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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일확천금보다 의로움 택한 '요소수 영웅' 김기원

이로움을 넘어 의로움을 찾은 사람, 김기원

그사람 김기원

1. 지난 15일 약속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전북 익산시 팔봉동 산업공단 안에 있는 아톤산업에 도착했을 때 이 사람은 공장 안 연못에 있는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낯선 방문자가 취재 온 기자라는 것을 아는 눈치였는데 흘깃 눈길을 던지고는 2층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올라갔다. 내가 굳이 먼저 인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몸짓이었다. 사무실에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눌 때도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의례적인 인사말 같은 것도 없었다. 호들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다소 투박한 사람이었다. 친절과 환대를 과장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듯했다.

전쟁이 영웅을 만드는 것처럼 사건은 인물을 낳는다. 10월 말부터 11월까지 전국을 뜨겁게 달군 요소수 사태는 이 사람을 화제의 인물로 만들었다. 구글에 '김기원, 아톤산업'이라는 검색어를 쳐보면 대략 2천 건의 관련 글이 나온다. 요소수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이 사람이 뉴스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요소수 생산업체 아톤산업 대표인 이 사람은 독하게 마음먹었으면 하루에 몇억 원도 벌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요소수를 싼 가격에 소비자들에게 공급했다. 지난해 이 사람 회사의 순이익은 3억 원 남짓이었다. 일 년에 벌 수 있는 돈의 몇십 배를 한 달여 만에 벌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보낸다는 게 결코 쉬운 결정일 리 없었다. 이 사람 선행이 한순간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결과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아온 사람이길래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요소수 문제가 뉴스에서 사라지면서 이 사람 이름도 언론에서 사라지고 있다. 중앙지에서 이름이 사라진 것은 꽤 되었고 지역 언론에서도 김기원 이름 석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빗발치던 기자들의 인터뷰와 취재 요청이 옛일 같고 이러저러한 모임과 자리에 참석해달라는 요청도 이제는 뜸해졌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관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집중되던 조명이 한순간에 꺼지는 느낌일 텐데 이 사람의 '선행 이후'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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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난 10월 중순 요소수 원료가 되는 요소 2천 톤을 중국에서 어렵게 들여왔다. 중국에서 수출 규제 조치를 취하기 직전 국내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요소였다. 중국 산둥 지방에 있는 요소 수출업체는 계약 이후 세 차례나 가격 인상을 요구하며 배짱을 부렸다. 수입항도 군산에서 인천으로 일방적으로 바꾸며 횡포에 가까운 행태를 보였다.

"10월 들어서부터 중국 업자들이 가격을 올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톤당 몇십 불 올려달라고 했다가 한 일주일 있으면 또 올려달라고 하고…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계약을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 그래도 어떡해요. 대기업은 안 해도 그만이겠지만 저희 같은 중소기업은 시장에서 한 번 신뢰를 잃으면 다시 복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본전밖에 못하거나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들여올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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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달치 원료는 확보해 둬야 한다는 생각에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수입한 요소가 큰 효자 노릇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요소 2,000톤이면 요소수 6백만 리터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10리터에 7-8천 원 하던 요소수는 중국의 수출 통제 이후 부르는 게 값이 되었다. 무엇보다 물건 자체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소수가 뭔지 잘 몰랐고, 요소수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워셔액 정도로 취급했던 게 사실이다. 언제나 쉽고 싸게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소수가 없으면 전국에 있는 2백만 대의 경유 차량 운행이 어려워진다는 것, 요소수 원료의 98%가 중국에서 수입되는 '전략 물자'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0월 말 인천과 부산 항만에서 하역 작업을 하던 차량들이 운행에 차질을 빚기 시작하면서 요소수 사태는 표면화되었다. 언론에서 이 문제를 연일 대서특필하고 일부에서 사재기 현상까지 벌어지면서 혼란은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이 문제로 청와대 NSC 상임위원회가 열리고 김부겸 총리가 국회에서 사과하고 나중에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국민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다. 오죽 급박했으면 공군 수송기를 동원해 호주에서 2만 7천 리터의 요소수를 긴급 공수하는 일까지 벌어졌을까.

시중에서 거래되던 것처럼 10리터당 5만 원을 받고 팔았다면 요소 2천 톤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수 600만 리터의 매출액은 3백억 원, 원가를 제하더라도 1-2백억 원은 쉽게 벌 수 있었다. 일 년 순이익이 3억 원 정도인 회사를 경영하는 이 사람에게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였다.

"3억 원은 정말 이틀이면 충분히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길게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꾸준히 벌어야죠. 마스크 대란이 그랬던 것처럼 요소수 사태도 그렇게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남들 어려운 사정 이용해 돈 버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먹고 살 만한 돈은 있다고 했지만 돈이라는 게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요물이다. 직원들에게 연말 성과급 주는 것을 기업주의 보람으로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니 돈이 많아서 그런 기회를 흘려보낸 것은 아니었다.

아톤산업 앞에서 요소수를 기다리는 사람들

3. 언론에서 본격적으로 문제가 제기되기 전 이미 공장 앞에는 요소수를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아침부터 몇 시간씩 기다리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한 사람당 10리터들이 요소수를 두 병씩 팔았다. 한 병에 1만 2천 원을 받았다. 그렇게 판 요소수가 인터넷에서 18만 원에 팔리고 있었다.

"어느 날 집에 갔더니 저희 집사람이 그러는 겁니다. 당신네 회사 마크 찍힌 에이녹스 (요소수 제품 이름)가 당근 마켓에 18만 원에 올라왔다고. 제품에 일련번호가 찍혀 있어서 언제 생산, 출고된 것인지 알 수 있거든요. 출고된 지 두 시간 만에 인터넷에 올라온 거예요. 그래서 알았어요. 아니, 이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가 1만 2천 원에 팔고 있는데…"

열 배 이상의 돈을 주고서라도 요소수를 구하지 못하면 당장 생계에 위협을 받는 화물차 기사, 중장비 운전 기사들이 있는가 하면 이 혼란을 틈 타 사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절실한 사람들이 당하는 거죠. 그런 사람들은 정말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이죠. 그런데 유명인이나 힘 있는 사람들이 제게 전화해서 '요소수 내놔. 누구 좀 줘' 부탁하는 겁니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거죠. 솔직히 이런 시골에서 그런 부탁 거절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요소수 25톤 한 차만 갖고 가면 몇 천만 원 벌 수 있는 기회거든요."

힘 있는 사람은 돈을 벌고, 절실한 사람은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누구나 공평하게 요소수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공장 앞에 진을 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공장 운영이 지장을 받는 상태가 되었다. 돈을 벌려고 마음 먹었다면 이 시점에서 행동에 옮겨야 했다. 10리터에 5만 원을 받아도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는 상황이었다.

"취재 나온 분들이 시장 가격으로만 팔아도 하루에 몇억 원은 벌 거 같은데 왜 그렇게 안 하느냐고…제가 그랬어요. 당신들이 나를 반 공인으로 만들어 놨는데 내가 도둑놈도 아니고 이 기회에 엄청나게 돈 벌면 당장 세무조사 받고 어려운 사람들 등쳐먹었다고 소문날 거 아니냐…방송국이나 기자님들이 안 와서 조용했으면 큰 돈 버는 판인데 당신들 때문에 이번에 돈 벌기는 틀렸다! 그랬더니 다들 막 웃더라고요."

익산 실내체육관에서 요소수를 판매하는 모습

요소수 사태가 절정으로 치닫던 11월 4일 익산시에 먼저 연락을 해 요소수를 익산 지역에 우선적으로 공급할 테니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이 사람이 요구한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요소수 가격을 소비자 기준으로 2만 원 이상 받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도 내 이익 포기할 테니 다른 사람들도 폭리 취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익산에 이어 순차적으로 전라북도 거의 모든 시군과 협약을 맺고 요소수를 공급했다. 이 사람이 각 시군에 넘긴 요소수 가격은 10리터에 1만 2천 원이었다.
 
"제가 공무원 생활 30년 동안 다양한 기업인을 만나 왔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런 기회가 오면 기업인들 대부분은 항상 내 주머니를 채워야 한다가 먼저거든요. 그런데 김기원 사장님은 오히려 제가 걱정이 되더라고요. 지금 한몫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은 안 하느냐고 제가 물었어요. 그랬더니 '나 이번에 한몫 잡지 않아도 잘 먹고 살 수 있고 나는 그냥 요소수 사태 나기 전과 후가 똑같이 우리 회사가 가면 좋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한정복 익산시청 에너지계장

"특이했죠. 보통은 이런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면 좀 더 돈을 많이 벌어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분은 거꾸로 생각을 하시니까…다른 사람들 어려울 때 폭리를 취하면 안 된다는 따뜻한 마음이 아주 고마웠습니다."
-안호영 완주진안무주장수 국회의원
그사람 김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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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거래하던 업체에도 가격을 올리지 않는 조건으로 요소수를 공급했다. 강원도 영월군이 요소수 부족으로 군내 차량 운행이 어렵다는 기사를 보고 먼저 연락을 해서 요소수 4천 리터를 보냈다.

"뉴스를 보니까 그쪽 산골 마을에 요소수가 없어 버스가 못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 듣고 영월군에 전화했더니 저를 사기꾼인 줄 알고 다섯 사람이나 확인 전화를 했더라고요. 거기는 돈 받지 않고 줬습니다. 그 덕에 강원도 옥수수 얻어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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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사람의 행동에 대해 찬사가 쏟아졌다. 전북 지역 한 국회의원은 '영웅적인 결단'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사람에 대한 언론 취재가 본격화된 것도 이 시점이다.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 사람 대답은 한결같았다. 남들 어려울 때 혼자 돈만 챙기는 게 내키지 않았고, 남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는데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너 잘 할 거야' 하면 진짜 잘해야지 하는 거고, 우리 집사람이 '당신은 잘할 거야, 원래 모범적으로 살았잖아' 그러는데 모범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잖아요. 효부가 날 때부터 효부가 아니라 주위에서 잘 한다 잘한 다 하니까 잘할 수밖에 없는 거죠."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을 칭찬한 것은 아니었다. 요소수 파동 당시 부당한 폭리를 취했다고 지탄을 받은 생산업체는 거의 없었지만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이 사람에게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분들 생각은 이런 거죠. 이런 기회가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데 제가 사회협약을 맺어서 일정 가격 이하로 요소수를 공급하니까 어디는 얼마에 공급하는데 너희만 비싸게 받는 거 아니냐는 시선을 받게 되는 거죠. 그게 불편한 사람도 있었겠죠."

공장 생산시설을 풀가동해 요소수 생산량을 평소보다 세 배, 네 배까지 늘려 전북 지역에 우선 공급했다. 다른 지역 거래처에는 기존 물량을 공급했다. 자기 업체 역량으로 전국을 다 감당할 수 없으니 연고가 있는 전북 지역에서라도 요소수 대란을 막자는 게 이 사람 생각이었지만 다른 시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섭섭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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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너 자꾸 방송 나오는데 거기에서 정치하려고 하냐?'는 소리를 들었죠. '나는 이장도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야. 왜 자꾸 정치와 결부시켜? 라고 했어요. 누구랑 사진 찍으면 왜 사진 찍냐, 누구 도와주려고 작정했냐? 그런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협약을 체결한 익산시와 사업으로 얽히거나 관청 덕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었더니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회사 매출도 전북보다 다른 지역이 더 많다. 그래서 더 떳떳하다고 했다.

김어준, 주진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이번 사태의 책임은 기업에 있다는 말을 했다가 정부 편드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본인은 요소수를 만드는 기업체 대표로서 기업 책임을 먼저 거론한 것뿐이라고 했지만 중국의 수출 통제 발표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성을 감지하지 못한 정부의 실책은 말하지 않으면서 기업 책임만 거론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이냐는 말이 나온 것이다. 더구나 김어준, 주진우 두 사람이 대표적인 친정부 언론인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 발언을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긴 했지만 그 일 때문에 속앓이가 제법 심했다.
 
"김기원 대표가 방송 출연한 이후에 마음고생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통화한 적도 있습니다. 그분 이야기는 대기업이 시장 점유를 많이 하고 있으면 그런 만큼 사회적 책임도 있는 거 아니냐. 그러면 미리미리 비축도 하고 공급에 무리가 없게 해야 되는 건데 그런 대책을 전혀 안 세운 것은 기업의 책임도 있는 거 아니냐는 취지의 말씀 같아요."
-안호영 완주진안무주장수 국회의원

아톤산업이 유명해지자 회사를 찾는 사람들도 늘었다. 이런 곳에 정치인들이 빠질 리 없다. 정치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정치인들의 관심이 달갑지 않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대개 정치인들이 오면 불편해요. 여기 와서 이 난리통에 사진 찍는다는 사람도 있고 일하고 있는데 보좌관 시켜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있고…"

아톤산업의 요소수 시장 점유율은 3% 정도다. 올해는 5% 정도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규모면에서는 다른 대기업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이번 일로 회사 인지도와 신용도가 높아졌다.

"'저 집은 회사는 작은데 안정적으로 꾸준히 공급을 해줘' 이것 때문에 지금도 꾸준히 주문을 하는 데가 있어요. '앞으로 저런 사람하고 거래를 할 거야' 이런 심리도 있는 거 같아요. 돈을 엄청 벌 수 있는 기회는 잃었지만 신뢰성 있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앞으로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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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신은 배운 것이 그리 없는 지방의 흙수저 출신이라고 했다. 이미 알려진 선행보다 당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는 말을 했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1962년생,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군산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다. 학창 시절 이야기, 학력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부인이 군산시청 공무원이라는 사실 말고는 가족들에 대해서도 말을 아꼈다. 혹시 콤플렉스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게 많은데 지금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학력이나 경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것을 말하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1991년부터 환경 관련 중소기업에서 월급쟁이로 일했다. 주식도 주고 사장도 시켜주겠다는 오너의 권유를 뿌리치고 2014년 아톤산업을 세웠다. 창업은 이 사람에게 오랜 꿈이었다. 쉰이 훌쩍 넘은 나이에 창업한 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창업은 이 사람으로서는 모험이었는데 그 모험은 성공이었다. 회사를 세운 지 1년 만에 연 매출 100억 원을 달성했고 창업 이후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아톤산업 종업원 수는 28명, 지난해 순이익은 3억 원 남짓이다. 아톤산업 이외에도 무역회사를 비롯한 세 개의 법인을 더 세웠다. 네 개 회사 매출을 더하면 4-5백억 원은 된다고 말할 때 이 사람 얼굴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아톤산업의 주력은 수질개선 사업, 폐기물 수집, 운반 등이다. 여기에 요소수를 비롯한 화학약품 생산이 더해진 사업구조를 갖고 있다. 특허와 인증을 12개 갖고 있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업체는 아니다.

그사람 김기원

-돈은 얼마나 버셨습니까.
"글쎄 많이 번 것은 없는데 먹고 살 만큼 이상은 있는 거 같아요. 저는 정말로 돈을 잘 쓰기 위해 벌려고 합니다."

돈을 잘 쓰기 위해 돈을 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 말로 미루어 짐작하면 보이지 않는 선행이 있을 법한데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동료 노인들과 어울려 무료 급식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막걸리 한두 잔에 취하던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노인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꾸준히 대접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제가 돈을 벌면 노인들에게 식사 대접하는 게 꿈이었어요. 그래서 하려고 했는데 결국 안 했어요. 정치인들이 선거 때 되면 그거 하자고 합니다. 왜 안 했냐 하면 정치인들이 자기가 생색을 내려고 해요. 예를 들면 내가 밥상 다 차려 놨는데 자기가 밥 푸는 일을 하려고 하는 거죠. 저는 그런 것은 안 달가워요."

그사람 김기원

얼마 전 어려운 사람들 돕는 데 써달라며 익산시에 2천만 원을 맡겼다. 오랜 소원인 무료급식소 사업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지만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다. 기부 사실도 주변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알았다. 칭찬에 목말라 있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감당할 수 없는 칭찬이 가져올 해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저는 칼이 칼집에 들어있을 때 가장 위엄 있고 멋지다고 생각해요. 제가 자랑삼아서 미담을 늘어놓고 그래서 저에 대한 분수에 넘치는 과대포장이 계속될 경우에는 제가 감당을 못한다고 생각해요. 저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는 것은 좋은 게 아닌 거 같아요."

6. 지난 11월 초부터 약 한 달 동안 지역 언론에 이 사람 이름이 나오지 않은 날이 거의 없다. 중앙지에도 인터뷰 기사가 실렸고 방송에도 출연했다.

-한순간에 유명 인사가 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그런 면도 없지 않은데 저는 그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업을 하는 데는…"

대중들은 이 사람을 곧 잊을 테고 언론 역시 이 사람을 다시 찾을 일이 많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 사람은 2021년 11월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고, 되돌아볼 추억이 될 것이고, 뿌듯한 자부심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족쇄가 될 것이란 것도 잘 안다.

"누구한테인가 칭찬받고 싶다 그래서 잘해야겠다 이런 게 조금씩 쌓이다 보니까 '나쁜 일 하면 안 되지' 이런 마음이 있는 거지 어디에다 잘하고 이런 것은 없어요. 나쁜 일을 하면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 내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근데 이제 '잘하고 있지?'라는 말을 들으면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앞으로 더 잘해야 돼'하는 소리로 들리죠. 그래서 생각이 더 많아집니다."

이 대목에서 1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에게 칭찬받고 싶었다고 했다. 공부로 칭찬받지 못했으니 돈을 버는 것으로 칭찬받고 싶었다고 했다. 칭찬에 목마른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칭찬, 가족들의 칭찬, 직원들의 칭찬, 그리고 언론의 칭찬까지 이 사람은 칭찬에 목말라 있었다. 칭찬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고 바꿔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고 싶어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칭찬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다.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잘됐다는 얘기를 꼭 해주고 싶은 게 제 꿈이었어요. 공부를 잘해서 '엄마, 나 100점 맞았어'라고 말하는 게 어머니에게는 최고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고 컸을 때는 노인네들이 우리 아들이 부자 되었다고 할 때가 최고 좋아할 텐데 저희 어머니가 돌아가실 땐 '엄마 나 돈 많은데' 했는데도 그 말을 못 알아듣고 돌아가셨어요."

자신에게 쏟아진 관심이 아침 햇살에 안개 사라지듯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이 자신의 삶에서 정점이라면 정점인데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제가 낙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야, 깊은 골 다음에 산이 있으니까 견뎌 봐' 이러는데 나는 반대로 지금 9부 능선까지 올라갔는데 떨어지면 그때는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정말 더 조심하고 도덕적으로도 더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론에 나오고 사람들로부터 응원 메시지 많이 받으셨겠습니다.
"아는 분들이 연락을 주는 정도죠. 서울 사람들, 젊은 사람들은 작은 일에도 호들갑 떨지만 시골 사람들은 잘 표현을 안 해요. 조심하라는 말은 잘해도 칭찬을 한다거나 할 때 동작이 크질 않아요. 서울 사람들은 '그 동네 난리 났겠네' 하는데 여기 난리 안 났거든요."

-보람은 느끼시죠.
"그렇죠. 잘했구나 싶어요. 여기서 내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던 것도 아닌데 이번에 돈 좀 더 벌었으면 오히려 불안했을 거 같은데 그걸 싹 써버렸으니까 떳떳해요. 이제 다른 쪽에서 열심히 해서 돈 벌어야겠다 이러고 있어요. 뭐 숨길 것도 없고 불안한 것도 없고 떳떳하죠."

7. 몇 겹의 차별과 소외를 겪은 사람이다. 지방 출신, 그것도 차별과 소외가 더 심했던 호남 출신에 어디 내놓을 만한 학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중소기업 직원으로 20년 넘게 을로 살았고 그 뒤에도 중소기업을 경영하면서 살고 있으니 갑일 때보다 을일 때가 더 많았다. 그런데 4시간 넘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자신이 겪었던 마음고생, 우여곡절, 차별, 소외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피와 눈물을 흘렸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만 쉬었고 두 아이들 태어날 때도 산모 옆에 있는다고 애 잘 낳는 것 아니라며 출근을 했다고 했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는 뜻일 텐데 정작 자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사람 김기원

책상 위에 '정말 잘돼'라고 쓴 붓글씨 한 점이 액자에 담겨 놓여 있었다. 출근할 때마다 마치 주문 외우듯 이 글귀를 되뇌인다. 긍정적인 것을 말하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고 부정적인 것을 말하면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칭찬의 힘, 긍정의 힘으로 살아온 사람인데 이제 거기에 베풂과 나눔의 힘이 더해졌다.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 자기한테 기대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쁜 짓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쁜 짓을 했어도 안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 거 같아요. 그것보다 더 큰 사람은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베풀어본 사람은 더 큰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일을 했을 때는 자기 긍지도 생기고 자부심이 뿜뿜하거든요."

인구 27만의 전북 익산을 '시골'이라고 표현하는 게 입에 붙었다. 사업의 규모나 성공의 기준 역시 서울에 두고 있는 듯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리 열을 올리지 않던 이 사람이 지방 경제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말을 길게 이어갔다.

"시골하고 서울은 천지 차이예요. 서울에서는 여기 제 사무실 절반도 안 되는 곳에서 연 매출 몇백억을 하는 곳이 수두룩합니다. 서울 사람들은 안산 시화공단을 중소기업 많고 구멍가게 수준이라고 하지만 거기도 여기와는 시장 규모가 달라요. 거기하고 여기는 비교가 안 돼요. 쥐도 서울쥐와 시골쥐가 다르다는 것 아닙니까. 서울쥐 고기 먹을 때 시골쥐는 국물만 먹는 겁니다."

돈 좀 벌고 나니 지인들이 서울에 집을 사라고 권했지만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딱히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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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런 철학을 갖고 있는 기업주라면 회사 경영에서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의 신조 가운데 하나가 '일도 같이 하고 같이 누리자'는 것이라고 했다.

"공산주의처럼 같이 나누자는 게 아니라 같이 누려야 된다. 내가 누리고 싶은 것 우리 직원도 같이 누려야죠. 행복감을 같이 누려야죠."

창업 이후 지금까지 연말 성과급을 안 줘본 적이 없고 과장으로 승진하면 회사 차량을 개인적인 용도로도 쓸 수 있도록 하고 중소기업 직원들을 위한 '내일채움공제' 제도를 성실하게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제가 본 잡코리아 자료에 따르면 여기 평균 임금이 다른 업체와 비교해서 그렇게 높은 것은 아니던데요.
"거기 나온 것보다는 더 줍니다. 저희는 입사 기준으로 연봉 3천만 원이 안 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 동네에서는 조금 낫게 주는 편입니다."

전북 지역의 다른 중소기업보다 조금 더 주는 수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사람과 만남 이후 보완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이 회사 10년 차 직원 연봉이 8천만 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지방에 있는 작은 회사 연봉이 설마 그렇게 많을까 싶어 직접 이 사람에게 문자로 확인했다.

-아톤산업에서 10년쯤 근무하면 연봉이 어느 정도 됩니까. 8천만 원 정도라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8년 차 연봉입니다."

연봉 수준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필자를 만났을 때 하지 않은 이 사람이 다시 보였다. 회사가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공익적 차원에서 포기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직원들에게 동의를 구한 것은 아니었다.

-직원들 입장에서 보면 이번에 회사 실적 좋아져서 성과급 많이 받고 싶지 않았을까요.
"우리 직원들이 저 못지않게 회사를 많이 생각하는 거 같아요. 올해 당장 몽땅 벌고 내년에는 안 벌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직원은 한 명도 없는 거 같아요. 여기 공단에서 우리 회사는 작은 회사지만 직원들에게 저 회사 다니면 좋아, 괜찮은 회사야 라는 말 듣게 해주고 싶어요. 작아도 내실 있는 회사 만들어서 직원들에게 물려주고 싶어요."

익산시청 공무원들을 통해 직원들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들어봤더니 직원들도 만족해 한단다.
 
-진짜로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저도 공무원 그만두고 아톤산업에 들어가야겠다고 농담을 했다니까요. 봉급도 많고 깜짝 놀랐어요."

-정말로 그렇던가요?
"저희가 아톤산업과 같이 일하면서 보도자료도 만들고 그러는데 윤리적으로나 회사 경영에서 문제가 있는 업체를 홍보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직원들 상대로 이야기를 들어봤지요."
-한정복 익산시 에너지계장

9. 이 사람이 부각되긴 했지만 요소수 사태에서 양심을 지키고 자신의 이익을 양보한 사람이 꼭 이 사람만은 아니다. 소방서, 병원 차량 등 긴급 차량에 요소수를 무상으로 기부한 '요소수 천사'들이 적지 않았고 그들의 힘이 있었기에 요소수 사태는 비교적 단기간에 수습될 수 있었다. 돌아보면 이 사람은 공익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한 의인이지만 '현명한 사업가'이기도 하다. 본인 말대로 공짜로 준 거 아니고 손해 보고 판 것도 아니다. 폭리 취하지 않고 물건을 팔았을 뿐이다. 당장 이익은 적게 남겼을지 모르지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을 얻었다. 이 사람도 김태희나 유재석을 써 광고를 해도 이렇게 좋은 광고 효과는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로움이 눈앞에 있을 때 의로움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진 보상이다. 이 사람을 만나고 오면서 기업의 크기로 기업인의 크기를 가늠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멀리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이 사람의 마지막 당부는, 자신을 미화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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