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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길, 책을 만나다 ④ 고독, 그리고 외로움 - 소양강 둘레길, 하늘길, 내린길

- '외로움은 심장을 갉아먹는 벌레'…토마스 조이너, <남자, 외롭다>

내가 길의 공간을 들어가는 것인지, 길이 나를 이끄는 것인지…

하늘길
내린길


길을 걷다 보면 내가 길의 공간으로 침입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이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길이 저벅저벅 걸어와 내 손목을 낚아채고는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떼어지고 시선은 멍하니 몽유병 환자의 모습을 한 채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는 나를 깨달을 때면 스스로 오싹해진다. 아마도 길의 깊이와 풍성한 풍경 앞에서, 그리고 길이 주는 다양한 상념에 빠져 저도 모르게 걸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래되고 깊은 숲길을 걸을 때, 종종 그런 경험을 하곤 한다. 인제의 소양강 둘레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인제 소양강 둘레길은 소양강의 상류지역에 개설해 놓은 둘레길로, 3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깊은 숲길이면서 그윽한 강의 정취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길이다. 그중 1코스는 산으로 난 길(하늘길)과 강을 따라 이어진 길(내린길), 두 개의 코스로 이루어지는데 하늘길과 내린길을 연이어 걸으면 원점회귀가 가능한 코스다.

소양강 둘레길을 걸으러 간 날에도 역시나 여름날의 폭염은 여전했더랬다. 계절이 그러하니 더운 것이야 당연했음에도 맨몸으로 길을 나서는 이에게는 그마저도 두려움이었으니, 하지만 어쩌랴. 길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처럼, 걷고자 하는 이에게 길 위에 있는 것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더위마저도 걷기의 일부분이었다. 그래도 머지않은 곳에 맹수의 송곳니 같은 햇살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깊은 숲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위로라면 위로다.

길은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살에 익어가고 있었다.

드러누운 이정표
길을 헤매다


길의 초입에 인상 좋은 장승 하나가 '소양강 둘레길'이라는 이름을 가슴팍에 새기고는 싱긋이 웃는다.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나서는 모양새가 이 길의 터줏대감인가 보다. 나 역시 웃음 한 조각을 나눠주며 오늘의 여정을 부탁한다.

그런데 웃음도 잠시, 그늘이 아쉬운 길은 화살처럼 쏟아지는 햇살에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익어가고 있었다. 길 위를 나풀대는 아지랑이는 그야말로 덤이다. 제대로 몸도 풀기 전인데... 투덜거림은 내 몫이고 더위는 더위대로 어금니 꽉 깨물고 인정사정 봐주지 않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다. 불벼락은 피하는 게 상책이니 걸음만 빨라진다. 그마저도 불에 덴 것처럼 엉거주춤, 마음만 바쁘다.

강을 에둘러 흐르는 길에 닿자, 숲 그늘이 안락하고 바람까지 분다. 햇살을 피하자 그제야 풍경이 보인다. 그런데, 날이 가물었던 탓인지 드넓은 강변은 제 속살인 백사장을 뜨거운 햇살 아래 한껏 펼쳐놓고는 그저 천하태평이다. 덥다는 나의 호들갑이 민망할 정도로 대범하다. 하지만 저는 모르겠으나 보는 이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느껴져 어질어질할 판이다. 강으로 뛰어들고픈 마음마저 앗아가 버리는 빛살의 공습은 아무래도 강이든 모래사장이든 맷집 좋은 그들에게나 맡겨야 될 성싶다.

저 강 건너에 소양강 둘레길 3코스가 있다. 지난가을에 걸었던 그 길의 단풍은 어찌나 고왔던지... 산은 강물에 통째로 빠지고, 그 산이 품은 단풍은 강을 얼마나 알록달록 풍성하게 했었는지... 도대체 그 곱던 강은 어디로 가고 심술 고약한 놀부마냥 잔뜩 골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느냐 말이다.

이정표인 장승이 팔자 좋게 드러누워 있다.

그래 봤자 잠깐이다. 얼마 가지 않아 길은 숲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임도로 들어선 길은 호젓하다. 그러다 쉼터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만난 장승 하나. 그런데 그 장승이 팔자 좋게도 길가에 드러누워 있는 게 아닌가. 나름 여러 해를 한 자리에 지키고 있던 처지이고 보면 피곤할 수도 있겠구나, 나름 이해하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길이 가도 가도 임도다. 숲으로 이어졌던 임도는 벌써 끝이 나고, 길의 모양마저도 반질반질한 새 길이다. 산 중턱을 뭉턱 깎아낸 임도는 그야말로 그늘 한 점 없는 신작로가 아닌가. 이럴 리가 없는데, 뭐가 문제지? 길을 잘못 든 게 분명했다. 아! 이런... 해는 중천에 떠서 숨을 수 있으면 숨어보라는 듯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끈덕지게 달려들고, 곤란한 순간이면 땀은 또 왜 이리 자꾸만 흐르는지, 짜증 지수 급상승이다. 되돌아가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려오다가 문득 길에 드러누워 있던 장승이 의심스러워진다. 아마도 그 친구가 제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농땡이를 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승이 문제였다. 이정표로서의 제 역할이 막중했음에도, 그것도 아주 중요한 갈림길에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여기서 좌측으로 계곡을 건넜어야 했구나. 뒤늦은 탄식이 괴롭다. 그렇게 길을 놓치며 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하기야 장승이 무슨 죄가 있으랴. 살뜰히 돌보지 못한 사람들의 탓이 크다.

그나마 여행자의 헤맴은 낭비가 아니라던 길 위의 구루님들의 충고를 떠올리며 위로를 삼는다. 여행이란 과정을 즐기며 나아가는 여정이니 어쩌면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했는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가고자 했던 목적지는 가장 중요한 장소가 아니라 여정이 끝나는 마지막 장소일 뿐이라고 하질 않던가. 유쾌해져야 한다. 오류를 곱씹을수록 몸도 마음도 지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위로가 안 된다.

오래된 길의 풍취와 모습이 역력하다.

고독이란
삶의 여백이다


작은 계곡을 건너 하늘길로 접어들자 길의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길은 초입부터 오래 된 길이 가지고 있을 법한 풍취와 모습이 역력하다. 이런저런 양치식물이 즐비한 것이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숲이 생각 외로 깊었던 것이다. 풀들의 왕성한 생명력 탓인지 아니면 오가는 이가 드물었던지 길마저도 풀숲에 가려져 있다.

더듬더듬 찾아낸 오솔길은 날더러 산으로 가자고 한다.

산 중턱에 서자, 숲 가득 번져나는 고요. 더위에 새들마저 떠난 자리에는 바람마저도 오도 가도 않는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바라보는 산 아래로 산과 산 사이, 마을과 마을 사이의 경계를 지나 흘러가는 강마저도 묵묵부답이다. 아무런 기척도 움직임도 느껴지는 않는 정적. 문득 모든 소리가 물러난 자리에서 천지간에 홀로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무릇 고요란 홀로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피할 수 없는 증거가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깊은 숲길이거나 쭉 뻗은 길을 걷노라면 가끔씩 떠올려지는 단어가 있다. 고독, 슬픔, 외로움... 뭐 이런 단어들이다. 홀로 걷는 처지라는 상황적 이유일 수도 있고, 또 적막한 산과 숲이라는 공간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건듯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햇살을 머금은 채로 흔들리는 나뭇잎 하나, 무심히 떨구고 가는 새들의 지저귐, 그리고 가없이 펼쳐지는 풍경 앞에서 왜소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소소한 자연의 조각들은 그렇게 가끔씩 마음의 물살 위에 파문을 남긴다. 오십을 넘긴 중년의 사내도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던 셈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지만 외로움은 아무래도 버거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사실 인생 전반전을 마감하고 후반전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이고 보면 막연한 쓸쓸함은 언제부터인가 나와 동행중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가슴을 헤집는 바람 한 자락이 서늘해지는 때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저곳의 중고서점을 헤맬 때면 고독, 외로움, 인생, 마음... 등등의 단어를 앞세운 제목의 책을 집어들 때가 많다. 어느 시인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충고에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아쉬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는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들 삶의 굽이굽이마다에 예정도 없이 찾아오는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지만, 외로움은 아무래도 버거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외로움은 심장을 갉아먹는 벌레라고 하질 않던가.

우리는 흔히 고독과 외로움을 비슷한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 고독이 주체적으로 홀로 있는 시간이라면 외로움은 타인으로부터 배제되어 홀로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고독이 마음의 요란한 소음을 가라앉히는 삶의 여백이라면 외로움은 소외된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고통에 다름 아니다. 소외가 의미하는 바는 표현은 그럴듯해도 결국은 누군가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상처가 되지만, 고독은 삶을 충만하게 하는 치유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장자가 고독을 일컬어 '홀로 하늘과 정신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홀로 존재하는 동안 삶의 온갖 소음들은 흙탕물이 맑아지듯 서서히 가라앉고, 내 안의 눈은 살며시 떠지기 마련이다. 사는 것 별 거 아니라는 깨달음도, 스스로를 힘들게 했던 자기 자신과 손 내밀어 화해를 청하는 때도 그 순간일 가능성이 높다.

혼자 있을 때라야,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그때라야, 자신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독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가까워지는 방법이면서 의식인 것이다. 종교적 의미에서의 묵언 수행이나 명상마저도 우리를 옥죄는 수많은 아픔과 괴로움의 소음들로부터 벗어나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침묵의 소리를 들으려는 노력 중 하나가 아니던가. 하지만, 외로움은 아니다. 외로움이 깊으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이 높아지자 산허리에 햇살이 들었다.
저 멀리 인제 읍내가 고요하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산이 높아지자 산허리에 햇살이 들고 나리꽃이 화사하게 여행자를 반긴다. 싸리꽃도 보라색의 꿀풀도 보인다. 길이 힘겨울 때 꽃들의 인사는 아무래도 반갑고 고맙다. 런웨이(runway)를 걷는 모델마냥 제 모습을 보라며 껑충 자란 녀석이 싱겁게 몸까지 흔들며 건네는 인사라면 더욱 그렇다.

전망대에 서자, 산 아래로 인제 읍내가 고요히 엎디어 있다.

문득 인제 읍내를 바라보며 인생유전을 생각하게 된다. 오래전 '인제 가면 언제 오냐'며 오지의 상징처럼 불리던 그 마을이 인제였고, '원통해서 못 살겠다'며 힘든 전방부대의 대표 격이었던 그 고을이 인제였다. 그런데 이제는 에코 여행의 성지가 되었으니 세상사 참 모를 일이다. 인제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점봉산이며 방태산은 이웃한 설악산에 비견될 정도이고, 그 높고 깊은 산이 품고 있는 아침가리계곡 등 여러 계곡은 이름만 들어도 상쾌하니 말이다. 그리고 원대리에 있는 하얀 몸매의 자작나무 숲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가.

산이 높아질 즈음, 길의 이정표는 칠공주터에 왔음을 알린다. 하늘길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는 데도 숲이 깊다. 햇빛조차 좀처럼 땅 위로 내려앉질 못하고, 나무들도 이끼를 두른 채로 오래된 숲의 모습이다. 그 옛날 어느 부부가 일곱 명의 딸들을 데리고 피난 왔던 곳이라 하여 칠공주터라는 이름을 얻었다는데 사방이 우거지고 능선이 둘러싸고 있어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겠다 싶지만, 어두컴컴하면서도 축축한 분위기는 왠지 부담스럽다. 게다가 오가는 이 하나 없으니 더욱 그러하다.

 외로움이란 게 이리도 뼈에 사무치는 절망이었던가. 별 것 아니라 여겼던 외로움이란 감정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은 것이다.

외로움은
심장을 갉아먹는 벌레


우리는 왜 외로운가?

외로움이 문제가 되는 때는 흔히 친구들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 시기부터라고 한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에는 외롭다는 의미를 알지 못했었다. 그 시절에는 집밖으로 나서기만 하면 이름을 불러주는 정다운 친구들이 늘 있었고, 별 것 아닌 놀이에도 해지는 줄 모르고 놀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리의 관심은 친구가 아닌 새로운 목적과 목표를 향해 줄달음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와 '더불어' 가는 여정을 의미한다. 하지만 바보(?) 같은 남자들은 그 사실을 인생의 중년기와 황혼기에 접어들어서야 깨닫는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이다. 아뿔싸! 그럴 리가 없는데.... 를 외쳐봐야 지나간 버스일 뿐, 지나간 버스와 가버린 친구는 손들어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이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깨닫게 되는 외로움. 외로움이란 게 이리도 뼈에 사무치는 절망이었던가. 별 것 아니라 여겼던 외로움이란 감정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은 것이다. 널리고 널린 게 친구고, 저장된 전화번호만도 수백, 수천인데... 그 사람들이 어찌 이리도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단 말인가. 단순히 아는 사람과 친구는 다른 사람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탄식보다 먼저, 다만 외로울 뿐이다. 그냥 외롭다.
 
'대다수 남성들은 세월이 갈수록 친구관계로부터 떨어져 나와 돈을 모으고 지위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하다가 어느 날 문득 공허한 인생과 마주한다. 젊은 시절 목표로 했던 돈과 지위를 마침내 얻었는데 이제 지독히 외롭다. 정상에서의 외로움이라니... 외로운 남성이 처한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 팀 캐서, <물질주의의 값비싼 대가>

돈과 지위를 얻었는데, 사람이 없다.

'군중 속의 외로움'이라니... 돈이며 지위며 다 얻었는데 사람이 없다니,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다.

돈만 있으면 한 번 사는 인생 마냥 봄날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 남자뿐이랴. 남녀노소가 따로 없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마주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물신(物神)을 숭배하며 살아가느라 내 안의 나를, 또 친구관계를 소홀히 하면서 결국 공허한 외로움만 떠안게 된 것이다. 소비만이 최고의 즐거움인 줄 알았던 삶이 배신을 때린 것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것 먹고, 명품 하나씩 들고 입고 신는 것이 인생 최고, 최종의 목표인 줄 알았고, 그래서 그것들을 좇아 우르르 몰려갔던 것인데, 삶에는 그것 말고도 중요한 것이 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를 묻기 전에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묻고 비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관계'보다 '소유'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당장 쓸모가 있는지조차 모를 물건을 사기 위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밖에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원하는 자리에 오르고, 간절히 바랐던 물건을 소유하게 됐지만, 그것들을 얻기 위해 달려오는 동안 우리는 관계의 소중함을 잃어버렸고, 또 더러는 미루어놓았으니 그 사실을 눈치챌 즈음이면 그야말로 낭패다. 어느 쓸쓸하고 바람 찬 날, 소주잔을 부딪혀줄 친구 한 명이 제대로 없다는 사실 앞에서는 절망, 그 자체다. '내가 이럴려고...' 아무리 되뇌어 봐도 버스는 저만치 떠나버리고 말았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을 친구라 우긴다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왠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숲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난 60여 년간 사람들의 왕래가 없었던 곳이었다.

'이곳부터는
원시계곡입니다'


칠공주터를 지난 길은 고맙게도(?) 내리막이다. 좁은 오솔길을 이리저리 헤치며 내려가는 와중에 드는 생각은 길이 정돈되어 있지 않고, 지나치게 자연적(?)이라는 것이었다. 오가는 이가 드무니 드러누운 장승이 그렇듯 단순히 행정관청의 손이 덜 미치나보다 했더랬다. 그런데...

'이곳부터는 원시계곡입니다.'

아, 그랬구나. 왠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숲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더니 이 지역은 지난 60여 년간 사람들의 왕래가 없었던 곳이라는 설명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출입이 통제되었던 지역이라는 말이다. 아무렇게나 넘어진 채로 썩어가는 나무들이며, 이끼 가득한 바위들이 세월의 흔적이었고, 그 세월을 보존하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숲이 내뿜는 무겁고 음산한 분위기 탓에 더위마저 어디론가 달아나는 느낌이다.

오래된 것의 특별함이나 깊이는 그 자체로 소중한 법이다. 거기에 과문한 눈을 들이댔으니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부끄러운 마음에 걸음조차도 조심스럽고 얼른 그들의 땅에서 피해 주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이 생긴다. 서둘러 내려가는 여린 오솔길 위로 큰까치수염이 홀로 길을 지키고 있다.

오래지 않아, <내린길>의 입구가 보인다.

산길을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도 한결 개운한 느낌이다. 가끔 길을 걷다 보면 길과 걸음을 즐기기보다 목적지에 안달하는 경우가 생긴다. 체력적으로 힘든 탓이다. 이제는 강을 에둘러 이어진 길을 따라 토닥토닥 걸으면 충분할 것이다. 강으로 나아가는 길은 소나무 천지다.

숲 너머로 언뜻언뜻 강이 보이고 물비늘이 나뭇잎 사이로 일렁댄다.

사람들이 없다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다

 
'세상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 법정스님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산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얼마간의 외로움을 즐기며, 또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소외, 왕따, 외로움... 등등의 이름에 맞서며 우리는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외로움을 견디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란 사람과의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도 나도 존재할 수가 없고, 사람들이 없다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니 말이다.
 
"잘 산 인생이란 우리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로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삶이 유쾌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결이 있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신나는 일임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 토마스 조이너, <남자, 외롭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외로움이 아닌 고독하여야 할 이유 내지 필요와 마주해야 한다. 고독은 침묵의 시간을 갖는 것이며, 스스로를 고요 속에 던져두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침묵과 고요 안에서 우리는 '반추의 시간'을 갖는다. 인생의 여정에서 반추의 시간을 갖지 않고서는 참된 진전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반추의 시간은 사유와 성찰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반추의 시간은 사유와 성찰의 시간이다.
"고독은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영혼의 가지 끝에서 수줍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다고 한다. 그 꽃은 햇빛 아래 오색찬란하게 반짝이기보다는 평범하고 조용한, 그러나 담백한 멋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시끄럽고 요란한 것은 삶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요란함 뒤에는 항상 고독이 숨어 있다." - 장샤오헝, <느리게 더 느리게(하버드대 행복학 강의)>

외로움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친해지기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서는 홀로 자기 안에서 고요히 머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삶을 부피나 크기가 아닌 가치와 질을 두고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잃어버렸던 따뜻한 가슴을 되찾을 때, 그것이 외로움이라도 내 안에서 삭히고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친하게 지낼 줄 아는 사람은 삶에 지칠 때마다 스스로 힘을 회복하는 비결을 깨우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러니 더욱 스스로와 친해져야 한다.

무산(巫山)에서 발원한 강이 계곡을 지나고 내를 건너 예까지 도달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


강이 흐른다.

누군가는 강의 흐름을 지켜볼 테지만 강은 그 어느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은 채로 흘러 흘러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강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무산(巫山)에서 발원해 계곡을 지나고 내를 건너 예까지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가는 길에 방천(芳川)과 내린천(內麟川)을 품으며 북한강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야 할 길이 400리가 넘는다. 그곳에서 이름을 바꿔 기어이 서해바다로 흘러들 것이다.

산과 산 사이의 고요를 뚫으며 나아갈 뿐, 서두르지 않는다. 어쩌면 가는 곳마저도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마지막이 죽음이듯 흐름을 멈추지 않은 물의 마지막 역시 바다로 정해져 있으니, 굳이 더 알아 무얼 한단 말인가. 노자(老子)가 이르기를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더니 무심코 바라본 강줄기에도 삶의 지혜가 숨어 있는 모양이다.

강은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고 한다. 긴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을 이루는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공을 다투지 않고, 낮은 곳에만 머무르니 싫어하는 이조차 없고, 앞서 나가고자 또 다투지 않으니, 어찌 외로울 것인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비워나가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애쓰느라 우리는, 또 나는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꾸만 걱정이 는다.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은 비워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붓다는 마지막 유언으로 자등명(子燈明, 자신이 스스로 등불이 되어 밝히고), 법등명(法燈明, 가르침을 등불 삼아 밝히라) 하라 하신 것이다. 밝힘은 배움이고, 배움은 곧 비움이니, 비워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탐진치(貪瞋痴)', 욕심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이다. 말하고 보니 모두 내 부족함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 가야 할 길이 멀고도 멀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양강 둘레길 1코스>

# 하늘길(4.5km, 소류정 – 전망대 – 칠공주터 – 숨넘이고개 – 아들바위 – 원시계곡) + 내린길(2.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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