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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남성들이여, 이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세요"

그사람 오한숙희

1. 7년 전 제주도에 왔다. 처음부터 한반도 남쪽 끝 이 섬이 자신의 최후의 거점이 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잠시 쉬러 왔을 뿐이었다. 몇 달 지내다 보니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한라산에 기대어 살고 싶어졌다. 전국을 돌며 몸이 불편한 둘째와 같이 살 만한 곳을 고르던 참이었는데 제주라면 살 수 있겠다 싶었다. 육지에서는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가 살 만한 곳을 찾기 힘들었다.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했다. 이제 세상의 모든 불의와 부조리를 적으로 돌려세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이런 것이 나이가 주는 지혜로움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평생 해왔던 이 세상의 고정관념, 편견과의 싸움을 멈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주를 근거지로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싸움을, 그러나 고요하게 벌이는 중이다. 이 사람에게는 지나온 63년 인생과 인생의 남은 시간을 모두 건 싸움이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올레길을 걷고 오름을 오르는 것으로 저항한다.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춤추는 것으로 싸운다. 이런 방식으로 버티면서 하루가 가고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십 년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버티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도 정의가 현실이 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배웠다. 인간의 역사는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신의 큰 뜻에 따라 흘러왔다는 것을 이제는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숙희라는 원래 이름에 어머니 성을 한 자 더해서 몇 년 전부터 오한숙희라고 쓴다. 서너 달 치 강연 일정이 늘 잡혀 있었고 한때는 일주일에 4개의 고정 칼럼을 쓰고 방송을 안 하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전국을 돌며 3천500번이 넘는 강연을 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강연을 하고 그날 다시 김포공항으로 되돌아와서 곧바로 광주에 가 강연을 하는 식의 일정도 허다했다.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었다. 13권의 책을 통해 1990년대와 2000년 초반 여성학이란 다소 낯선 말을 대중에게 전파한 시대의 아이콘 같은 사람이다. 하도 말을 많이 해서 턱관절 보호대를 착용한 적도 있다는 전설 같은 일화도 있다.

남으로는 푸른 바다, 북으로는 흰구름 걸린 한라산이 보이는 서귀포 한 카페에서 이 사람을 마주보고 앉았는데 찬란한 햇빛 때문일까, 보는 이의 눈이 시었다. 머리에는 살짝 서리가 내렸고 얼굴이 다소 야윈 듯했지만 목소리는 귀에 익은 그대로였다.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낯설지 않았다. 전투란 전투는 모두 경험한 백전노장 같으려니 했는데 삶에 달관한 것인지 아니면 포기한 것인지 구분하기 힘든 표정으로 사람을 맞았다.

그사람 오한숙희

2. 일본 유학을 다녀온 아버지는 이북 출신 실향민이었다. 역시 실향민인 어머니를 만나 인천에 둥지를 틀었다. 평생 당신 이름이 적힌 문패 달린 집을 가져보지 못한 가난한 가장이었지만 딸의 생각을 존중해주는 아빠였다. 추첨으로 배정된 사립고등학교는 군인 출신 이사장이 전제군주로 군림하는 학교였다.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영어 교사가 3번이나 바뀌었고 자격과 자질이 의심스러운 선생에게 학교 폭력을 경험했고 수시로 사역에 동원되었다. 그런 학교는 더 이상 못 다니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딸의 의견을 존중해줬다. 그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말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소녀였고 말의 힘도 일찍 깨우쳤다. 자신의 생각을 야무지고 조리 있게 표현하는 것은 타고난 재주였다. 아버지가 고1 때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넉넉하지 않은 가세가 더욱 기울었다. 46살에 홀로 된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 가난의 쓴물이 매일 입안에 고이는 삶이었다.

두 언니는 가정 형편을 고려해서 여상에 진학했다. 이 사람도 대학에 다닐 처지가 아니었고 주변에서도 은근히 언니들의 길을 가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배움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1979년 이화여대에 입학한 이후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다. 학생운동에 관심이 있었지만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은 당장 학비를 벌고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마음의 빚 때문에 평생 사회운동을 해왔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중견기업 홍보실에 들어갔다. 1년의 직장생활은 여중, 여고, 여대를 나온 이 사람에게 난생처음 맛보는 차별의 시간이었다. 이 차별의 뿌리를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여성학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되었다.

19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거대 담론의 시대가 저물었다. 그 빈자리에 개인의 삶과 일상성에 주목하는 담론이 우후죽순처럼 피어났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주변부 취급을 받던 여성학에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미디어에서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으려는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KBS <생방송 여성>이었다. 1990년 12월 박사 학위도 없는 시간강사였던 만 31살의 이 사람이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발탁되었다. 말 그대로 파격이었다. '빽도 없고 미모도 없고 별다른 스펙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다른 프로그램 패널로 서너 번 출연한 이 사람의 가능성을 여성들로 구성된 눈 밝은 제작진이 간파한 것이다.

"그 시대가 이런 프로그램을 필요로 해서 만들어졌고 저는 거기에 도구로 쓰인 거죠.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공공재라고 생각했어요"

<생방송 여성>은 한국판 오프라 윈프리 쇼였다. 진행자의 색깔이 진하게 묻어나는 오숙희에 의한 오숙희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2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오면 친구들에게 장장 4부작으로 개작해 이야기를 풀어내던 재능이 방송에서 만개했다. 듣는 사람이 거부감을 갖지 않도록 말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부드럽게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핵심을 짚고 정리하는 능력도 발군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재능과 열정 하나로 단박에 방송가의 스타가 되었다. 아직도 공항이나 터미널 식당에 가면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다. 그때 자기들 이야기를 너무 속 시원하게 대신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다.

"수더분한 동네 아줌마 인상, 그러니까 그전에는 방송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듣보잡의 낯선 캐릭터인데 그게 사람들한테 엄청 친근한 거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우리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네들이 느끼고 있었지만 잘 표현하기는 어려웠던 것을 자기들의 언어로 가려운 데 긁어주듯 이야기할 때 시원함을 느끼신 거 같아요"

임신 9개월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을 만큼 애정과 열정을 쏟았던 이 프로그램에서 2년 만에 스스로 하차했다. 1992년 이혼을 했는데 자신의 가정사로 프로그램에 폐를 끼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 개인적인 문제로 이 프로그램이 폄훼되고 훼손되는 거예요. '거 봐라 여자가 나서서 진보적인 이야기를 하면 가정이 깨진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계속 내가 이 프로를 맡는 것이 긍정적이지 않겠다 싶었어요. 그때만 해도 방송국 안에서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강하기도 했어요"

그사람 오한숙희

3. 말만 하면 신이 났고 말을 할 수 없으면 병이 났다. 스스로 말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고 자신은 여성학, 여성운동이라는 '현대판 굿마당'에 선 말(言)무당이라고 했다. 전국 곳곳에서 이 사람을 찾았고 부르는 자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말을 잘하기도 했지만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최고 강연료를 받는 '고수익 강연'은 물론이고 여성 노동자 모임, 여성 농민회, 시민단체, 여성단체, 학생들이 부르는 '운동권 강연' 자리도 사양하지 않았다. 그런 자리에서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여성학이라는 말이 이 사람을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었고 이 사람의 입을 통해 여성운동이 그 영역을 넓혀갔다.

-부드럽게 말씀하셨지만 1990년대의 대표적인 여성운동 논객이셨지요?
"그렇게 부드럽게 말한 것은 아니었어요. 엄청 과격하고 열정적이고 그래서 남자들과 많이 부딪혔어요"

최근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분석은 예리했고 해법은 명쾌했다. 전문가는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시끄럽다, 여자들은 별거 아닌 것으로 사회 이슈를 만든다, 여자들이 너무 부글부글 끓는다라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남성들도 자신들의 이슈를 만들어나가야 된다고 했다.

"여자들은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계속 의제를 만들어가면서 공동체적인 삶을 사는 거죠. 그런 거에 비해서 남자들은 너무 개별화되어 있어요. 저는 한국 남자들이 너무 참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남성들은 '너희는 그런 것을 당했다고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유형의 억압과 희롱과 모욕 다 당해. 그런 게 사회야', 그렇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다 참고 가만히 있는 거잖아요. 저는 공격의 화살이 여성으로 향할 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이야기로 가야 한다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힘들어도 참고 있어. 그러니 너희도 참고 가만히 있어…. 너희가 너무 시끄러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회의 발전과 진화를 놓고 볼 때 안 맞는 거죠."

남성들이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기들의 어려움을 해소하지 말고 여성들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남성들에게도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제 남성학과 남성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남자들이 어떤 어려움과 삶의 애환과 고충을 갖고 있는지 우리 사회가 알아야 하거든요. 한국 사회가 남자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참아라. 남자 말 많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하면 쪼잔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대장부 콤플렉스도 많이 심어줬잖아요. 이제 그런 것에서 벗어나서 남성들이 자기들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래야만 여성들의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어요."

백 명의 여성이 있으면 백 개의 페미니즘이 있다고 했고 그게 맞다고 했다. 이제는 남녀 간 차이보다 세대별 차이가 더 큰 거 같다는 말도 했다. "너 이거 받아들여야 돼, 이러이러하니 내가 맞고 너는 틀려"가 아니라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네, 그래 그거는 나도 이해가 돼"라는 반응을 끌어내야 된다고 했다. 이런 말은 요즘 페미니즘을 주장하고 있는 후배 여성 운동가들에게 주는 조언처럼 들렸다. 젊었을 때는 장애물이 있으면 정으로 깨부수어버리거나 포클레인으로 들어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인데 이제는 내가 이해하고 내가 받아들인 것만큼만 가볍게 얹어보자고 말한다. 오한숙희라는 사람이 순해진 거 같다고 했더니 나이가 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그사람 오한숙희

4. 40대 중반까지 방송 출연료, 강연 수익으로 풍족하게 돈을 벌었다고 했다. 책을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니 이에 따른 수입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번 돈으로 경기도 김포에 제법 큰 집을 지었지만 현재 재산은 별로 많지 않는 듯하다. 재테크와는 거리가 멀었다.

"제가 보험을 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집을 사고팔아 돈을 번 것도 없고 주식을 하지도 않았어요. 재테크라는 것을 하나도 안 했어요. 김포에 있는 집도 절반이 빚이에요. 저 집 담보를 잡아 그걸로 생활하고 있는데 집 팔리면 정리할 생각이에요. 저는 죽을 때 집도 없고 크게 남길 재산도 없었으면 딱 맞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18살부터 돈을 벌어온 이 사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적 독립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돈이 좋다>라는 제목의 책도 쓴 적이 있지만 돈 때문에 아무 일이나 하지는 않았다. 약이나 보험 광고 제안은 거절했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이야기를 남에게 할 수는 없다는 거였다. 거액을 제시한 홈쇼핑 채널 출연도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저는 제가 이미지를 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이 시대를 같이 공감하고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가 체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고 사람들이 그거에 공감하고 그런 가운데 서로를 기억하게 된 거잖아요. 그렇게 생긴 제 이미지를 팔아서 돈을 벌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어요."

장애가 있는 아이를 생각하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에 딱 부러지게 그렇지 않다고 했다.

"저는 그거에 대해 생각이 좀 달라요. 저는 돈을 물려주면 안 되고 사람을 물려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많은 부모가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죠. 아이가 직업을 갖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주거를 해결해줘야 하니까 돈을 남겨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사람은 기본적으로 공동체가 있어야 산다고 믿어요. (…) 등산을 할 때 자기 배낭 자기가 메고 자기 발로 가는데 혼자 걸으면 완주를 못 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걸으면 굉장히 풍족하고 만족스럽게 걸어요. 저는 제 아이에게도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주고 싶은 거예요."

정치권에서 몇 번 영입 제안을 받았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대중들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틈만 나면 정치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던 사람이다. 2011년 문재인 지지세력 모임에서 사회를 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정치를 잘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다.

청중들의 열화와 같은 환호가 늘 함께할 거 같은 사람이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 이 사람 강연을 보면 그런 반응은 보기 힘들다. 찾는 사람들도 줄었고 이 사람 강연 동영상 조회 수는 기대에 못 미친다. 조심스럽게 전성기가 지났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지난 지 오래됐다고 했다. 자신은 방송인이 아니라 시대를 호흡하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길을 제안하는 운동가적인 지식인의 길을 걷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인으로 수명을 연장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방송은 마약 같은 것이다. 자신에게 쏟아지던 화려한 조명을 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전혀 중독되지 않았어요. 사람들이 저를 길에서 알아보고 그래도 저기 TV에 나온 누가 간다가 아니라 '그때 그 이야기 너무 잘 들었어요. 그때 너무 힘들었는데 당신의 이야기가 힘이 됐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니까 우리는 방송이라는 매개를 통해 알게 된 동지 같은 것이지 연예인으로 대상화되어 이미지가 소비되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방송에 안 나가서 섭섭하다든지,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아서 우울하다든지, 내 정체성이 흔들린다든지, 날 알아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인생이 허무하다든지, 재미가 없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이 사람 입담이면 요즘 유행하는 예능프로그램에서도 충분히 통할 거 같은데 편집에서 살아남자고 애쓰는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유튜브를 해도 잘할 사람 같은데 유튜브도 하지 않는다. 내가 방송에 나가고 그래야 책도 팔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자신이 이건 아닌데 싶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은 면도 있다고 했다. 사회적인 일을 놓고 나니 여백이 생기면서 그 여백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바라보는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불안도 있고 우울도 있고 걱정도 있다고 했다. 방송을 하지 않고 강연 요청이 줄어든다고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냐고 했다. 가난하게 살았던 경험이 있어 자신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노라는 말을 담담하게 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이 사람을 찾는 곳과 사람들이 있다. 그런 곳에서 강연도 하고 사회도 보면서 은행 이자 낼 정도 돈은 번다고 했다.

서귀포JDC글로벌아카데미 강연 당시 오숙희

5. 둘째 딸 희나 양은 자폐라고 불리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양치를 도와줘야 하고 누군가 항상 곁에 있어야 한다. 몇 년 전 장애를 가진 자식은 엄마가 올인할 때 좋아진다는 세상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제주도에 오기 전 아이를 데리고 6개월 동안 둘만 지냈다. 둘만의 생활은 이 사람의 완패였다. 2014년 봄 피로에 완전히 절었다. 바늘 하나도 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이와 둘만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이 숨을 쉴 틈이 없다는 뜻이었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었고 우울증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말하는 일과 글 쓰는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자 마음의 병은 물론 육체의 병이 따라왔다. 잘 달리던 마라토너가 페이스를 잃어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올스톱 되었다. 제주도에 내려온 것이 이 무렵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데리고 도시에서는 자유롭게 나갈 수도 없고 경쟁할 수도 없다. 자신들은 경쟁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탈 수도 없고 올라타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데리고 도시에서는 할 게 없어요. 김포 우리 집에 뒷산이 있었는데 도로가 났어요. 그러니까 장애가 있는 아이와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기는 올레가 만들어져 있어서 자연 속을 걸으면 돼요. 그럼 하루가 물 흐르듯 가요. 다시 육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천하의 오한숙희가 밀리고 밀려 한반도 남쪽 맨 끝까지 온 거 같다고 했더니 그 표현도 맞다고 했다.

"(저와 제 가족은) 도시에서 정착해서 재미를 못 본 거죠. 그러니까 한반도 남쪽 끝에 내몰려졌다는 말도 맞는 거야. 육지에서 살 만하면 여기에 왔겠어요."

타인과의 공감 능력, 사회성이 부족한 자기 아이가 하는 일을 보면 세상일 가운데 이해되지 않는 일이란 없다. 세상과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다. 자신은 출생부터 마이너리티라고 했다. 단 한 번도 메이저인 적이 없다고 했다. 부모는 남한에 뿌리가 없는 실향민이었고 셋방살이를 전전했고 맏이도 아니고 막내였다. 여자고 이혼녀고 장애를 가진 아이의 엄마이니 마이너리티의 조건을 완전히 갖춘 셈이다.

"내가 마이너리티였는데 이제 메이저가 되었다는 착각, 허영심, 허위의식 없이 그냥 내가 살아가는 삶인 거고, 그런 삶 속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되면 좋은 거고, 같이 갈 사람들 만들면 좋은 거고. 마이너리티 감수성은 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거고 그런 것을 가지고 살아갈 때 삶은 오히려 안정된다는 거죠. 자신의 실존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소수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세상에 소수자 아닌 사람이 없었고 소수자들의 가능성이 새롭게 보였다. 제주도에 정착하기로 한 것은 제주의 올레길과 오름과 푸른 하늘과 바다 때문만은 아니다. 제주에 와서 새삼 둘째 딸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아이'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예술을 통해 느리지만 남들과 소통할 수 있고 자연과 어울릴 수 있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 딸 같은 '특이한 개성'을 가진 사람들, 한국의 말과 문화가 여전히 낯선 결혼 이주 여성, 자신의 몸을 움직이기 힘든 시니어들이 제주라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서로 돕고 함께 지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2018년 '사단법인 누구나'를 만들었다. 노인, 발달장애인, 결혼 이주 여성들이 예술로 소통하고 예술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단체의 설립 목적이다. 이 사람들도 자기의 삶을 재미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뭐가 있지 않을까 싶어 만들었다. 자신의 신용으로 빌릴 수 있는 최대한의 돈을 대출받아 사무실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장소를 빌렸다. 2년 동안 운영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사무실을 집으로 옮겼다. 활동이 줄어드니 외부 지원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내심 초조할 수 있겠다 싶은데 그렇지 않단다.

"예전 같으면 몇 년 계획을 세워서 1차 연도에는 이 정도로 업그레이드하고 2차 연도에는 이 정도 성장을 하고 그런 계획을 세웠는데 지금은 그런 거 하나도 없이 어쨌든 10년간 꾸준히 한다. 여기 있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꾸준히 대신 힘 빼지 말고 길게 가자는 생각으로 야금야금하고 있어요. SNS상에서 우리 이런 거 합니다 알리기보다는 그냥 좀 침묵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가 용기를 잃지 않으면 이 일은 잘될 수밖에 없다라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죠."

깃발을 들긴 했지만 이 공동체를 크게 키울 생각은 없다고 했다. 이걸 키우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서 후원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필요한 사람은 오라는 것이고 돕겠다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이 즐겁게 할 수 있을 만큼만 도우라고 한다.

그사람 오한숙희

6. 꾸준하게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실험을 해온 사람이다. 언니, 조카 같은 혈연의 가족들과는 물론 친구들, 지인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공동 육아를 시도했고 어머니가 없는 한부모 가족과 자신의 가족이 함께 사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을 꾸린 적도 있다. 혈연, 가족으로만 구성된 공동체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라는 생각은 오래된 소신이다.

-공동체 실험 가운데 실패로 끝난 것도 있지 않나요?
"저는 그게 성공과 실패로 갈릴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꾸준히 진행되는 거죠. '나 어떤 공동체를 만들 거야' 그래서 만들려고 노력했다가 그게 이루어지지 않거나, 이뤄졌다가 빨리 깨졌구나 이런 개념이 아니라 인생을 혼자 살 수 없으니까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야 되니까 내가 갖고 있지만 어떤 사람이 없는 것을 서로 나누며 사는 것이 공동체죠…. 공동체에 대한 실험을 한다기 보다 인생 자체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거니까 끊임없이 공동체적 지향성을 가지고 굴러가는 거죠."

지금 하고 있는 '사단법인 누구나' 역시 또 하나의 공동체 실험이다.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사람 시선이 훨씬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의 어려움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것은 달라지지 않은 점이다. 이 사람의 싸움은 몇 년 안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라 몇 세대에 걸친 장기전이고 이 땅의 모든 소수자들이 함께 하는 싸움이 될 거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세대가 떠나면 젊은 세대가 와서 같이 돌보다가 그 세대가 떠나면 다른 세대가 또 올 거고… 장애 있는 사람은 계속 태어날 거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겠다는 사람들도 계속 태어날 거다. 이들이 같이 살 수 있는 어떤 모델이나 판을 만들어 놓으면 그 안에서 둥글게 둥글게 같이 살다가 한세상 가는 거죠."

<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지렁이>라는 제목의 이 사람 글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글이다. 지렁이를 무서워하고 미워하다가 지렁이에 대해 알고 나면서 그 무서움과 미움을 극복해나가는 이야기다. 알려고 하기도 전에 판단하는 것, 낯선 것에 대한 고정관념, 선입견이 주는 폐해를 지적하는 글이다. 둘째 딸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1년 365일 어떻게 저런 애랑 같이 한 집에 살 수 있었을까. 그것도 30년 넘게' 제 친구들은 다 저를 측은하게 여겨요. 끝나지 않는 육아, 죽어서 눈을 감아도 안심할 수 없는 육아가 너에게 숙제로 남겨졌구나.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말이 전부는 아닌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아이가 장애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해요. 그런데 장애가 있는 엄마들 만나면 세상에 속지 말라고 해요."

남들은 장애라고 하지만 이 사람에게 자폐는 개성이다. 아이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이 아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이다. 소통에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방법이 특이하고 때로 시간이 걸리지만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특이한 개성을 이 사회가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을 만나면 꼭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단정하고 단언하는 것, 그 말에 우리가 속지 말아야 된다. 엄마들에게 속지 말라고 해요. 의사가 뭐라고 하든 그 말에 속지 말아라. 사람들이 장애 가진 아이랑 힘들지 않을까 한다고 해서 '나는 힘들어'라고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아라, 그거 지는 거다."

둘째 때문에 배운 것이 많고 느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혼자 살았다면 내가 더 행복했을까.

"단순히 지금이 좋다고 생각해야지 하는 자기 최면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무게를 재봐도 힘들지만, 결코 녹록한 삶이었다고 할 수 없지만, 이 삶에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고 이 과정에서 내가 훨씬 사는 것처럼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숙희의 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지렁이」가 수록되어 있는 책 표지

7. 용기, 희망, 긍정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수면 센서가 고장 난 지 오래되었고 졸립지가 않고 늘 긴장하며 산다. 주기적으로 우울증과 피로감, 두려움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도 했다. 장애가 있는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제약도 만만치 않다. 이 사람이 2016년 쓴 <사는 게 참 좋다>라는 책이 필자의 눈에는 <사는 게 참 힘들었다>라는 말로 읽히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다.

"30-40대 생각했던 행복과 60대에 이른 제가 생각하는 행복은 다른 거 같아요. 그때도 행복했지만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해요. 이 상태에서 행복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가끔 내가 나약하다고 느껴짐으로 인해서 주변에 대한 감사를 하게 돼요. 내가 이렇게 부족하고 약한데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주변에 대한 감사를 하게 돼요."

예전에는 냉면 위에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계란이나 음식의 고명 같은 존재였다면 이제는 녹아들어서 바탕이 되는 육수 같은 존재, 수많은 면발 중의 한 오라기 면으로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 이야기를 마치면서 혹시 꼭 하고 싶었는데 묻지 않아서 못한 말이 있으면 해달라고 했더니 그런 거 없단다.

"이제는 어떤 의도도 갖지 않게 돼요. 예전 방송할 때는 뭐가 더 있었으면 좋았을 걸,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마음 때문에 방송이 끝나면 잠을 못 잤어요. 지금 돌아보면 다 욕심이었구나 싶어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내가 살아온 만큼 준비된 만큼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만큼 말 잘하는 사람을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적절히 섞어서 이야기했고 말을 늘일 대목과 줄일 대목이 어디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머리에서 정리된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는 말이었다. 한때는 수다가 최고의 무기였던 사람이고 수다의 명예 회복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많은 것을 내려놓고 많은 것을 포기한 이 사람의 생각은 달관과 체념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도 싶었는데 분명한 것은 이 사람의 시선이 아득히 먼 곳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을 억세게 붙잡고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폭소가 터지거나 흥이 넘치는 자리는 아니었고 때로는 화제가 무겁다 생각했는데 3시간 남짓한 시간이 한순간에 지나갔다.

이야기하는 도중 이 사람 손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볕에 그을린 듯한 그 손은 노동하는 사람의 손처럼 보였다. 햇볕 아래서 밭일이라도 했나 싶어서 한번 만져보자고 했다. 호미 쥐고 낫 쥔 손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둘째 아이가 잠을 잘 자지 못할 때마다 오일로 등과 발을 마사지해준다고 했다. 어느 정도 했길래 저렇게 손에 오일이 밸 수 있을까. 오일이 밴 엄마 손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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