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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중심을 잡지 않아 아름다운

'사유의 방' 건축가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

코로나 사태 이후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분야 중 하나가 건축, 인테리어입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거죠.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의 영향으로 집 뿐 아니라 카페, 레스토랑 등 예쁜 인테리어에 대한 선망도 높아졌고요. 이런 흐름은 1천만 명 이상이 다운로드한 '오늘의 집'같은 인기 앱이나 코로나 사태보다는 살짝 앞서 시작된 EBS의 '건축탐구 집', 그리고 한국일보의 '집공사'(집,공간,사람)같은 연재물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유의 방 관람객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유의 방'이란 전시관을 개관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박물관이라고 하면 왠지 고루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기 십상인데, '사유의 방'은 거꾸로 '힙한' 문화 공간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사유의 방'에는 딱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만' 있습니다.(문화재 지정번호 폐지 전에는 각각 국보 78호와 83호로 불렀습니다) 440㎡쯤 되는 소극장 크기의 공간에 그리 크지 않은 불상 두 점만 놓고 전시하는 경우는 처음일 겁니다. 그런데 이 공간이 휑뎅그렁하게 느껴지거나 아취(雅趣)가 없다면 안 하느니만 못했겠죠.

반가사유상을 박물관은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아이콘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한 국립중앙박물관은 현대카드 디자인라이브러리와 학고재갤러리 등을 설계하고 최근에는 삼일빌딩을(70년대 한국 최고층 빌딩) 리노베이션한 건축가, 원오원아키텍츠의 최욱 대표를 소환했습니다.

박물관측이 건축가에게 주문한 조건은 3개였습니다.

첫째, 반가사유상 두 점을 다 놓겠다.(원래 국립박물관은 한 점씩만 번갈아 전시했습니다)
둘째, 유리상자에 넣고 싶지 않다.(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개관 이후에는 줄곧 유리상자 안에 있었습니다)
셋째, 반가사유상의 뒷모습도 보여주고 싶다 (실제로 보니 뒷모습에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더군요!) ​



건축가는 세 가지 조건을 다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가지 조건을 바꿔달라고 요청하죠. 애초 건축가에게 주어졌던 공간은 현재 '사유의 방'에 절반 정도였답니다. 건축가는 반가사유상을 제대로 보려면 관람객과 교감하는 공간이 필요하니 넓혀달라고 했고, 박물관은 수락했습니다.

'사유의 방'이라는 공간이 특이한 게, 무엇하나 반듯한 게 없습니다. 일단 전시장이 정사각형도, 직사각형도 아닙니다. 반가사유상 전시대도 완벽한 구(球)가 아니라 타원입니다. 반가사유상의 시선은 정면이 아니라 약간씩 틀어져있습니다. 건축가는 "공간 자체가 사람의 '무브먼트'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공간의 중심성을 없앴다"고 말합니다. 반가사유상의 시선이 정면이 아니니 제대로 보려면 관람객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관조하면서 불상과 교감이 생긴다는 겁니다.



똑바르지 않은 것은 이뿐만 아닙니다. 전시관 바닥은 관람객이 불상을 보기 위해 다가가면 살짝 오르도록 기울어져 있고, 천장은 거꾸로 불상쪽으로 살짝 내려가 있습니다.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느낌이 확실히 다릅니다. 심지어 전시관 벽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가보면 간접 조명과 어우러진 묘한 공간감에 사로잡히는데, 그게 바로 중심성을 없애고 시각적인 초점을 특정지점에 두지 않은 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유의 방'이라는 공간에서는 그래서 어쩌면 가우디의 건축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참고로 최욱 건축가는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
위에서 내려다본 사유의 방 설계도. 노란색으로 표시된 반가사유상의 시선이 정면이 아니라 살짝 틀어져있다
최욱 건축가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건 건축사무소 내부 얘기인데요, 건축가가 건축사무소 직원들에게 전시관 스케치를 해보라고 했더니 대부분 반가사유상을 전시관 한가운데 놓는 디자인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건축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반가사유상은 서양의 조각품과 달리 살아있는 표정, 정신이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여백이 중요했고, 공간의 중심성을 없애서-반가사유상을 한가운데 놓는다면 중심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보이는 것 이상의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최욱 건축가가 자신의 의견과 다른데 받아들인 건축주의 의견은 무엇일가요? 원래 건축가는 반가사유상의 시선을 관람객의 눈높이와 평행하게 놓아두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조언에 따라 반가사유상 전시대를 살짝 높여 사람이 손을 들었을 때의 높이 정도로 맞췄다고 해요. 제 생각에도 만일 아이레벨로 반가사유상을 뒀다면 관람객이 많을 때는 관람이 좀 힘들어졌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해서 지난 3월에 반가사유상 단독 상설전시관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가는 약 8개월 만에 '사유의 방'이라는 공간을 탄생시킵니다. 건축주로서 중심을 잡고 건축의 전문가인 건축가에게 대부분의 설계 원칙을 일임한 국립중앙박물관과, 중심을 없애는 방향으로 중심을 잡은 건축가 덕분에 한국 박물관 사상 가장 유니크하고 힙한 전시공간이 탄생했습니다.

현장에서 관람객들의 관람 소감을 들어봤는데요, 그중 인테리어 디자인 쪽에서 일한다는 중년의 여성은 국립박물관 같은 공공기관에서 이 정도의 (상상력의) 개방성과 완성도를 보이는 공간을 만들어냈다는데 대해 놀랍다고 말했습니다.

요즘 대선을 앞둔 정치판에서 어느 쪽은 중심이 없어 문제라는데, 중심이 없어 아름다운 건축도 있습니다. 물론 서로 중심을 차지하려고 악다구니를 쓰다가 중심이 없어진 것과는 전혀 다른 경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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