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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단골집이 돌아왔다! '아무튼, 술집' [북적북적]

내 마음의 단골집이 돌아왔다! '아무튼, 술집'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15 : 내 마음의 단골집이 돌아왔다! <아무튼, 술집>
 
"나만의 리듬을 갖게 된 건 술집에서였다. 나는 술집의 모든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고 정겨웠다."

11월의 첫 주, 어떻게 보내셨나요? 좋은 사람들과 밖에서 느긋하게 둘러앉은 시간을 오랜만에 만끽한 분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한 달쯤 전에 단골 LP바 사장님과 잠깐 국제통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냥 언니라고 부르는 분인데, '정말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그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의 그 단골집도 문을 활짝 열어놓고 손님들을 맞고 있을 것 같아 기쁩니다. 모두가 답답하고 힘든 시기를 지나왔지만, 그동안 제대로 문을 열지 못했던 가게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했을지 짐작하기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작년 연말 뉴욕에 도착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해도 불빛을 밝히는 곳들이 드물었습니다. 어두운 밤거리는 9시 정도면 인적이 아예 끊기다시피 했습니다. 뉴욕에서도 심야 식당영업이 금지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맨해튼인데, 어떻게 이렇지?' 싶었습니다. 그럴 거라는 걸 충분히 알고 왔는데도, 막상 직접 보는 건 또 달랐습니다.

다행히 1월부터 백신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뉴욕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도시 자체가 조금씩 되살아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자체로 문득문득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며칠 전 지나갈 때까지만 해도 굳게 문을 닫아걸었던 집이 "많이 기다리셨죠? 우리가 돌아왔어요!" 인사말을 크게 써붙이고 불빛을 환하게 밝힌 걸 발견했을 때. 골목골목마다 밝은 조명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그 아래 모여서 신나게 떠들고, 마시고, 부대끼고, 큰 소리로 웃는 모습들을 볼 때. "이따 잠깐 볼래?" 번개를 치면, 잠시 후에 큰 걱정없이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때.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게, 전에는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그 풍경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이다지도 좋은 것이로구나. 밤마다 골목골목 끊이지 않고 이어지기 시작한 식당과 술집들의 반짝이는 불빛의 띠가 비로소 다시 시원하게 흐르기 시작한 도시의 혈관 같다고 느꼈습니다. 비유적으로 '혈관 같은' 게 아니라 어쩌면 도시의 혈관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갓 지은 밥, 테이블 가득한 반찬들, 내가 고를 수 있는 온갖 일품요리.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과 술을 앞에 둘 때면, 오랜만에 찾아간 본가에서 대접받는 친구들의 마음이 이런 걸까 싶었다. 애초에 바깥의 손맛으로 자란 나는 난생처음 간 술집에서도 집밥을 먹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술집은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었다. 술집에는 언제나 켜져 있는 조명 아래에서 사람들의 소음 속에 섞일 때 느낄 수 있는 온기와 보장된 취기가 있었다."

'위드코로나'가 시작된 주간, [북적북적]에서는 김혜경 작가가 지난 여름에 펴낸 [아무튼, 술집]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기억도 마음도 신발도 놓고 나오는" 아무튼, 술집입니다.

출판사 제철소/위고/코난북스가 함께 펴내는 이 '아무튼' 에세이 시리즈에서 딱 2년 전 여름 [아무튼, 술]이 출간됐습니다. 그때 이 책을 [북적북적]에서 즐겁게 읽으면서 '야 이거 야심찬 기획이다'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세상에 술과 글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술꾼들의 대표로 술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한 일입니다. [아무튼, 술]도 그 책임을 멋지게 완수했는데, [아무튼, 술집]은 제게 별안간 –술병 뿐 아니라- 향수병까지 가져다 줬습니다. 이 책에 묘사된 작가의 단골집들이 궁금해지게 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내 정다운 단골집들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하는 매력. 그냥 읽는 것만으로도 맨정신에 한 잔 한 것처럼, 쓸쓸했던 날 단골술집에서 위로를 받은 날처럼, 기분좋게 취하게 만들어주는 글들입니다.
 
"그리고 역시나, 마스터는 답을 알고 계셨다. 그는 우리에게 아주 디테일한 지령을 내렸다.
 1. 우리돼지국밥'에 간다. 모티에서 보냈다고 말하라.
 2. 8,000원어치 순대 1인분을 주문한다. 방앗잎도 따로 2,000원어치 산다.
 3. 그다음, 옆옆집에 있는 '경북산꼼장어'로 건너간다. 역시 모티에서 보냈다고 말하라.
 4. 보통은 꼼장어 양념구이를 많이들 먹지만, 꼭 소금구이로 주문한다.
 5. 꼼장어가 익을 때까지 포장해온 순대를 애피타이저로 먹는다. 사이사이 방앗잎도 잊지 않고 곁들여 먹어준다.
 6. 꼼장어를 조금 남겨 밥도 볶아 먹어야 한다.
그는 곧이어 우리가 비운 250밀리리터 산펠레그리노 탄산수 유리병 가득 아드벡 위스키를 담기 시작했다. 꼼장어를 먹을 때 어울리는 술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소풍을 갈 때 손수 끓인 보리차를 들려 보내는 어머니처럼, 그는 깔때기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꼼꼼히 담아 우리에게 건넸다.
그는 단 1퍼센트라도 술꾼들이 더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길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일반 소주잔이나 종이컵에 위스키를 마시도록 내버려두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잔을 하나씩 수납할 수 있도록 칸칸이 나뉜 박스에 글렌캐런 잔을 인원수에 맞게 넣은 다음, 깨지지 않도록 단단히 포장했다. (…..중략……) 우리는 마스터의 지시에 따라 완벽한 맛의 세계로 접어들 생각에 들뜨면서도 조금 당황스러웠다. 취한 우리의 무엇을 믿고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는 것일까? 걱정스레 그의 안색을 살폈으나, 마스터는 그 모든 것을 안겨주고 나서야 개운해 보였다.
"이걸 어떻게 돌려드리죠?"
"그냥 거기 맡겨두세요."
마스터도 바깥에서는 다른 술집의 단골이라는 걸 새삼 알 수 있는 답이었다." ('마스터의 주(酒)입식 교육' 中)

빌리 조엘의 '피아노맨'이란 노래를 좋아하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바의 피아노 연주자가 바라본'토요일 밤 9시면 모여드는 단골들'은 하나같이 외롭거나, 결핍이 있거나,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피아노맨 본인을 포함해- 그런 사람들이 바를 찾아 자기자신을 털어놓습니다. 단골술집이란 마음에 심어둔 회전문 같습니다. 이 회전문을 밀고 나가 맞닥뜨리는 저 바깥에서 어떻게 지치고 깨지든, 다시 이 문을 밀고 돌아와 그 짐덩이 같은 마음들을 내려놓고 또 한 번 회전문을 밀 힘을 얻어갑니다. '이 술집에 앉아있는 이 순간, 이 공기야말로 내 인생에서 가장 진짜인 순간이 아닐까?'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가 너무 술꾼같은 생각이라 창피해서 애써 밀어둡니다. 이런 기분을 제대로 알아주는 노래로는 '피아노맨'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술집]은 바로 이런 기분을 꼭꼭 풀어서 이해해 주는 정도가 아니라 "뭘 창피해 하고 그래!! 당연한 거 아냐?!?" 호기롭게 등을 탕! 탕! 쳐줍니다.
 
"인생 위스키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블랑톤 스트레이트 프롬 더 배럴'도, '프라팡 XO' 코냑도, '글렌파클라스 패밀리 캐스크 96년 빈티지'도 모티에서 처음 마셨다. 그때마다 놀란 눈으로 "이게 제일 좋다!" 외치는 나에게 마스터는 답했다.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죠."

[아무튼, 술집]은 술을 즐겁게, 남을 해치지 않고 마시는 사람들 특유의 너그러움과 동지애, 교감이 넘치는 17개의 에세이들과 그보다 많은 술집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프롤로그/에필로그 포함) 저도 단골집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이런 술집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내는 거야. 이게 다 실화야?' 부러워지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김혜경 작가 본인이 멋진 술꾼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겠죠. 괜히 한 잔 더 하고 싶어져서 이게 몸에 좋은 책이라고 권해드리기는 뭣하지만, 마음은 확실히 흠뻑, 기분좋게 젖어드는 책입니다.
 
"집에 없던 엄마도 술집에서 찾았다. "엄마!"하고 부르면 '너랑나랑호프'의 권복자 씨가 다가와 안아준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꾸만 고맙다고 한다. 내가 한 거라곤 고작 먹고 마신 것뿐인 데. 칼칼한 갓김치에 돌돌 만 뜨끈한 육전과 길쭉하고 말랑한 떡이 들어간 국물떡볶이와 바삭바삭한 가자미 튀김 같은 것들을 오물오물 받아먹고, 목 막힐세라 500cc 생맥주에 소주를 양껏 넣어 입안을 적신 것밖에 한 게 없는데.
권복자 씨는 매번 취기로 뜨끈뜨끈해진 내 몸보다 더 따뜻한 품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그 집에서라면 '너 키워준 값 해'라는 뒤틀린 보상 심리 따위에 응답할 필요 없이 내가 먹고 마신 값만 정확히 지불하면 되었고, 그 값은 자주 찾는 단골손님에 대한 애정과 서비스로 더 크게 돌려받곤 했다. 너랑나랑호프에 있으면 너랑 나랑만 있어도 충분한 게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년 동안 불이 꺼져 있었을 이 모든 근사한 술집들이 모두 무사히 이번주에 돌아왔기를 바라면서 즐겁게 읽었습니다. 술집을 즐겨찾는 분이든, 커피하우스나 스무디가게를 더 좋아하는 분이든, 좋아하는 그 가게에서 느긋하게 즐기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북적북적 함께 해주시면 참 기쁠 것 같습니다.

*제철소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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