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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길, 책을 만나다⑤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봉화 세평하늘길

- '인생이란…진부하지만 느긋하고 너그러운 것'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산과 산 사이, 강을 건너 철길이 이어진다.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흔히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을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이라고 한다. 머리로 쌓은 지식이 가슴에 생각으로 담기기까지의 여정이 그렇게나 멀고도 어렵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생각조차도 머리로 한다고 믿지만, 생각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하는 것이라는 통찰이기도 하다. 신영복은 그의 책 <담론>에서 '생각은 가슴으로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고, 내가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면서,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라고 했었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애정과 공감이라는 말이다.

지식이 가슴으로 와서 생각이 되었거든, 그 다음에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가 가야 할 마지막 여정이다. 우리가 발로 딛고 서 있는 그곳에서 실천하라는 말이다. 실천을 통해 변화를 도모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조금은 늦은 나이에 부족한 재능을 탓하며 나름 글밭에다 무언가를 심어보고자 애쓰는 이유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배우고 익히면 익힐수록 스스로의 부족함에 안타까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쩔 때는 눈물 나게 아쉽고, 뒤늦은 회한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게 아는 것이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은 늘 스스로를 다그치지만, 그 강박이 실천으로 향하는 길은 아슴아슴 가도 가도 아득히 멀기만 하다.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세상살이 안에서 헤매는 많은 머리들 역시 발은 고사하고 가슴까지 가는 것만도 멀고도 먼 여행이다. 대체로 어설픈 '먹물'들이란 머리를 떠난 지식이 가슴에 미처 닿기도 전에 입으로 다 쏟아내고 마는 족속이라, 숙성과 발효가 생략된 채 해독되지 않은 풋과일 같은 날것들만 세상에다 뱉어내니, 포용과 참여, 그리고 사랑의 언어가 아닌 혐오와 갈등, 그리고 차별의 언어가 난무하는 중이다.

하지만 어쩌랴. 혹여 발이나마 열심히 움직이다 보면 발에서 가슴으로 가는 역순환의 문고리라도 하나 잡을 수 있지나 않을까. 얄팍한 욕심이, 기어이 어디론가 몸을 떠민다. 그러니, 또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여행길에는 동행들도 있으니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도 더러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길 위에서 열정과 자유를 찾아 세상을 떠돌던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도반을 만날 수도 있을는지....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라 하니 믿어볼 일이다.

세평하늘길 2
떠나면 그곳에 인연이 있다.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세평하늘길>을 걸었다.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여 보이는 하늘이라고는 겨우 3평(坪)밖에 되지 않는다 하여 붙은 이름이 '세평'. 은유적 표현이긴 하지만 그만큼 첩첩산중 오지라는 말이다. 그 오지의 길이 경북 봉화에 있다.

세평하늘길은 분천역에서 시작해 양원역을 거쳐 승부역으로 이어지는 총 길이 12km 남짓의 길로, 길옆으로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해 안동호로 흘러드는 시원한 낙동강 줄기가 동행한다. 그래서 세평하늘길은 낙동강의 물길과 영동선 철길을 따라 걷는 느림의 길이기도 하다.

이번 도보여행은 분천역을 출발하는 대신,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의 오리숲다리를 기점으로 회룡천을 따라 걷다가, 구암사를 지나 산길을 걸어 양원역으로 향하는 코스를 선택했다. 산길과 물길을 두루 걸어보자는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다.

길을 나서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야생화다. 사람의 미소야 원래 꽃보다 아름다운 것이라 하지만, 꽃의 미소도 그에 못지않다. 단색의 땅을 밝히는 화려한 그들의 색감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면서 여행자에게는 청량제다. 애기똥풀이며, 지칭개, 구슬붕이, 참꽃마리, 돌단풍, 그리고 이름 모를 꽃들까지 그야말로 꽃천지다.

울진군 금강송면을 지나온 회룡천은 황악산(820m)과 진조산(912m) 사이로 흐르는 계곡이면서 개천이다. 높은 산을 지나는 계곡인 만큼 물살은 거칠고 풍경은 아기자기하다. 걸으면 걸을수록 선계를 찾아나서는 길인 양 자꾸만 멈춰 서 경치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흔해진다. 구암사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이다.

여름날에 산길을 걷노라면 무엇보다 압도하는 푸른 신록에 마음마저 푸르러지는 때가 여럿이다. 따가운 빛살마저도 어쩌지 못하는 푸른 차양은 몸도 마음도 서늘하게 껴안는다. 그러니 풀빛 그늘을 두르며, 그저 묵묵히 걸을 갈 수밖에... 게다가 전대미문의 방역상황은 누구에게나 묵언이 당연하니 이런저런 자연의 소리만이 또렷하다. 그저 보고 듣고,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면 충분한 것을... 무어라 주저리주저리 떠들 것인가.

그런데 푸르름에 지쳤음인가. 지난 겨울이 힘겨웠던 솔방울 하나... 아스라이 매달려 있다. 나무의 몸통을 뚫고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제 혼자 푸르름을 마다하고 메마른 모양이 나름 사연 하나쯤은 간직한 모습이다.

세평하늘길 4
푸르름을 마다하고 메마른 모양이 사연 하나쯤은 간직한 듯하다.

삶의 진실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가끔 길을 걷다보면 안다는 것의 무상함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그 안다는 것이 삶의 경험 속에서 체화된 그 무엇이라기보다는 어느 책에선가 본, 또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주워들은 어설픈 지식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앎이 무어라고 그토록 목소리 높여 떠들었던지 새삼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쉽사리 깨닫고 실천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또 부끄러워진다.

그리스에 <조르바>라는 사람이 있었다.

조르바는 산전수전 다 겪은 60대의 중늙은이로, 책 나부랭이나 끌어안고 머리를 싸매는 그의 젊은 고용인(조르바는 고용인을 두목이라고 부른다.)이자 소설 속 화자(話者)인 그를 비웃는다. 책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 실상 살아가는데 그리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두목, 내 생각을 말씀드리겠는데, 부디 화는 내지 마시오.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 놓고 불이나 확 싸질러 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숲의 그늘 저 편 강이 있다. 낙동강이다.

실상 조르바가 지적하는 것은 책 자체라기보다는, 책 안의 텍스트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채 글자를 신봉하는 소위 책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의 경직성을 탓하는 것이리라. 두루 책을 읽되, 책 밖으로 나아가는 사고의 전환과 용기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자구(字句)에 얽매여 삶 속에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덜떨어진 행동들이 비웃음의 대상이다. 그리고 제가 읽은 몇 권의 책이 세상의 전부인 양 젠 체하는 어리석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조르바에게 책이란 자유와 열정을 제한하는 물건일 뿐이다. 그저 책이란 이익에 따라 이리저리 계산하게 하는 물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계산하기 시작할 때 그곳에는 열정도 자유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조르바의 생각이다. 고개를 들고 바다를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여자를 봐야 할 때에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무언가를 한 후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따지는 이해와 이익의 공간에 자유와 열정은 들어설 틈이 없고, 그러니 행복은 오매불망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조르바에게 책이란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또 진지하고 무거우면서도, 정작 삶과 죽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니 그저 머리만 아프게 하는 쓸모없는 물건일 뿐이다. 그러니 불을 싸지르는 것이 백번 지당한 일이었다.

일례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면서도 우물쭈물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조르바의 속에서는 천불이 난다. 어떻게 저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또 얼마나 어이없고 볼썽사나운 짓거리란 말인가. 마음이 가는대로, 진실하게, 그렇게 손 내밀어 위로하고 위로받고 행복하면 될 것을, 옳으니 그르니 따지는 먹물들의 형태란 것이 여간 가소롭고 짜증스러운 게 아닌 것이다. 삶의 진실은, 또 행복은, 머리가 아닌 가슴 속에서 움트는 것임에도 그걸 모르고 공자왈 맹자왈 하고 있으니 조르바의 눈에는 그것이 미치도록 안타까울 따름이다.

조르바는 소설 속 인물이면서, 실존 인물이다. 그래서 소설의 화자(話者)이자 작가인 주인공은 조르바와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 목말라 하던 삶의 방식인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구가하는 삶에 눈을 뜬다. 그래서 <그리스인 조르바>는 소설이면서 한 편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가 조르바를 통해 배운 것은 '열정'과 '자유', 그리고 '행복한 삶'이다.

세평하늘길 7
어디론가 떠나고픈 이들을 위해 철길은 흘러간다.

'양원역'
최초의 민자(民資)역사

산길을 지나자 낙동강이 여행자를 반긴다. 강에는 다리였는지, 철길이었는지 상판을 잃어버린 교각만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날 생이별을 하지 않았나 싶다. 오래된 마을의 오래된 풍경이다.

드디어 철길이 보이고, 저 멀리 빨갛게 치장한 기차 한 대가 플랫폼에 멈춰서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자(民資)역사'라는 자부심이 깃든 양원역이다.

경북 봉화읍내에서 한참이나 먼 곳인 이곳 원곡마을은 원래 화전민의 땅이었다. 그러니 척박하고 가난한 곳이었다. 산지뿐인 곳이라 논을 개간하지 못해 밭에서 나는 콩이나 옥수수를 갈아서 끼니로 삼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한 많은 사연이 산자락 강굽이에 길이길이 묻혔구나' 탄식이 절로 나는 첩첩산중 오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이곳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고 또 운명이라 여기며 이 땅에서 뿌리박고 살았다. 그런데 그곳에 역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어렵게... 사연은 이렇다.

빨갛게 치장한 기차 한 대가 플랫폼에 멈춰서 있다.

마을 앞을 영동선(개통 당시에는 영암선) 기차는 매일매일 다니는데, 그놈의 기차를 타려면 6, 7km 떨어진 분천역엘 가거나, 승부역으로 가야만했던 것이다. 산을 넘지 않으면 역으로 가는 길은 철길뿐이었으니 기차를 타려면 목숨을 걸고 철길을 걸어갔더란다. 그것도 터널 안이나 철교 위에서 기차를 만나면 영화에서 보듯 철로 사이에 납작 엎드리거나 그도 아니면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야 하는 위험천만의 상황도 수십 번... 영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 외치던 그 철길처럼 말이다. 그 철길을 학교 가는 아이들은 매일 매일을 걸어 다녀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집집마다 철길에서 다치거나 죽은 이들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사리 기차를 타고 도회지를 다녀오거나 봉화 춘양장이라도 다녀오면 이번에 이런 저런 짐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원곡마을 주민들은 기차가 마을 앞을 지날 즈음 창문 밖으로 자신들의 짐을 던졌다고 한다. 그렇게 승부역에서 돌아올 적에는 빈손으로 와서 그곳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짐을 찾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지기 쉬운 물건이 든 보따리는 던지지도 못하고 그 짐을 이고 지고 6km 남짓의 철길을 걸어 집으로 와야 했으니, 그 세월이 어언 30여년이었다.

참다못한 주민들이 청와대에 편지를 넣었다. 마침 '보통사람'의 시대라는 구호가 한창인 때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 마을에도 정차역을 만들어달라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편지에 담아 보냈더니, 답신이 왔더란다. 그때가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였다. 이후 철도청과의 협의 과정에서 잠깐 정차는 가능하나 예산상 역사는 힘들다는 말에 주민들이 나섰다.

당시 마을에 한 대 뿐인 경운기를 풀가동해 온 마을 사람들이 흙과 돌을 이고 지고 날라서 플랫폼을 고르고 벽돌을 쌓아 대합실을 지었으니,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자역사라 하는 것이다. 그 지난한 시간에 대한 보상일까? 지금은 눈꽃열차와 협곡열차로 관광객이 몰리면서 양원역은 이제 모든 열차가 쉬어가는 역이 되었다. '양원'이라는 이름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봉화 소천면과 울진 금강송면의 두 원곡마을을 아우르기 위해 지어진 지명이다

양원역 근방의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기차를 마주보며 먹는 노천 식당은 더운 날씨임에도 여유가 있었고, 특히 알프스 소녀 하이디 복장의 젊은 주인장은 귀여우면서도 친절했다. 물론 국밥도 맛있었다. 아마도 알프스 복장은 비동승강장에서 양원역에 이르는 세평하늘길 2코스의 이름이 '체르마트길(2.2km)'이어서인 듯싶다. 알프스 산악열차로 유명한 알프스 체르마트역과 분천역이 자매결연을 맺은 계기로 체르마트길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철길과 물길 사이, 그 틈으로 사람들이 걷는다.

물길 따라
흐르는 철길

양원역에서부터 승부역까지는 세평하늘길의 1코스, '낙동강비경길(5.6km)'이다. 이름 그대로 세평하늘길에서 가장 풍경이 수려한 곳이다. 철길과 강은 원래부터 친한 동무였던 양 나란히 이어지고, 철길과 강 사이 그 좁은 틈으로 사람들이 걷는다. 낙동강 비경길은 오로지 두 발로 낙동강 상류의 속살을 파고드는 여정으로, V 자형의 협곡 물길을 따라 영동선 열차와 동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태백의 함백산을 떠난 물길이 흘러 이곳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태백에서 부산까지의 여정은 장장 525㎞. 그 중 봉화군을 흐르는 구간은 86.8㎞로, 낙동강의 상류인 탓에 강이라기보다는 계곡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러니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더해져 비경은 사방에 늘려 있다.

양원역을 떠난 길은 영동선 철로를 따라 난 시멘트 포장길을 걷다가 강바닥으로 내려서서 자갈길과 바윗길을 따른다. 협곡 양편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인 뼝대와 곧게 뻗은 금강송들, 그리고 굽이쳐 흐르는 강물에 자꾸만 마음을 빼앗긴다. 옥색 빛을 띠는 강물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아 손이라도 담그면, 걷는 내내 따라다니던 더위마저도 슬그머니 물러난다.

저 멀리 기차가 지나간다.

특별할 것도 없는 마냥 보던 기차이건만 여기에서 만나는 기차는 느낌이 다르다. 왠지 손을 흔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어릴 적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시골 신작로를 걷다가 버스라도 한 대 지나갈라치면 하염없이 손을 흔들던 그 시절로 돌아간 양 기차가 마냥 반갑다. 아마도 오래 전 추억 같은 철길과 풍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차가 터널로 사라질 즈음 철길과 동행하던 길은 강둑의 숲길로 들어선다.

기차가 지나간다. 나도 따라 가고파진다.

자유(自由)란
욕심내지 않는 것

물길을 따라 무심히 걷다가 그저 이곳, 저 물가에서 물장구나 치면서 마냥 머물면 어떨까 하는 욕심이 생긴다. 제 속을 훤히 드러내는 강물의 천진함이 자꾸만 손을 잡아끈 탓이다. 꼬임에 넘어가 물가에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는 산들이며 강인 듯 계곡인지 경계조차 모호한 물길을 바라보노라면 조르바가 그랬듯, 이 모든 풍경이 기적인 듯 여겨지기도 한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렇게 얼굴을 내미느뇨, 감탄은 자동이다.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조르바가 그렇듯 세상 굽이굽이마다 기적이 숨어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기적을 기적이라 알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같은 어리석음이 기적조차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건만 그걸 알지 못하고 이 순간, 이 풍경을 허투루 여긴 게 아닌가 싶다. 기적이 그렇듯, 삶의 행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르바에게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일을 할 땐 일을 하고, 키스를 할 땐 키스를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이 그가 사는 방식이다. 그 최선의 순간에 그의 열정이 샘솟는다. 그가 결혼할 목적으로 모은 돈을 몽땅 털어 산 산투르(*줄이 100개라는 이란의 전통 현악기)를 연주할 때도 그렇다. 연주를 할 때면 산투르 외의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그는, 그것을 열정이라 부른다. 그리고 열정을 쏟아 부을 때, 그는 자유롭다. 또 어쩌면 자유롭기 때문에 열정이 솟아났을 것이다.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떠나고 싶을 때 떠나라.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그에게 자유는 인간과 동격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산투르를 연주할 때도 그렇다.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누군가의 강요나 요구로 산투르를 연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산투르 역시 살아있는 짐승이고, 짐승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자유의지' 말이다. 그리고 그에게 자유는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얽매이지 않는 방법은 욕심내지 않는 것. 그리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조르바는 학교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했지만, 육십 평생 만고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노하우가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관조와 배려, 그리고 원시적 배짱이다. 무엇이 두려우랴. 욕심내지 않으니 비굴할 이유조차 없고, 단순하게 사니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인데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에게 행복이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들이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곤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라는 사실을 조르바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르바에게는 그 어떤 어려움에도 주저치 않는 대담함이 있었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흔히 배웠다는 사람들이 이런저런 주판알을 튕기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하려고 뜸을 들일 때, 조르바는 '숫자 놀이는 그만두고 저울은 부숴 버리고, 구멍가게는 문을 닫아 버리라'고 일갈한다. 가슴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는 말이다. 결과를 애써 예측하려하지 말고 단순하게 살라는, 그래서 영혼을 구원하라고는 말이다.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켜가고 있는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 같은 책 나부랭이에서 벗어나 심장이 펄떡이는 대지 위를 걸으며 살아있는 인간과 더불어 살라는 충고이기도 하다.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조르바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말을 계속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낸 나뭇조각도 성물(聖物)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세평하늘길 12
강과 벼랑 사이에 길이 걸려 있다.

물의 결이 주는
맑고 투명한 소리
흘러온 삶과 흘러간 생을 본다

졸졸졸 물소리를 좇느라면 물을 품었던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이제부터는 산허리를 타고 돌아가는 나무데크 길이다. 험한 벼랑 위에 길이 살강같이 매달려 있다. 살강 위 보리밥을 훔쳐 먹던 도둑고양이마냥 살금살금 걷노라면, 그래! 이 풍경을 보려고 이곳엘 왔구나, 탄성이 절로 인다. 기차만이 들락거리던 오지의 숲과 강이 내 발 아래에 있음이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그저 아득하고 또 포근하다. 첩첩의 산중에 둘러싸인 강을 따라 걷는 순간순간이 꿈결인 양 몽롱해진다. 저 멀리 강 위를 지나는 철길에 기차라도 지나가며 기적소리라도 울려 이 고요함을 깨뜨려주면 좋으련만, 발길이 드문 철길인 탓에 기차는 기척도 없다. 그저 묵묵히 걸어가기만 할 뿐, 이곳에서 무슨 말을 주저리주저리 내뱉는단 말인가. 사람의 소리는 그저 소음일 뿐이다. 멀리 어느 산자락에서 뻐꾸기가 운다.

하지만, 소음은 널려 있으니 그중 가장 큰 소음이 사진이다.

길을 걷다 보면 경치를 보고 음미하기 보다는 사진을 찍기 위해 온 것인 양 부산스런 모습과 마주할 때가 더러 있다. 그야말로 만인이 영상기록자 시대인 탓이다. 그것도 조용히 아름다운 풍경을 담기만 하면 충분할 것을 주인공은 언제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듯 길을 막고, 사진을 찍어줄 누군가를 부르고, 셀카봉에 매달린 스마트폰을 향해 웃는 그들이 많아도 너무 많은 것이다. 산 정상에라도 올라가면 정상 표지석 앞은 인증샷을 남기려는 이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뭐 그럴 수 있다고 이해는 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눈으로 기억하고 마음에 담는 법을 잃어버린 것 같은 아쉬움 말이다. 단 1분만이라도 멈춰 서 대상을 바라보며 느낌을 깨닫고, 감동을 저장하는 시간 정도는 스스로를 위한 배려라 해도 좋을 터이지만 흔한 모습은 아니다. 그저 찍고 또 찍는다. 여유와 멈춤이라는 이곳에 있는 이유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모습이 아쉬운 것이다. 그것이 동행에 대한 배려이기도 한데도 말이다.

산과 강을 건너 기차는 승부역을 가고 철암역을 간다.

강심을 딛고 선 다리가 굳건한 철길이 산허리를 붙들고 아스라이 매달려 있다. 아무도 없는 곳, 산짐승들만 오가던 그곳에 철길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철길 아래의 물길은 산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양 저 혼자 바쁘다.

데크를 벗어난 길을 물길을 따라 걷는다. 세평하늘길 12경 중 3경이라는 관람담(觀瀾潭)의 표지판 글이 마음에 와 닿는다. 하기야 이곳 물가에 머물며 물길의 흐름을 찬찬히 새기노라면 새 한 마리 하늘로 솟아오르듯 감성도, 풍류도 저 하늘 너머로 날아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 포말을 안은 물결은 숨을 돌리고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를 다듬는다. 하늘을 담고 구름을 품은 바람을 타고 흘러온 물결의 푸른 심연을 본다. 물의 결이 주는 맑고 투명한 소리의 향연을 잠시 곁에 두고 흘러온 삶과 흘러간 생을 본다." - <관람담 표지판의 글>

길은 숲길과 물길로 번갈아 이어진다.

물에 빠져도 숲은 푸르다.
철길에는 기차가 있어야 모양이 난다.

머리로 사는 삶의
무의미함과 건조함

산과 산 사이, 계곡을 가로지르며 기차가 간다. 하매 만날까 목 빼고 기다리던 친구를 만난 냥 반갑다. 아무래도 철길에는 기차가 있어야 그림 상으로도 모양이 난다. 기차가 풍경의 화룡점정이었던 셈이다. 일행들 역시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다. 중년을 지나는 이들이니 기차를 품은 추억 하나쯤은 아마도 당연할 것이다. 첫사랑과의 첫 여행이 기차여행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가슴 떨리던 행복감은 사랑에 목말라 하던 그 시절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목이 메게 그립고 눈빛 하나, 손짓 하나에도 설레던 그 시절...

그리스인 조르바의 삶의 목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살아가는 목적은 다름 아닌 쾌락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삶의 세파에 깎이고 무너졌던 가여운 여인들에게 조르바는 마지막 구원자임을 기꺼이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조르바에게 여자는 그가 한없이 기쁘게 해주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사랑할 수밖에...

그래서 그는 가여운 여인을 보면 참지 못한다. 물론 소설이 나온 지 70년이 되어 가는지라 그의 연애 방식이나 말투는 고전적이고 지금에 와서는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할 만큼 마초적인 부분도 더러 있지만, 진정성만큼은 갑이다. 두목과 마을의 과부가 서로 끌리면서도 진전이 없자 두목을 채근하는 조르바의 성화는 나름 진지하다.
"...... 웃지 말아요, 두목. 여자가 혼자 잔다면 그건 우리 남정네들의 잘못이에요. 우리는 최후의 심판 날에 우리가 한 짓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가 얼마 전에 서로 얘기했다시피 하느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여자를 혼자 자게 한) 그 죄만큼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말은 투박하지만 내가 외롭지 않아야 하고, 또 상대를 외롭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지론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랑마저도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거래의 대상이 되고 만 오늘날이지만, 그래도 사랑은 심장의 뜨거운 속삭임에 대한 응답이어야 한다는 조르바의 당부는 순정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러한 열정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비록 덧없다할지라도 그나마 영원성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 말고 또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

세평하늘길 15
순정은 강물처럼 흐르고, 그 흐름 속에 자유가 있다.

우리가 삶의 노정에서 나날의 걱정으로 길을 잃을 때, 구원의 문은 우리 스스로 열어젖혀야 한다. 우리를 대신해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삶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조르바는 묻는다. 머리로 사는 삶의 무의미함과 건조함이 조르바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이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가슴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머리로? 웃기는 소리 말라고 조르바는 다그친다.

가슴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조르바에게 삶은 자유 그 자체다. 마음이, 가슴이 이끄는 대로 가는 것, 그것이 자유이기 때문이다. 관념의 벽을 허물고, 도덕의 담장을 뛰어넘을 때 그곳에 조르바의 자유가 있다. 열정 안에 스스로를 남김없이 던져 넣을 수 있을 때, 운명에게 제 자신을 순순히 맡길 수 있을 때라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강가에는 이런 저런 바위들이 제각각의 이름을 달고 서 있다. 구암바위, 은병대, 연인봉... 그 바위 틈새에는 또 각각의 생명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바위든 꽃이든 사람이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가 없다. 각자만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팠던 시인은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외로움에 움직이지 않고(......)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어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유치환,<바위>)' 가 되고 싶다고 하질 않았던가.

세평하늘길 16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인지는 알 수가 없다. 꽃이 제 사는 이유를 꼭 알아야 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 멀리 승부역이 보인다. 역 구내에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1962년부터 19년 동안 이곳에서 근무한 한 역무원이 쓴 글로, 승부역의 상징이라 할 만한 글이다. 세평하늘길의 이름도 이 시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이라고 할 만큼 오지 중의 오지인 승부역은 국내 기차역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역이다. 가을과 겨울에는 승부역에 환상선 단풍열차와 눈꽃열차가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이제는 기차를 타고 분천역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오른 기차는 보는 것만으로도 정겹다. 역시나 기차는 무궁화호가 제 맛이다. KTX를 타는 것 하고는 또 다르다. 지나는 풍경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속도의 차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작 12km 남짓의 거리이니만큼 그 시간마저도 잘디잘게 쪼개 촌음을 아껴 보고 싶은 마음과 어서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어찌 같을 수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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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왔던 그 길이 창밖으로 흐른다.

느리지만 빠르게 산과 산 사이, 강물 위를 기차가 달린다. 창밖으로 지나온 길들이 뒷걸음질을 치며 아는 체를 한다. 저 길을 걸어 왔구나. 저 강과 저 계곡을 지나 승부역으로 갔었구나. 뒤늦은 복기가 요란하다. 더러는 감탄사라는 추임새까지 보태지니 시끄러워지는 건 당연하다.

그래! 이것이 자유였던 것을... 일상의 자잘한 걱정근심일랑 내팽겨 두고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멈춤과 쉼이 필요할 때 떠날 수 있다는 것. 떠날 수 있으면 자유다. 그리고 떠남은 열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정답이다. 유희를 모르는 인간이 어찌 행복한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위에 노는 놈 있다'고 하질 않던가. 노는 방법이이야 백인백색이겠으나 이유불문, 놀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인간(Homo Sapiens)'이라는 굴레에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제는 좀 놀아도 될 듯싶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당연히 자유다. 자유로움이다. 조르바가 성화를 대던 '조바심의 줄'을 과감히 놓고, '바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면 조르바를 통해 사고의 도약을 이뤘다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직접 쓴 묘비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길을 가고 다리를 건너면 그곳에 걷는 이유야 널려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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