯속이라면 정해진 길 따윈 아예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잘 되고, 못 되고의 기준 조차도 자유의지 안에서 결정되는 일이니 말이다. 내가 좋으면 충분하다는 말이다. 설령 선택한 그 무엇이 자신을 힘들게 하더라도 그마저도 살아낸 이유이고, 그 너머에는 또 선택할 그 무엇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해진 선(線) 위에서만 놀기에는 여백이 아깝지 않은가.
 
돌탑 너머의 산 저편은 그저 새하얄 뿐. 어디가 어딘지 구분조차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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