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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세월과 동행하며 성장한 '낭만가객'

최백호 그사람 인터뷰

1. 이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고 이 사람만이 전달할 수 있는 정서가 있다. '국보'라는 한 동료 가수의 평은 다소 과할지 모르지만 득음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다. 노래를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서 가슴속에 뭔가가 들어있지 않고는 이런 노래가 나올 수 없다는 한 네티즌의 촌평이야 말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세 시간이 넘는 이 사람과의 인터뷰는 이 사람 가슴속에 있는 그 '뭔가'의 정체를 찾는 과정이었다.

나이 드는 것이 쇠퇴가 아니라는 것, 나이 드는 일이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 명인이 되는데 반드시 시간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사람, 가수 최백호 이야기이다. 이 사람은 예전보다 지금 노래를 더 잘한다. 훨씬 더 잘 부른다! 고음이 더 올라가고 중저음은 더 풍부해졌다. 나이 들면 목소리도 늙는다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나이 들어 목소리가 더 청청하다.

"예전에는 D-로 부르던 노래를 이제는 한 키 반을 높여서 부릅니다. 젊었을 때 고음이 잘 올라간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점점 퇴보하는데 저는 예전에 고음을 그렇게 안 썼기 때문에 서서히 올라가는 단계예요. 언젠가는 퇴보하겠죠. 그런데 지금은 올라가는 단계입니다."

장이 탈이 나 며칠 새 체중이 많이 빠졌다고 했다. 인터뷰하던 날 코로나 2차 접종을 했다.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키 170cm에 체중은 60kg 남짓인데 생각보다 작게 느껴졌다. 목소리를 아껴가며 말하는 듯했고, 손동작이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몸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웠다. 처음 본 사람을 탐색하는 듯한 눈빛이 깊고 맑았다.

1950년생. 우리 나이로 일흔두 살, 이 사람에게 덕담이랍시고 '여전히 현역이시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실례도 큰 실례다. 가수 인생 45년 중에서 지금이 최고 전성기이다. 가수로서 쉼 없이 곡을 만들고 무대에 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에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종종 이 사람을 볼 수 있다. 유튜버로서 활동 폭을 넓혀가고 있고 13년째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김호중을 비롯한 후배 가수들이 이 사람을 롤모델로 삼고, 함께 작업을 하고 싶은 선배 가수 가운데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원로 연예인들을 꾸준히 돕고 후배 가수들과 협업 작업도 쉬지 않는다. 지난해 그만 두기는 했지만 서울음악창작소를 맡아 운영하며 행정가, 관리자로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지금이야말로 이 사람의 화양연화 시절이다.

최백호 '길 위에서' 뮤직비디오 중

2. 매일 두 시간 정도 집에서 노래 연습을 한다. 이 사람 목청으로 노래 연습을 하면 이웃 사람들에게 폐가 되겠구나 싶었는데 작은 목소리로 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연습이 될까 싶은데 된단다.

-연습이라기보다는 그냥 노래를 하시는 거네요?
"물론 남의 노래를 부를 때 익히기 위해서 연습할 때도 있지만, 제 노래는 연습이라기보다 제가 제 노래를 좋아하니까 즐기는 기분으로 합니다."

득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이 목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한 결과는 아니다. 득음의 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어느 날 그저 소리를 크게 지르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제대로 음악 공부를 한 적이 없다. 엄청나게 노래 연습을 하지도 않는다. 문학 공부를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시 같은 가사를 쓰고 장르를 넘나들며 곡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노래를 남들은 흉내내기도 어렵게 절창으로 뽑아낸다. 학습이나 노력의 대가는 아니다. 달리 말하면 타고난 재능이다. 사자후를 토해내며 부산 영도에서 유권자들을 사로잡았던 아버지의 목청을 물려받았고 문학을 좋아하고 시를 쓰던 어머니에게 가사를 쓰는 재주를 물려받은 것 같다고 했다.

"조금 건방진 이야기지만 목소리는 타고나는 거 같습니다. 발음이나 호흡을 통해 조금 나아질 수는 있지만 A급 가수들은 목소리를 타고난 겁니다. 제가 보기에 그건 연습으로 안 됩니다."

-최백호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노래가 분명히 있는 거 같습니다.
"저는 송창식 씨나 조용필 씨를 참 좋아하는데 그분들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내면에 쌓여 왔던 많은 이야기들이 노래로 섞여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노래 자체가 그 사람 인생이기 때문에 그걸 흉내내기는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저한테도 그런 면이 조금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사람에게서 그런 게 나와요…그런 끼라는 게 그냥 부모님에게서 받은 게 아니라 뭔가 자라면서 형성된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요."

-그럼 선생님에게도 상실, 좌절, 패배 이런 것들이 있습니까.
"저도 어릴 때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님이 시골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전근을 다니시고, 저도 따라서 옮겨 다니고…저희 집안에 특이한 분위기의 흐름이 있었어요. 그걸 겪으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제 노래 속에도 자라온 환경이 배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노래를 다른 사람이 똑같이 부르긴 힘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수 최백호 씨의 아버지

3. 아버지 최원봉은 1950년 치러진 2대 총선에서 28살 나이에 부산 영도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청년 정치인이었다. 이 사람이 태어난 지 불과 다섯 달 만에 아버지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었다. 아버지는 권력에 날을 세우던 청년 정치인이었고 그 시절은 암살과 테러가 빈번하던 때였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아들에게 오래도록 나침반이자 기둥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아버지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썼다. 사실 아버지를 빼면 이 사람에게 자랑할 것이 없기도 했다. 돌도 되기 전에 죽은 아버지가 기억에 남아있을 리 없는데 이 사람에게 아버지의 이미지는 살아있는 것처럼 선명하다.

"아버님이 키가 크고 장대하셨습니다. 아버님이 제게는 굉장히 큰 존재로 각인되어 있어서 '이 분은 돌아가시지 않았다. 드라마나 소설처럼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고 언젠가는 나타나실 거다'라는 생각을 오래도록 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는 말을 들었고, 이 사람은 아비 잡아먹은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다. 부자였던 할아버지, 친가 식구들과 사실상 절연하고 지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철들기 전부터 이 사람이 보고 듣고 겪었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이 사람에게 끼친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다. 20대에 청상이 된 어머니와 두 명의 누나, 그리고 이 사람에게 고난과 시련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가난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봉급으로 삼 남매 키우는 게 무척 힘들었던 모양이다.

가수 최백호 씨의 어머니

"어릴 때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습니다. 어머님이 항상 돈을 빌리러 다니시던 기억이 있고 (옷을 살 형편이 안돼) 재봉틀을 빌려 저희들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돌아가시기 전에는 교사를 그만두시고 장사를 할까 하셨는데 어머니는 장사와는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입시에 거푸 떨어졌다. 미대 지망생이었지만 재수 중에 어머니가 타계하는 바람에 대학 문턱을 넘지 못했다. 대학 대신 군대를 갔지만 그 마저도 결핵에 걸려 1년 만에 조기 제대했다. 군에서 나온 이후 갈 곳이 없었다. 건강은 좋지 않았고, 할 줄 아는 것이 없었고, 가진 것도 당연히 없었다. 이 친구 저 친구 집을 떠돌다 우연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기타를 가지고 놀긴 했지만 자신이 가수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이십 대의 나이에 남편을 잃고 삼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만 했던 어머니는 마흔여덟의 나이, 가을이 깊어 가던 때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어머니를 그리며 쓴 사모곡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라는 노래다.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이었던 이 노래로 대중들에게 이름이 알려질 때까지 20대의 6-7년에 걸친 무명 시절에 대해 이 사람은 짧게 '어려웠던 시절'이라고만 이야기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에서 느껴지는 짙은 우수와 애상, 고독의 정서가 그 시절 삶을 짐작케 해준다.

최백호 '길 위에서' 뮤직비디오 중

4.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1976년 말이니 벌써 45년 전 이야기다. 그 뒤에 '입영전야', '뛰어', '영일만 친구' 같은 노래 등을 내놓긴 했지만 한결 같이 스타의 길을 가던 사람은 아니었다. 잊혀진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활동이 활발했던 것도 아니다. 지금처럼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로 꼽혔던 것도 아니었다. 암울한 시대에 대한 반감이 강했지만 저항 가요를 만들고 부르던 사람도 아니었다. 1995년 만든 '낭만에 대하여'가 뒤늦게 알려지기 전까지 15년 동안 그는 긴 슬럼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아픈 경험을 겪었고 야심 차게 만든 앨범들은 대중들에게 외면 받았다. 서울로, 부산으로, 미국으로 떠돌던 시절이었다.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찾는 사람은 더 없었고 오라는 곳도, 갈 곳도 별로 없었다. 생계를 위해 밤무대에 서야 했고 그 일이 지긋지긋했다. 가수라는 일 자체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 시절을 꼼꼼하게 회고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대범하게 한 호흡으로 그 시절을 건너뛰는 것도 아니다. 80년대와 90년대 중반까지 시간은 잊을 수는 없고 돌아보자니 고통스런 시절인 모양이다.

1996년 앨범을 낸 지 1년 반이 되도록 별 반응이 없던 <낭만에 대하여>는 김수현이 드라마에 사용하면서 대박이 났다. 이 곡이 이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김수현 작가 때문에 그 노래가 알려졌죠. 그때 잠깐 뵙고 고맙다고 인사를 드린 적 있어요. '아 그래, 그 노래 직접 만들었어요?'라고만 하시더라고요. 강부자 선생님이 연결해 주셔서 한 달 전쯤 두 분 모시고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모신 것은 처음입니다. 정말 제게는 큰 은인이시다, 고맙다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첫사랑 그 소녀도 어디선가 저렇게 나이 들어가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 노래로 '낭만'이라는 단어는 이 사람 차지가 되었다. 오래도록 자신을 괴롭혔던 경제적 어려움을 떨쳐낼 수 있었고 무명 아닌 무명의 설움도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 무렵 가수라는 일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최백호 그사람 인터뷰

"가수는 평생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누구 아들인데 하는 생각 때문에 노래하는 일 자체를 하대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구나 하는 것을 깨우쳤어요. 그때부터 노래를 제대로 해야겠다.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덤볐어요. 그런 자세로 하니까 결과가 좋았어요. 그 전에 제가 앨범을 20장 이상 만들었는데 알려진 게 거의 없어요. 묻힌 게 많아요."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이 사람 노래에는 유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사랑 타령도 그리 많지 않다. 인생과 철학을 말하는 수단이 음악이라고 믿는다.

"제가 만든 노래는 제 이야깁니다. 거짓말이 안 들어있죠. 제가 경험했던 이야기고 제가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이 자리도 마찬가집니다만 제 이야기를 하는데 거짓말을 말할 수는 없죠… 마흔 중반이 넘어서 '낭만에 대하여'를 만들었습니다. 그건 30대에 만들 수 없는 노래죠. 그래서 저는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료 가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담담하다. 경쟁심도 없고 우월감을 드러내지도 않고 그들을 부러워하지도 않는다. 저들은 저들의 성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성이 있다는 것, 누구의 성이 더 크고 높은 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고 말할 때 이 사람에게서 대가의 여유가 느껴졌다.

-나훈아, 송창식, 조용필, 김민기, 이장희 같은 동년배 가수들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저는 정말 없습니다. 제 생활 모토 중에 하나가 '3등이 편하다, 1등과 2등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게 최고다'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는 톱 가수상을 받아보지도 못했지만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매니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정말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고 그분들 라이벌이 되지도 못하고 그분들과 경쟁한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나훈아에 대해서는 한 때 같은 소속사였다는 인연을 짧게 말했고 조용필은 말을 나눠본 적도 없다고 했다. 송창식에 대한 이야기는 길었다. 송창식 이야말로 천재라고 했다. 송창식 말고는 인정할 사람이 없다는 말로도 들렸다.

"송창식 선배를 정말 좋아합니다. 무명 시절에 송창식 선배 노래를 부르면서 지냈기 때문에…그분은 별로 저를 좋아하지 않는 거 같습니다. 제가 좋은 곡 좀 달라고 해도 안 주시는 거 보니까(웃음)… 창식이 형보다 더 좋은 노래를 만들어보자는 욕심은 있었습니다. '영일만 친구'는 '고래사냥'을, '입영전야'도 송창식 선배의 '왜 불러'를 의식하고 쓴 곡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송창식 선배가 쓴 '우리는'이란 노래 듣고 이거 안 되겠구나 싶었고 '사랑이야' 듣고는 좌절했습니다. 그리고 포기했습니다."

2008년부터 13년째 SBS <최백호의 낭만시대>를 진행하고 있다. 밤 10시부터 2시간 동안 일주일에 닷새 생방송을 하면서 청취자들의 사연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그 시간대 라디오 방송을 듣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이 사람도 세상의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주로 듣는다. 그들에게 몇 마디 말과 음악으로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 보람을 삼는다. 최근까지 적게는 스무 곡에서 많게는 스물 다섯 곡에 이르는 음악을 매일 직접 고르고 방송 순서까지 직접 정했다. 곡의 선정과 배치를 두고 담당 PD와 갈등도 많았지만 내가 하는 방송에서 아무 음악이나 틀 수 없다는 이 사람 고집을 이긴 PD는 없었다.

"사람에 대해서는 따뜻하신데 음악을 보는 눈은 정말로 엄격하세요. 체력적인 부담 때문에 얼마 전부터 제게 선곡권을 넘겨주셨지만 수준 낮은 음악, 저급한 음악은 안 된다는 철학은 확고하세요. 그런 음악 골랐다가는 지금도 용서를 안 하세요."/ 이정은 <최백호 낭만시대> 담당 PD

남녀 가수의 비율을 가급적 반반으로 맞춰 교대로 틀고 청취자의 사연과 성별까지 고려해 음악을 고르는 일이란 머리가 터지는 고역일 텐데 그 일을 이 사람은 10년 넘게 남에게 넘기지 않았다. <최백호의 낭만시대> 클로징 음악은 가요 명인들의 노래만을 튼다는 불문율이 있다. 물론 이 사람이 만든 불문율인데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나오는 노래는 최백호가 인정한 명곡인 셈이다.

5.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있는 한국음악창작소를 2015년 1월부터 2020년 6월까지 운영했다. 마포구청이 제공한 장소에 문화체육관광부 예산 35억 원을 지원받아 젊은 대중 음악인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다. 무명 가수들에게 무대를 제공하고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주는 이곳에, 뮤직과 저항이라는 뜻의 레지스땅스라는 말을 더한 뮤지스땅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평생 이렇다 할 명함이 없던 이 사람이 처음으로 한 기관의 책임을 맡아서 애정과 열정을 기울인 곳이었다. 구 마포문화원을 개조해 만든 이 곳의 외벽 장식부터 인테리어 자재 하나까지 이 사람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라고는 평생 할 줄 모르던 이 사람이 예산을 따내기 위해 세종시로, 여의도로 관료들과 정치인들을 쫓아다녔다. 만 5년 반 동안 단 한 푼의 보수도 받지 않았고 10원 한 푼 허투루 쓰지 않았다. 700팀이 넘는 인디 밴드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었고 경선에서 뽑힌 후배 가수들에게 앨범을 만들어주었다. 성과도 적지 않았고 평가도 좋았는데 2019년 말 재계약을 앞두고 이곳을 떠났다. 사실상 쫓겨난 것이라고 말했다.

"마포에서 한국음악창작소 일을 하면서 너무 말이 안 되는 경우를 겪었습니다. 제 개인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있지만 대중음악에 대한 모욕이거든요. 그 많은 아이들이 거기에 희망을 가지고 왔고 저희는 그 아이들을 격려하고 그랬는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저를 나가라고 했을 때 정말 화가 났죠. 마포구청이 말하는 재계약 불가 사유가 거기 출입하는 아이들의 복장이 불량하다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마포구청은 이 사람이 연장 신청을 하지 않고 스스로 재계약 포기 의사를 밝혔다고 주장했다. 계약이 종료된 이후에도 이 사람 요청을 받아들여 6개월 동안 연장 운영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 주장은 달랐다. 처음 시작할 때 운영 기간 10년을 보장받았고 계약 기간 만료 이전에 구청 측에서 수차례에 걸쳐 재계약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을 몰아낼 의도가 분명한 상황에서 재계약 연장 신청은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마포구청과 이 사람 주장이 엇갈리지만 이 사람이 한국음악창작소에 대하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법적 소송까지 검토했을 만큼 마포구청 조치에 대해 분노한 것은 틀림없다.

"문화부 담당자도 제게 소송을 하라고 했을 정돕니다. 변호사에게 물어보니 법적으로 따져보면 제가 이길 거라는데 대신 5년 동안 저는 법정만 쫓아다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직원들 고용 승계를 마포구청이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제가 포기했습니다."

명백한 권력의 횡포라고 생각해서 그때까지는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았던 정치를 할까 싶은 생각까지 했다. 가족들이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정치에 참여하는 모습을 볼 뻔했다. 정권이 바뀌어도 권력의 행태는 달라지지 않는다고 했고, 억압을 느낀다고 했고,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말을 신중하게 가려서 하는 사람이었고 13년 방송 생활 중 단 한 번도 실언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랬던 사람의 말 치고는 격하게 들리는 단어들이 적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고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자신이 공을 들인 곳에서 부당하게 쫓겨났고, 자기를 쫓아낸 사람들이 현 정권과 결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말의 무게와 말의 날카로움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이 대목에서 거침이 없었고 분노가 넘쳤다.

현 정부 출범 이후 네 번이나 대통령 참석 행사에 나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백두산에 올랐던 2018년 북한 방문 때는 청와대로부터 함께 가자는 요청을 받기도 했고 몇 차례 해외순방에 동행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청와대 행사를 담당하는 탁현민에게 왜 이리 나를 자주 부르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탁현민의 대답은 간단했다. "대통령께서 최 선생님 노래를 좋아하십니다." 동향이고 연배도 비슷하고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현 대통령과 안면이 있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이 사람 팬인 것을 고려하면 현 정권에 우호적일 거라 생각했다. 텔레비전에 출연할 때는 세월호 추모 리본을 달고 나오기도 했던 사람인데 현 정부에 대한 실망을 숨기지 않았다. 준비 중인 노래가 두 곡 있다. 그중 한 곡의 제목이 '마 쫌'이란다.

최백호

"경상도 사투리로 '그만해라.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너무 나간다. 이쁘다 이쁘다 했더니 진짜인 줄 아네' 그런 뜻의 노래입니다. 약간 시사적인 노래지요."

-누구를 향해서 하는 말인가요?
"여러 사람들이 느끼겠죠."

-공동체에 대해 발언하고 싶은 게 생기신 거죠?
"예. 라디오를 안 하고 있다면…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이 사람 인터뷰를 보면 적극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심스럽고 소극적이고 멈칫거린다. 대스타의 위용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화를 주도하기보다 끌려가는 느낌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았고 극적인 사연을 말할 때도 목소리에 고저장단의 변화를 주지 않던 사람인데 권력과 정치를 말할 때는 사뭇 달랐다. 이 사람 몸속에는 아버지처럼 정치인의 피가 흐르나 싶었다.

6. 권력을 잡는 데는 언론과 군대만 장악하면 된다는 한 정치인의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쓴 곡이 <시인과 군인>이라는 노래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노래 가사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이야 너는 자라서 시인이 되거라
가슴에서 피가 배어나는 시를 쓰거라
불의 앞에서 정의를 말할 수 있고
분노를 분노로 내뱉을 수 있는
그러나 거친 벌판에
작은 풀꽃에도 눈물짓는
아이야 아이야 너는 시인이 되거라"

이 사람 가슴에는 불덩이가 들어있다. 하마터면 그 불덩이를 놓칠 뻔했다. 가슴속에 깊은 슬픔을 안고 있는 사람, 나이 드는 일의 애상을 기가 막히게 노래하는 낭만 가객이라고만 말할 뻔했다. 어느 네티즌이 말한 가슴속의 '뭔가'는 슬픔이나 한 같은 것이 아니라 열정의 불덩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그 열정의 불덩이가 이 사람 노래와 삶의 원동력이다. 이 사람의 열정을 보지 못하면 이 사람의 절반을 놓치는 것이다.

어느 행사에 갔다가 그 자리의 주인공인 광역자치단체장이 공연단의 공연 도중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저런 몰상식한 사람 절대로 다음에는 뽑지 마세요" 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 사건으로 하마터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을 뻔했지만 이 사람은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가수들의 저작권 문제, 후배 가수들의 인권 문제 등에서 이 사람은 앞장서 목소리를 높여왔다. 조용히 뒤열에서 자리나 지키거나 그런 일에는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때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강부자는 "세상을 보는 눈이 정확하고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후배 가수들이나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찾아보자는 생각이 강하신 거죠?
"그런 정신, 그런 마음은 있습니다. 제 음악이나 이런 거에 국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고생하고 살았기 때문에 힘없는 사람들, 저보다 약한 사람들에 대해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백호 '길 위에서' 뮤직비디오 중

그렇다고 무리 지어 다니거나 요란하게 떠드는 사람은 아니다. 뮤지스땅스 시절을 제외하면 어디에 소속된 적도 별로 없다. 가수 단체 등에서 직함을 맡은 적이 있지만 전업으로 한 것은 아니다. 고집도 강하고 까칠하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넘치고 자존심이 강하다. 그러니 외로운 사람처럼 보였는데 외로움을 두려워하지도 않는 듯하다.

"제가 굉장히 밝고 긍정적이긴 한데 사람을 잘 못 사귑니다. 그래서 친구가 별로 없습니다. 제가 서울 온 지 50년이 다 돼 가는데 서울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됩니다. 서울에서 사귄 사람들이 몇 명 안됩니다."

이 사람에 대한 글은 수사의 더함과 덜함의 차이는 있지만 낭만, 우수, 고독이라는 단어들의 변주가 대부분이다. 시선이 늘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사람, 세상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는 사람처럼 그려졌다. '낭만가객'이라는 말이 그리 싫지는 않다고 했지만 이 사람을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는 아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가 심어준 이미지가 강한 탓이지만 이 사람을 제대로 보려는 노력이 부족한 데도 이유가 있다. 풍광 좋은 휴가지에서 느긋하게 쉬는 일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몸 안에 뜨거운 피가 들끓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에너지로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정치가 늘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일갈한다.

"나이 들면 가만히 누워서 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싶었는데 전혀 그렇게 되지를 않더라고요. 제 안에 열정이 많은데 제가 그 열정을 억누르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열정을 잘 다스리며 살아야 될 텐데 언젠가 그 열정이 잘못 터져서 엉뚱한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최백호 그사람 인터뷰

7. 보수적이고 꼰대 기질도 다분하지만 미래로 열려 있고,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는 사람이다. 2012년 후배들과 함께 <다시 길 위에서>라는 앨범을 만들었다. 이 앨범 제작을 계기로 박주원, 이주엽, 말로, 에코브리지, 아이유 등 젊은 음악인들과 같이 일하고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부른 노래가 '부산에 가면' '바다 끝' 드라마 '괴물' OST로 쓰인 '더 나이트' 등이다.

-그 전에는 작사든 작곡이든 본인의 손이 들어갔는데 온전히 남이 만든 노래를 부른 적은 처음이셨는데 그때 경험이 어땠습니까.
"프로듀서와 많이 싸웠어요. 왜 이렇게 해야 하느냐, 왜 이렇게 어렵게 가느냐, 쉽게 가자하고 많이 싸웠어요. 그런데 결과가 좋았으니까요. 노래 녹음하고 계속 연습하면서 제 음악적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그렇게 다퉜던 게 그 사람들에게도 공부가 많이 됐을 겁니다. 그 과정이 참 좋았어요. 그런 과정들이 가수 생활하는데 큰 활력이 됩니다."

노래하는 법을, 노래를 만드는 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다. 같은 노래를 불러도 매번 다르다고 했다. 기초가 튼튼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탄탄하게 이론으로 무장한 젊은 친구들과 작업을 하면서 자신에게 빈 구석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즘 노래들은 너무 어렵다고 했다. 쉽게 따라 부르고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들이 좋은 노래라는 것이다.

"후배들과 작업할 때 너무 어렵게 만들지 말자, 노래가 좀 쉬워야 한다고 말하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평범함을 못 이겨내는 거 같아요. 박자에서부터 뭔가 독특하게 가려고 하는데 자기만족이죠. 그러면서 듣는 사람은 힘들죠."

어딘가 먹물 같은 느낌이 있다. 연구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노학자 같은 이미지를 풍길 때도 있다. 만화책을 좋아하지만 다른 책들도 많이 읽는다. 독서를 통해 상상력을 키우고 세상과 교감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쓴 글을 보면 독서의 양이 느껴진다. 글을 고르는 눈이 음악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엄격해서 방송에서 같이 일하는 작가들이 힘들어 할 때도 있다. 미대에 가려던 꿈은 실패했지만 다섯 번의 개인전을 가졌으니 화가로 불릴 만하다. 필생의 꿈이었던 영화는 촬영 도중 포기하고 말았지만 대신에 딸이 그 꿈을 이어받아 준비 중이다.

70대는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때때로 귀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나이다. 70대가 되니 보이는 인생이 다르다고 했다. 아흔이 되면 완벽한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일종의 바람인가 했는데 진심인 듯하다. 아흔에는 아흔의 호흡으로 노래하면 된다고 했다. 여든이 되고 아흔이 되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노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목청만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제 일에 대해서, 제 자신에 대해서 진정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다니고 그래서 실수한 적도 있지만 진정으로 제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하고 그렇게 살아왔던 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시작된 인터뷰가 일곱 시를 넘어가면서부터 마음이 조금 바빠졌다. 백신 접종을 하고 온 칠순 노인을 마냥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 사람은 밤 아홉 시부터는 방송 준비를 시작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데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고 이 사람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눈치였다. 매일 두 시간 생방송을 하는 사람이니 두 시간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는데 세 시간이 넘어가도 끄떡없었다. 중간에 에어컨 바람이 춥다며 냉방을 조절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 말고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힘이 나는 듯했다. 역시 후반이 강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 원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손자와 그 아이들에게 '우리 할아버지 참 좋은 노래 불렀네'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 꿈은 이미 이루어진 듯싶다.     

* 이 인터뷰는 7월 26일 SBS목동 사옥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함께 2:1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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