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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탈레반 집권 후 학교 문 닫아…한국은 아이들의 희망"

아프간인 국내 구출 작전 ① 진천 체류 아프간인 A 씨 인터뷰

[취재파일] "탈레반 집권 후 학교 문 닫아…한국은 아이들의 희망"
바그람 한국병원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아프가니스탄인 A 씨는 지난 26일 가족 5명과 함께 한국에 온 이후 진천 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A 씨는 비록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격리 생활 중임에도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좋다",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며 "한국에 감사하다"는 말을 수십 번 했습니다.

A 씨는 원래 탈레반이 재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프간 수도 카불과 인근 지역의 집을 소유한 중산층의 가장이었습니다. 하지만, 탈레반의 카불 장악 직후 A 씨는 집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놔두고 한국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탈레반의 살해 위협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A 씨는 "제가 카불에 있었을 때, 이미 탈레반은 우리 집을 찾고 있었다"며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국 우리 가족을 찾아내 살해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피해 온 이곳 한국은 A 씨와 그 가족들에게 새로운 삶의 터가 됐습니다.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한 뒤 13살과 7살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이제는 A 씨 자녀들 모두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됐습니다. A 씨는 "아이들이 지금 안전한 곳에 와있고, 앞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특히 아이들에게 한국은 희망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A 씨와 어제(29일) 화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전문입니다.
 

아프간 특별입국자 인터뷰

Q. 안녕하세요. 한국에 무사히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먼저 자기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A.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A(가명)입니다. 저는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한국병원에서 2010년부터 2015년까지 근무했습니다. 당시 저는 의사와 간호사들, 그리고 나토에서 온 동료들이 수많은 아프간인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때, 통역을 도맡았습니다. 그러다 바그람 한국병원이 문을 닫게 되면서, 저는 민간 병원에서 통역 일을 계속했습니다.

아프간 바그람 한국병원

Q. 가족들을 데리고 한국에 오기까지 험난하고 많은 과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A. 네,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하기 전, 전국의 많은 지역을 점령해가던 시기에 모두가 탈레반의 복수를 두려워했습니다. 저와 제 가족 역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하려 했습니다. 그동안 아프가니스탄에는 국제사회를 돕고, 평화로운 아프간 재건을 도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탈레반이 모든 지역을 장악한다면, 한국 정부와 함께 일한 저를 포함해 다른 나라 정부를 도운 모두를 죽일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동료들과 회의를 시작했고, 주아프가니스탄 한국대사관에 연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대사관과 회의를 통해 우리의 우려를 공유했고, 한국대사관은 우리의 우려를 한국 정부에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2주 후, 한국대사관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단, 당시에 아무도 그렇게 빨리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을 때 예상하지 못 했던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한국대사관도 그동안 추진하던 비행 일정을 당시 보안 상황과 탈레반의 카불 장악으로 인해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우린 많은 실질적인 어려움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일단 카불공항에 도착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 때 정말 너무나 고마운, 김일응 공사참사관이 저희에게 크나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방법과 공항에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조율 중이라고 알려왔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한 번 시도해봤지만, 카불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김일응 공사참사관이 카불에서 우리를 태우고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몇 대의 버스를 제공했습니다. 그 작전은 다행히 성공했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정말 그 당시에는 난관이 너무 많았습니다. 탈레반이 우리 집을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소를 숨기기 위해 (전산상에 기록된) 주소를 바꾸기도 했습니다. 아이들도 너무 무서워했습니다. 항상 울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우리가 이 나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나갈지 막막했습니다.

총격 속 구출작전

Q. A 씨 동료분 중에 탈레반에 의해 부상을 입은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A. 네, 그 사람은 B(가명)입니다. 그는 한국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습니다. 우리가 대피하는 동안 그가 살던 마을에서 총격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바그람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탈레반이 너무 많이 포진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많은 탈레반들이 그가 운영하는 진료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서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B 씨는 "나는 탁자 뒤에 숨어 있었다. 머리에 총알 두세 발이 스쳐 지나갔지만 다행히도 나는 살았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총알은 머리의 표면만 스쳐 지나갔습니다.

Q. 그분도 한국에 왔습니까?
A. 아뇨. 불행히도 그는 우리와 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한국대사관에서 그에게 여행증명서도 제공했지만, 탈레반이 장악한 마을에 갇혀버렸습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그에게 "이번이 정말 마지막 탈출 기회다"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그는 "미안하다. 지금 내 상황은 마을을 떠날 수가 없다. 탈레반이 마을 거리와 내 집 앞에 있어서 밖에 나갈 수가 없다. 설령 내가 나간다고 해도 '이 많은 자녀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이 마을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불행하게도 우리와 한국행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Q. 탈레반이 장악하기 전 아프간에서의 당신의 삶은 어땠습니까?
A. 좋았습니다. 저는 바그람 한국병원이 문을 닫은 후로는 다른 여러 병원에서 일하며 급여도 괜찮게 받았습니다. 은행에도 저축해뒀고, 집도 2채를 갖고 있었습니다. 카불 외곽에 있던 집에는 정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오면서 저는 이 모든 것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행에 있던 제 재산도 갑자기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인출할 수 없게 됐습니다. 모든 은행이 문을 닫았고, 현금인출기엔 현금이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800만 원가량 든 카드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탈출 과정에서 400만 원 정도에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집을 떠났고, 두 집에 있는 집기와 장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돌봐줄 사람도, 팔아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매입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제 주변의 사람들도 자신이 살아가며 일궈왔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웃 국가인 타지키스탄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파키스탄으로, 이란으로 건너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프간에서는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Q.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당신이 일군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한국에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A.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탈레반에게서 탈출한 것입니다. 우리 가족과 아프간 국민들, 특히 연합군이나 외국 정부와 일을 하던 많은 아프간인들은 모두 같은 걱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탈레반의 보복을 두려워했습니다. 탈레반이 우리를 죽일 것이 자명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카불에 있었을 때, 그들은 우리 집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탈레반은 누가 외국으로 도망갔는지, 그리고 외국 정부와 일한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아프간 경찰이나 연합군과 함께 일했던 이들이 누군지가 적힌 몇 가지 문서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 특히 아이들은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했을 때 너무 무서워했습니다. 우리는 만약 한국에 오지 못했다면, 그들이 우리를 찾아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찾아낸 후 죽였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요청을 수락해준 한국 동료들, 한국 정부에게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들 덕분에 이곳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Q. 카불공항의 애비게이트라는 곳에서 며칠 전 이슬람국가 IS의 자폭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습니다. 그곳도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려 방문했던 곳이었다면서요?
A. 네, 처음에는 제가 가족들과 함께 그쪽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카불공항이 너무 많이 붐볐기 때문에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탈레반은 계속 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그날 날씨도 매우 더웠는데, 제게는 태어난 지 한 달이 된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생아를 포함해 아이 넷과 함께 애비게이트로 공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그날 공항 진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김일응 외교부 공사참사관과 통화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버스를 제공했고, 그 버스 옵션이 최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버스를 타고 공항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아프간 특별입국자의 생후 1개월 아들

Q. 버스를 무사히 타긴 했지만, 버스를 타고 공항 안으로 진입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무려 15시간이나 에어컨 없고, 창문을 열 수 없는 버스 안에서 갇혀있다시피 했다면서요?
A. 맞습니다. 버스 안은 정말 더웠고, 아이들이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타기 위해 우리 버스를 공격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탄 버스가 공항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강제로 버스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버스 창문조차 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강제로 들어오려 했기 때문입니다.

Q. 탈레반도 버스가 공항에 도착했을 때 진입이 안 된다고 저지했던 것으로 압니다. 그 순간은 어땠습니까?
A. 네, 탈레반은 처음에 우리가 탄 버스를 향해 공항에 들어올 수 없다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김일응 공사참사관에게 연락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기다리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 문제를 처리할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말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이후 탈레반이 다시 와서 우리 버스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공항 정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그들은 우리를 정문 안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했고, 다행히 우린 공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김일응 공사참사관은 정말 우리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은 분입니다. 전 그가 우리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최고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모든 가족들이 걱정 속에 많은 질문을 하면, 그는 하나도 빠짐없이 답을 해줬습니다. 잠도 자지 않으면서요. 그가 그렇게 최선을 다했고, 우리는 그만큼 그를 신뢰했기에 결국 이렇게 올 수 있었습니다.

김일응 아프가니스탄 주재 한국대사관 공사참사관

Q. 탈레반이 재집권에 성공한 결정적인 요인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A. 약한 정부의 약한 통치력, 그리고 파키스탄의 탈레반 지원이 카불 함락의 요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 탈레반은 그 누구에게도 복수하지 않겠다며 사면권과 여성의 권리 증진 등을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습니까?
A. 믿지 않습니다. 탈레반은 카불 장악 이후 2주일간, 이미 아프가니스탄 여러 지역의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칸다하르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그들은 여성 권리를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게 하고, 사무실에도 일하러 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여성이 일하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탈레반을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집권했던 시기에 너무나 나쁜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카불공항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출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게 바로 아프간 국민들이 탈레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아프간 국민들은 탈레반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신뢰하지 않습니다.

Q. 탈레반이 앞으로도 계속 아프간을 통치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A. 그렇게 생각하지만, 우린 그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테러리스트와 같습니다. 그들은 상식과 국제법을 믿지 않습니다.

Q. 다른 나라로 도피한 가니 대통령은 아프간 국민들에게 어떤 인물입니까?

다른 나라로 도망간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

A. 그는 더이상 우리 대통령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 대통령으로 불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이미 그가 원하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이 모든 혼란, 이 모든 문제는 그 사람 때문입니다. 그는 너무 빨리 도망쳤습니다. 아프간인들과 아무런 조정도 없이 도망쳤습니다. 갑자기 그는 우리 정부로부터, 우리의 모든 시스템으로부터 도피했습니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이 불분명해졌고, 사람들은 갑자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했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그 사람 때문이고, 우리는 그런 상황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슬픕니다. 그가 우리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Q. 진천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습니다. 현재 진천에 머물고 계시는데, 어떠신가요?
A. 네, 좋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한국 국민과 한국 정부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안전하게 도착했고, 그리고 카불공항은 물론 인천공항에서도 한국군과 공항에서의 여러 분들에게, 그리고 진천의 여러분들께도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너무나 행복합니다. 모든 것이 훌륭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Q. 식사는 어떠신가요?
A. 좋습니다. 제 아이들과 가족들에게는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전 아주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여기 계신 분들이 우리에게 할랄 음식(이슬람교도인 무슬림들이 먹을 수 있는, '허용된 음식')을 주십니다. 정말 특별한 음식을 제공해줍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아프간 특별입국자에게 제공된 할랄 음식

Q. 함께 온 가족들은 어떻게 되시나요?
A. 막내는 태어난 지 한 달 됐고요. 다른 아이들은 4살, 7살, 13살입니다. 그리고 아내도 함께 왔습니다.

Q. 생활하시는 데 불편한 점은 없나요?
A.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것이 훌륭합니다. 우리는 너무 행복합니다. 여기 같은 건물에 동료들도 있는데요. 그들도 너무 행복하고, 정말 감사해하고, 한국 정부, 한국 국민들에게 정말 감사해합니다.

특히 진천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분들은 여기에서 저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우린 여기에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진천 인재개발원으로 들어가는 아프간인 태운 버스 (사진=연합뉴스)

Q. 한국 정부는 국내 이송 아프간인분들이 한국에 안정적으로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출입국관리법을 개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한국에 계속 머물고 싶으신가요?
A. 아시다시피,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프간에서 한국인들과 정말 긴밀하게 일하며 협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을 제2의 고향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한국이 제2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머물고 싶습니다.

Q. 당신의 자녀들도 한국에 온 것을 좋아하나요?
A. 물론입니다. 특히 13살과 7살 된 딸은 탈레반을 너무 무서워했습니다.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한 날부터 두 딸은 학교는커녕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계속 울었습니다. 탈레반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무섭다고 너무 두려워하더군요. 그러다 아이들이 한국에 오자, 일단 안심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자신들이 안전한 곳에 있다고, 다시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학교에 가고 싶어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희망이 없었지만, 여기에서는 희망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Q. 한국 국민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실까요?
A. 어떻게 이 감사함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의 도움이 아프간인들에 대한 역사적인 지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역사적 지원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희도 정의롭게 살아가면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함께 인류애와 우정을 말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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