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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길, 책을 만나다 ⑨ '삶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순간 진보한다.' - 영양 '죽파리 자작나무 숲길'

나는 너를 위해 있고, 너는 나를 위해 있으니 우리가 되는 것 / 신준환,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산 아래, 저 멀리 시야의 끝, 희끗희끗 자작나무숲이 보인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걷는 인간


"발은 그 자체로서 공간의 작은 부분에 속하지만, 우리의 걸음은 이 세계의 공간을 연결한다." 장자(莊子)의 말이다. 걷는 만큼 세계는 지속적으로 연결되고, 또 넓어진다는 말이다. 실제로 산과 들과, 바다를 에둘러 걷다 보면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세계로 인도되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여러 번이다. 두 발이 감당한 수고로움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공간이동만이 아니라 과거를 거쳐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재를 지나는 과정도, 그러다 어느 순간 모두가 도달하게 되는 인생의 마지막인 순간인 죽음까지도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죽는 그날까지 어느 길을 선택하고, 또 선택한 길 위에서 자신의 마음을 담아 나름의 열정을 쏟으며 걸어가는 것이, 결국 삶의 요체다.

그리고 그렇게 걸어가는 우리의 삶은 제 나름의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질주하는 중이기도 하다. 산다는 것은 결국 지나는 길 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걷는 인간', 또는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했을 것이다. 시인 류시화에 따르면 호모 비아토르는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자'이면서,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방황하며 스스로 가치 있는 삶을 찾아나서는 존재'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존재'라던 괴테의 말과 일맥상통한다. 걷는 것은 방황이면서 방향을 찾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걷는다는 것은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제대로 걸어가는 일이다.

흔히들 '삶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순간 진보한다.'고 말한다. 방황 역시 마찬가지다. 결별의 대상은 '과거의 나'이고, 진보의 순간은 '새로운 나'를 만날 때다. 그리고 새로운 나를 찾고자 할 때 그곳이 어디든 여행은 시작될 것이다. 내 삶이 진부하게 느껴지고, 막막해질 때 어느 다른 곳에 스스로를 부려놓고 걸어가는 자신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와 화해하고 있는 자신을 만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익숙한 질문 앞에서 큰 소리로 울음 울고 난 뒤의 개운함이야말로 길을 나서게 하는 원동력이 아니던가.

천지간에 홀로인 어느 산자락을 텅 빈 채로 걷노라면 어느 순간 가슴이 먹먹하게 미어져오고, 시야 저 편이 뿌옇게 흐려질 때도 있고, 앞조차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로 마냥 울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걷는다는 것은, 또 여행은 방황이기도 한 까닭이다.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사람들에 대한 회한,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과 이율배반적인 게으름과의 쟁투, 나는 나를 왜 가만히 놓아두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 아직도 떨쳐내지 못하는 힘들었던 지난날의 기억들...

그러다 그러다가 후회와 미움, 분노가 지나온 길 위로 떨궈지고, 조금씩 되살아나는 살아가야 할 많은 이유 앞에서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마음은 가벼워진다. 지름길이 아닌 에둘러 이어지는 길이 품고 있는 성찰과 사유의 덕분이다. 조금 늦는다고, 돌아서 간다고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걷는다는 것은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제대로 걸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장소에서의 낯선 경험은 마음을 늘 설레게 한다. 천릿길을 달려온 이유 역시 그 설렘 안에 오롯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자작나무숲
가는 길


구체적인 행위로서의 걷는다는 것은 일상을 떠나 몸과 마음과 길 사이에 놓인 긴장을 즐기면서 나아가는 과정이다. 한편으론 땅 위의 두 발이 차지하는 작은 공간을 통해 두 발이 차지하지 못하는 공간 너머의 전체를 누리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렇게 느리게 내딛는 한 발 한 발은 결국 삶의 크기가 된다. 그렇게 새로운 시간을 만나고, 또 보내면서 삶은 축척되어 간다. 나아가는 거리만큼 새로워지는 풍경과 세계가 그 증거다. 배가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러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듯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늦가을 죽파리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직업상 전국의 여러 곳을 다녔지만, 경북의 영양은 그 중에서도 먼 곳이었다. 와보기는 했던가? 기억마저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새로운 장소에서의 낯선 경험은 마음을 늘 설레게 한다. 천릿길을 달려온 이유 역시 그 설렘 안에 오롯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맞을까.

의구심을 자아내는 좁고 긴 농로의 끝에 숲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은 고요했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탓에 오가는 이조차 드물다. 여고동창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그들만이 붉은 계절에 취해 까르르 터지는 웃음을 길 위에다 함뿍 쏟아놓을 뿐, 천지간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그들마저 멀어지자 길 위를 흘러가는 낙엽들이며, 그들을 따라가는 바람이며, 적막한 공간을 적시는 계곡 물소리만이 길 위의 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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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끝이면서 산의 시작점에 자작나무숲이 있다.

자작나무숲은 검마산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터라, 가야할 길은 4km 남짓. 그러니 걷지 않고는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소요하듯 걸으며 깊은 숨을 몰아쉰다. 샘 깊은 우물물을 들이키듯 가슴 속이 환해지고, 오지의 청정한 공기에 감탄이 절로 난다. 이곳이 오지라는 또 다른 증거는 스마트폰도 이곳에서는 '동작 그만'이라는 사실이다. 통신 불가 지역이라는 뜻이다. 새삼 서 있는 자리의 특별함을 깨닫게 된다. 하루에도 수없이 울려대며 저가 나인 양 우쭐대던 스마트폰이 조용해지자, 세상과의 단절이 오히려 반갑고 자유를 깨닫는다. 실상 그 자리는 사람 사는 세상의 바깥에 있으며, 오롯이 자신만이 존재하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자리였던 셈이다. 다만 그 자리를 제대로 향유하는 것은 각자 자신만의 몫이리라.

산 아래, 저 멀리 시야의 끝, 희끗희끗 자작나무숲이 보인다.

영양군 죽파리에 터를 잡은 자작나무숲은 그 낭만적인 모습과는 달리, 목재 생산을 목적으로 1993년에 조성된 인공조림지다. 약 30ha 면적에 12만 그루의 자작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자작나무숲이다. 자작나무숲으로 유명한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보다 3배나 큰 규모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은 제대로 세상에 알려진 숲이 아니기에 그저 고즈넉하다. 지금은 2023년 정식 개장을 앞두고 숲길을 연결하고 이정표를 보강하는 등 분주하게 준비 중이다.
죽파리 자작나무숲길 5
자작나무숲길 표지판이 가야할 길을 알려준다.

숲속의 신사(紳士)
자작나무


길의 끝이면서 산의 시작점에 자작나무숲이 있다. 그리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 숲으로 가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 길은 가볍게 수런대는 자작나무 이파리들의 수다가 정겨운 곳이다. 계곡 너머 비탈을 딛고 선 숲이 아찔하다.

이 숲을 보고자 먼 길을 달려온 감회 때문이었을까. 한발 한발 발걸음을 옮기며 바라보는 푸른 하늘, 흰 구름, 그 아래에 펼쳐져 있는 자작나무숲은 내가 숨어들 위안의 장소처럼 보인다. 하얗게 치장된 순백의 파노라마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마음의 캔버스인 양 울컥 쏟아져 나오는 것들을 멋대로 휘갈길 수 있을 것만 같고, 그마저도 버겁다면 나무그루터기에 앉아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충분해 보인다.

차마 숲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작나무의 흰 너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하늘과 땅 사이, 흰 띠를 두른 숲이 처연하게 서 있다. 늦가을이 무색하게 아직도 푸른 잎을 매단 채로 흔들리면서도 고요하다. 동토(凍土)의 땅에서 강제로 이주한 나무들이건만 낯선 땅에서도 낯가림 하나 없이 풍성하다. 영화 <닥터지바고>의 테마송인 "Somewhere my love"가 잔잔하게 흐르는 것만 같고, 지바고와 라라가 탄 눈썰매가 시베리아평원을 달려가는 풍경이 아스라하게 떠올려진다. 썰매가 지나는 중간 중간 보이는 숲들도 모두 자작나무숲이었었다. 아쉬운 것은 영화에서처럼 사랑은 언제나 비련이어야만 하는 것인지...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는 그랬다.

다행인 것은 새하얀 자작나무 수피에다 순정의 연애편지를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사랑으로 잠 못 드는 수많은 그대들은 참고하시라. 다만 편지를 보낼 주소조차 모르면서 공연히 나무껍질만 탐하지는 말기를...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전화번호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주소 같은 건 몰라도 되는 세상. 그래서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에다 온 마음을 담아 밤을 새워 편지를 써도 보낼 곳조차 모르는 세상. 주소는 택배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는지... 모든 것이 연결된 디지털 세상에서, 아날로그의 소멸은 어떤 아날로그 인간에겐 아무래도 아쉽다.
화촉(華燭)을 밝힐 때, 그 화촉의 재료가 자작나무다.

'숲속의 여왕'이라 불리기도 하는 숲의 신사인 자작나무는 영하 20~30도의 혹한을 견디는 나무다. 그것도 그리 두꺼워 보이지 않는 비닐 종이 같은 얇은 껍질 하나를 두른 채로 말이다. 비밀은 여러 겹의 종이를 덧대어 붙인 배접 방식으로 겹겹으로 덧씌워진 표피에 있다. 그리고 그 표피에다 풍부한 기름 성분까지 저장해 놓은 탓에 웬만한 추위는 거뜬하다. 자작나무는 딴에는 여려보여도, 제 살아갈 방도 하나쯤은 충실히 마련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 살겠다고 켜켜이 쌓은 표피마다에 담고 있는 기름기가 자작나무에게는 위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불에 취약한 것이다. 나무가 '자작'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도 활활 불에 타면서 '자작자작' 내는 소리 때문이다. 자작나무의 불에 잘 타는 성질은 나무 입장에서는 불행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주 유용하다. 일례로, 우리는 흔히 혼례(婚禮)를 일컬어 화촉(華燭)을 밝힌다고 표현하는데, 그 화촉의 재료가 자작나무다. 불에 잘 붙고, 오래 타는 성질은 나무에게는 생존의 설계일 뿐이지만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쓰임새가 많아도 너무 많았던 것이다.
나무는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의 숨을 나눠 마시며, 숲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함께,
더불어


숲의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한 벤치에 앉아 숲을 바라본다. 나무는 개별적으로 자라지만 그 개별적인 노력들이 합쳐져 종내는 숲이 되는 장엄한 광경은 결국 개별적인 '나'라는 존재들이 모여 '우리'가 되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무도, 사람도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늘 경험하는 흔하디흔한 풍경이지만, 그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너무 흔해서 인식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는 수많은 것들처럼, 그렇게 말이다.

자작나무들 사이로 난 숲길을 걸으며 '나'를 생각한다. 정작 나는 나이고, 내가 보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인가? 의문도 여럿이다. 평생을 나무 연구자로 살아온 신준환은 그의 저서,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에서 내가 본다는 것은 사실은 '내가 세계를 그렇게 구성한 것이고, 다만 내가 그렇게 볼 뿐'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본다는 의미다. 그 '안다는 것'마저도 누군가로부터 습득한 앎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전부라 여기며 보는 것조차도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고, 결국 자기 안에 갇혀 자기가 알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준환은 마찬가지로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내가 아니라 내가 봐 왔던 혹은 내가 부러워했던 그 누군가이거나 그 누군가의 조합'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이라는 것마저도 '우리'라는 울타리가 만들어낸 수많은 생각들을 개별적으로 취사선택한 것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라고 믿는 것들조차도 관계라는 틀 속에서 형성된 것이지 원초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며, 모방하고 닮아가려는 노력들의 총합이 '나'라는 말이다. 결국 인간이란 남과 삶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야 살아있을 수 있고, 살아낼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모든 것으로 구성된 존재다. 그러니 너는 있는데 나는 없다. 그런데 너에게 들어가 보면 네가 따로 있을까? 역시 너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너 속에 내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엮여 있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위해 있고, 너는 나를 위해 있으니 우리가 되는 것이다." - 신준환, <나무의 일생, 사람의 마음>

'나는 너를 위해 있고. 너는 나를 위해 있으니 우리가 되는 것'이라는 신준환의 통찰은 나무의 삶을 통해서 얻은 것이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나무들마저도 숲이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며, 서로의 숨을 나눠 마시며, 숲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파리 자작나무숲길 8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 부른다.

나무는 서로 연결되어 숲을 이루지만 각자의 존재 방식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다. 개별적인 존재인 나무들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크기의 공간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넉넉히 뿌리를 내리고, 햇빛을 두고 여러 나무들이 경쟁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각자의 공간 확보는 필수다. 그렇게 나무는 나무들 간의 '사이'를 인정한다. 그 사이라는 틈이 나무들이 공존하는 비결이다. 사이를 인정하니 다툴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의 저자인 우종영은 이러한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을 '그리움의 간격'이라 부른다. 서로 체온을 느끼고 바라볼 수는 있지만 절대 간섭하거나 구속할 수 없는 거리이면서, 그런 이유로 서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거리가 바로 그리움의 간격이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그럼에도 찬바람이 매서운 밤이면 서로 새된 신음소리를 흘리면서도 곁에 선 나무를 그리워하면서 위로받을 수 있는 거리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적당한 거리는 좋은 관계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로 상처주지 않을 만큼의 거리면서, 바라보며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거리에서 나지막이 그리워한다면 목이 메는 질긴 목마름 따윈 겪지 않아도 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는 사랑이 오면 설사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더라도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되고 마는 것이 인간사인지라,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잔바람에도 소스라치게 웃던 자작나무 잎사귀들의 발랄함은 시나브로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자작나무의
깔끔한 처신


자작나무는 흰옷의 맵시가 잘 어울리는 핏(?)한 자태가 최고의 자랑이다. 날씬한 몸매에 쭉쭉 뻗어 있는 우아한 모습은 숲의 신사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게다가 정갈하고 가지런한 잎들에서마저 궁색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이 경쾌하다.

봄날의 자작나무숲은 새하얀 자태도 자태지만, 자지러지게 웃는 잎들의 정겨운 소란스러움 역시 충분히 매력적이다. 크기도 맞춤한 잎사귀들이 빛살을 튕겨내며 흔들리는 모습은 바라보는 이들도 저절로 웃음 짓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을이 깊어 겨울로 내닫는 숲의 잎사귀들은 더러는 노랗게 물들고, 더러는 계절을 외면하며 아직도 가지를 애써 붙들고 있지만 머지않은 때에 땅 위에서 안식의 꿈을 꿀 것이다. 잔바람에도 소스라치게 웃던 소녀들의 발랄함은 시나브로 추억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원래 자작나무는 햇빛을 좋아하여 산불이나 산사태로 빈 땅이 생기면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리고 자기들만의 숲을 만들어 빠른 속도로 자라는 나무다. 하지만 다른 나무들이 제 땅을 넘보고, 그러다가 은근슬쩍 자리를 차지하고 키마저 자신을 넘어서면, 자작나무는 그 나무에게 미련 없이 땅을 넘기고 조용히 사라진다. 수령도 수백 년을 넘게 사는 보통의 나무와 달리 딱 100년 전후로만 살아 애써 생(生)에 애면글면 구차하게 굴지도 않는다.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아는 풍모까지 갖추고 있는 셈이다. 한 마디로 숲속의 신사답게 고상하고 단아한 외모만큼이나 처신마저 깔끔하다.

자작나무의 특징 중 또 하나는 자라면서 줄기의 아래쪽에 붙은 가지를 스스로 떨어뜨리며 자란다는 사실이다. 성장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가지는 아낌없이 버리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작나무의 줄기가 매끈하고 늠름한 것이다. 이때 가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흔적이 남는데, 그 흔적을 지흔(枝痕)이라고 한다. 이마저도 자작나무의 깔끔한 처신 중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런데 자작나무의 지흔은 마치 눈(目)처럼 생겨 자작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수십 개의 새카만 눈들이 되려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서늘한 기분마저 든다. 나무의 순수함과 마주한 탕아의 제 발 저림이라고나 할까. 따뜻하면서도 깊고 선한 시선은 그 시선이 닿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돌아보게도 하는 것이다.
죽파리 자작나무숲길 10
단풍나무는 하얀 도화지에 그려놓은 양 저 홀로 붉다.

삶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는 순간
진보한다.


길은 나무와 나무 사이, 수북하게 쌓인 낙엽들 사이로 이어진다. 길 위로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떼며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낙엽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안타까워진다. 엄연한 자연의 순리 앞에서도 공연한 감상은 늘 제 느낌만이 최고의 것인 양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가야 하는 순리 앞에서 가야하는 이의 냉엄한 이치야 당연한 것임에도, 그저 머무름만이 좋은 일인 양 저 혼자 제 감상에 젖은 사람들은 그 이별이 어떤 이별이든 떠남 앞에서 우물쭈물하기 하기 마련이다.

이별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다. 사랑하는, 그래서 그리운 것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일이니 오죽할 것인가. 하지만 제 잎을 떨어내는 나무의 이별은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떠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람도 견디기 힘들지만 광야에 서 있는 나무는 더욱 그렇다. 계절이 가을로 이울면 햇빛도, 뿌리가 감당하는 수분의 양도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는 다음의 봄을 기약하기 위해 그동안 모아 놓은 에너지를 아껴 쓰면서 추운 계절을 견뎌낸다. 그 방법 중 가장 적극적인 것이 제 몸의 잎들을 모질게 떨어내는 것이다.
단풍이 들고 그 잎사귀가 떨어지는 일은, 나무들이 제 운명에 충실한 것이다.

나무는 제 잎들을 떨구기 전 마지막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단풍(丹楓)이다.

단풍의 그 고운 빛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초록의 나뭇잎 속에는 사실 처음부터 단풍의 색이 들어 있다고 한다. 단풍 색은 엽록소와 달리 이제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약하나마 제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다른 색소세포들이 분연히 일어나 저도 있음을 알리는 존재 선언이었던 셈이다.

나뭇잎 속에는 우리가 잘 아는 초록색을 나타내는 엽록소 외에도 카로티노이드라고 하는 색소가 들어 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기온이 낮아지면 엽록소는 빠르게 파괴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카로티노이드는 그대로 남아 또 다른 색소인 안토시아닌과 합성해 노랗고 붉은 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특히 가뭄이 계속되거나 기온이 갑자기 낮아지는 경우에는 엽록소가 빠르게 파괴되기 때문에 나뭇잎은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을 띠게 된다.

결국 단풍이 들고 그 잎사귀가 떨어지는 일은, 나무들이 제 운명에 충실한 것이다. 나무들의 운명은 다음의 봄에 다시 잎을 돋게 하고 꽃을 피워 살아내면서 씨앗을 만들어 종족을 보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버려야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야 멀리 날 수 있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버리고 떠나는 것'이 자기답게 거듭거듭 시작하며 사는 일이듯 나뭇잎의 떨어짐도 낡은 것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텅 비워야 새로운 것이 들어찰 수 있듯이 말이다.

숲의 고요 속에 잠긴 채로 숲에서 숲을 바라본다. 숲의 속삭임이 은근하다. 그러다가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하얀 너울이 원근감을 상실한 채 흐르고 멎기를 여러 번, 새삼 겨울을 맞은 자작나무의 진정한 멋은 '단순함'이었음을 깨닫는다. 비어있어도 비어있지 않은 충만의 느낌말이다.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생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있다면, 그것이 제대로 사는 삶'이라던 법정스님의 말처럼 숲은 단순하게, 또 간소하게 제 삶을 살기 위해 몸의 일부마저도 끝없이 떠나보내고 있었다. 버림은, 그 결과로서의 비어있음은 모자람이 아닌 그 자체로 충만이었음을, 숲에서 다시금 배운다.
새삼 겨울을 맞은 자작나무의 진정한 멋은 '단순함'이었음을 깨닫는다. 비어있어도 비어있지 않은 충만의 느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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