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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길, 책을 만나다 ② 순간순간마다 깨어 있으라! - 순천 천년불심(千年佛心)길

-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사람이다'…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승선교. 걷다 보면 걸어야 하는 이유 정도야 발에 차일 정도로 넘쳐나기 마련이다.

집 떠나는 즐거움
이가락(離家樂)


<향수>라는 시를 쓴 정지용 시인은 여행을 '이가락(離家樂)'이라 했었다. 어딘가 특별한 곳을 목적지로 하지 않더라도 '집 떠나는 즐거움'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떠난다는 것에는 막연한 그리움이 담겨있고, 또 다른 경험이나 또 다른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소소한 기대마저도 음식 위의 고명마냥 보기 좋게 얹혀 있기 마련이니, 떠난다는 것은 분명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왕이면 두 발을 통해 전해지는 길의 곡진한 울림을 온몸으로 듣는다면 보기 좋은 고명은 기어이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작은 강 위의 윤슬마냥 때 없이 마음을 툭툭 건드리곤 하는 자디잘게 반짝이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길 위에서 우리를 목 놓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집 떠난 그들은 그저 즐기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다. 갈 수 있으면 가보는 것이다. 비록 개고생이라 일컫는 집 떠난 이의 불편마저도 감당하자면 감당 못 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가다 보면 걸어야 하는 이유 정도야 발에 차일 정도로 넘쳐나기 마련이다. 집을 나서 자연의 어느 틈바구니를 비집고 몸을 밀어 넣기만 하면 길 떠난 누군가는 조금은 달라지고, 그렇게 낯선 어느 길 위에서 또 조금은 여유롭고 평화로워지는 자신과 마주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길이라는 낯선 세상과 만나고, 또 그렇게 청명한 어느 하루를 살아보는 것도 보람 있는 일이지 않겠는가.

어쩌면 삶의 갈피에 끼워 넣어둘 한두 장의 사진이 필요해서 떠난 여행일지라도 땀 흘리며 길 위에서 만나는 경험과 풍경들은 몇 장의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루소도 니체도 걷지 않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하질 않았던가. 그저 어느 곳을 걷다가 우연히 다가오는 삶의 진실이 있거든 가만히 손 내밀어 마주 잡기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신록의 계절이 주는 싱그러움은 길 위에서 너울대고 산사로 가는 내내 아롱대는 빛살과 푸르름에 눈이 시릴 지경이다.

산사(山寺)로
가는 길


산사로 가는 길 위로 나뭇잎에 부딪혀 부서진 빛살들이 눈물 머금은 아이의 눈망울마냥 울 듯 말 듯 글썽인다. 신록의 계절이 주는 싱그러움은 길 위에서 너울대고 산사로 가는 내내 아롱대는 빛살과 푸르름에 눈이 시릴 지경이다.

산사로 가는 길은 언제나 풍요롭다. 매표소를 지나 산사에 이르기까지 1~2km 남짓의 길은 어느 절이든 제 나름대로의 얼굴과 향기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오대산 월정사나 부안 내소사로 가는 전나무길이며, 쌍계사 가는 길의 그 휘황한 벚꽃이며, 가을날 부석사를 오르며 맞는 노란 은행잎의 사태는 산 아래 들어앉은 웅장한 가람(伽藍)들보다도 먼저 여행자를 들뜨게 하는 법이다.

또 어쩌면 산사로 가는 진입로는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완충지대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산사로 가는 길을 걷다 보면 세상을 살며 겪게 되는 치열한 삶의 속도를 늦추게도 되고, 세속의 티끌이 떨궈지면서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성의 영역으로 천천히 옮겨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입로마다 달리 펼쳐지는 각각의 풍경을 느끼며 바람 소리를 깨닫고 침묵 속에서 걸음을 내디디면 스스로 고요해지는 자신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가 있다.

초여름날의 햇살이 부서지며 쏟아지는, 어쩌면 다른 이름난 사찰의 진입로에 비해 다소 밋밋하게도 느껴질 수 있는 선암사(仙巖寺)로 가는 길도 그러했다.

천년불심길 사진 3
두 개의 돌다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성(聖)과 속(俗)의 경계,
승선교(昇仙橋)


선암사의 진입로는 조금 부족한 자연의 풍취을 보완해주는 인공구조물이 있다. 승선교(昇仙橋, 보물 400호)와 강선루(降仙樓)가 그들이다.

선암사 매표소를 지나 1km 남짓 걸어 올라가면 언뜻 강선루가 먼저 보이고, 그 아래에 승선교가 여행자를 맞는다. 짙푸른 녹음의 그늘 아래에 정갈하게 엎디어 누(累)백년을 살아낸 돌다리는 제 몸채만큼이나 무거운 침묵 속에서 저를 보고 내지르는 뭇사람들의 탄성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양 그저 고요하다.

둥근 아치형의 돌다리는 그렇게 온갖 풍상을 겪으며 300여 년의 세월을 살아내고 있다. 그러니 오랜 연륜의 그에게 이런저런 세상사의 흔들림이야 차라리 우스운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놀라운 것은 300여 년의 세월을 살아냈음에도 다리는 그 긴 세월이 무상하리만큼 처음의 그날처럼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수천, 수만의 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 채로 중력에 맞서며 제 자신을 지켜내는 그 섭리가 그저 신비로울 따름이다.

조선 숙종 39년(1713)에 세워진 승선교는 두 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사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만나는 작은 다리를 건너 계곡 건너편의 길을 걷다가 이내 다시 큰 다리를 건너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디귿자 형태의 코스가 절묘하다. 어쩌면 무작정 내달리는 삶의 질주를 멈추고 한번쯤 돌아가도 괜찮다는 작음 멈춤, 휴지(休止)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조금 늦는다고 그게 무슨 문제냐고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양 위로를 느끼게도 된다. 하지만 지금의 길은 곧게 뻗어있는지라 승선교는 사람들이 반드시 넘나들어야 하는 그 주도로에서 빗겨난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산사 진입로의 장식품 같은 역할에 머물러 있음이 아쉽다.

천년불심길 사진 4
왕벚꽃이 수많은 상춘객들에 둘러싸여 카메라 세례를 받느라 혼이 반쯤은 쏙 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선암사,
꽃사태에 갇히다


절문을 들어서자 꽃의 향내가 사찰 가득 넘쳐난다.

사실 선암사는 우리나라 전통사찰 중 가장 아름다운 조경을 가진 사찰로 봄이면 생강나무, 산수유의 노란 꽃이 새봄을 알리기 시작하는 것을 필두로 연이어 매화, 살구,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 영산홍, 자산홍, 철쭉이 시차를 두고 연이어 피어난다. 그것도 여느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늠름한 고목에서 피어나는 것이기에 단순히 예쁘다는 말로는 그 느낌을 온전히 전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암사의 풍경 중 최고는 봄날의 선운사다. 봄날의 선암사는 수많은 꽃으로 인해 사태도 그런 사태가 없다.

천년불심길을 걸으러 간 어느 날에도 선암사 경내엔 천연기념물 홍매화를 시작으로 왕벚꽃, 수양 벚꽃, 백철쭉 등 봄꽃들이 앞 다퉈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특히 선암사 경내에는 왕벚꽃이 수많은 상춘객들에 둘러싸여 카메라 세례를 받느라 혼이 반쯤은 쏙 빠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라는 선암사의 뒷간

절집에서 자라는 벚나무를 이르는 말로 피안앵(彼岸櫻)이라는 말이 있다. 고단한 현실의 강 너머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나무란 뜻이다. 그래서일까. 유독 많은 사람들이 피안행(行)을 꿈꾸듯 왕벚꽃과 둘만의 근사한 사진을 찍기 위해 장사진을 이룬다. 그러니 꽃나무인들 어찌 제정신으로 서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래도 꽃은 풍성하고 아름다웠으니, 오래지 않아 이 늙은 나무에서 꽃잎이 분분히 날릴 때면 또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까. 그저 상상만으로도 설레고 웃음이 난다.

그리고 선암사에 가면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뒷간, 화장실이다.

선암사 해우소(解憂所)는 그 자체로 문화재급이다. 300년이 넘은 2층 누각 형태의 건축물인 선암사의 해우소는 강원도 영월의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화장실인 까닭이다. 게다가 볼일을 보고 한참 멀리에 있는 승선교를 지날 즈음에야 똥이 바닥에 떨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해우소는 깊고 큼지막하다.

그리고 자연적인 환기가 신기할 정도로 잘되는지라 냄새조차 오래 머물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김훈은 <자전거여행>에서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라고 적었고,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고 노래했던 것이다. 또 하나, 선암사 해우소 최고의 압권은 절다운 해학과 골계미가 가득한 해우소 내의 팻말이다.

"파리야∼ 극락 가자!"

성질 사나운 햇살마저도 숲 끄트머리에 걸려 새벽녘 별빛마냥 반짝일 뿐 더는 나아가질 못한다.

조계산을 넘다
천년(千年)불심(佛心)길


절문을 나서면 본격적인 <천년불심길>이다.

절을 에둘러 조계산 자락으로 접어들면 절 밖까지 따라 나온 꽃향기가 흐릿해질 즈음, 난데없는 나무 향이 산 아래로 퍼져난다. 편백나무의 맑은 향이 산자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까닭이다. 하늘 높이 시원스레 뻗은 수천의 편백나무들만이 이 산의 주인인 양 한 가득이다. 성질 사나운 햇살마저도 숲 끄트머리에 걸려 새벽녘 별빛마냥 반짝일 뿐 더는 나아가질 못한다. 문득 어느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고 생각마저 깊어짐을 깨닫는다.

길 위에 서면 이렇듯 자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안긴다. 어디 피톤치드뿐이랴. 맑고 상쾌한 향내는 어디에서나 넘쳐난다. 산이 품고 있는 향내를 어찌 한두 가지로 판단할 수 있으랴. 그래서 길은, 산은 그 자체로 향기다.

편백숲을 지나면 본격적인 걷기의 시작이다. 일차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큰굴목재까지는 1.3㎞. 제법 가파른 구간이다. 흙길보다는 돌너덜이 많고 오르면 오를수록 오르막의 경사는 급해지니, 호젓한 숲길을 걸으리라 했던 기대가 여지없이 꺾여버리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남도 삼백리길>의 9코스이기도 한 이 구간이 '천년불심길'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해도 무방하다.

천년불심길은 선암사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길로, 조계산을 넘어가는 6.5km 남짓의 여정이다. 이전에는 '조계산 굴목재길'이라 불리다가 최근에야 '천년불심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천년불심이라는 이름이 말하여주듯 이 길은 선암사와 송광사를 오가던 스님들과 산을 오르내리며 땔감과 약초를 구하러 다니던 마을 사람들의 오래된 길이었다.

길게 늘어선 돌계단은 끝이 없다.

길은 점점 가팔라진다. 길게 늘어선 돌계단은 끝나는가 싶으면 휘어져 다시 이어지고, 그만큼 호흡도 빨라진다. 그러니 장딴지는 장딴지대로 아우성을 치고, 그 장딴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발걸음은 물 먹은 솜 마냥 무겁고 또 고되다. 땀을 훔치고 숨을 고르는 간격 역시 자꾸만 빨라지는 것이 이른 새벽에 4시간 넘게 고속도로를 달려온 탓이라 핑계를 대보지만, 그래도 몸의 적응이 아쉽다.

선암사를 떠나올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의 거리면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계획과 저질 체력은 동행 불가의 조합임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러니 천년불심길이란 이름에 기대어 불가(佛家)의 자비를 바랐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길의 엄포 앞에서 안절부절못할 따름이다.

아니 어쩌면 이 길이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진리를 알려주기 위한 여정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아직도 갈 길은 충분히 멀다. 지금까지 고(苦)의 영역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하튼 길은 돌투성이고, 또 오르막의 연속이다. 또 땀은 왜 이리 주책스럽게도 흐르는지… 손수건조차도 하소연을 한다.

발밑이라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만이 제대로, 잘 사는 길이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살피라
조고각하(照顧脚下)


산길을 걸을 때, 특히나 돌부리가 많은 산길을 걸을 때면 떠올리는 말이 있다. '조고각하(照顧脚下)'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를 살피라'는 뜻을 가진 이 글귀는 사찰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는 말이다. 법당과 선방 앞, 스님들의 처소나 외부인이 머무는 곳의 섬돌 위 마루 모서리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 글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섬돌 위에 붙어 있으니 응당 신발을 가지런히 놓으라는 말일 게다.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바위투성이의 산길을 걸을 때 발밑을 살피며 걷는 것 말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란 게 딱히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한 발 한 발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내딛는 거 말고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사실 조고각하라는 말에는 단순히 발밑을 살피라는 뜻보다 더 깊고 넓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금, 자기의 존재를 살펴보라는 의미다.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스스로 살펴보라는 조언이자 경계의 의미이면서 순간순간 내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교적으로는 순간순간마다 깨어있으라는 말이기도 하다. 더 크게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발밑이라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만이 제대로, 잘 사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의 모든 것은 변한다. 다만 그 변화는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변화여야 한다.

조계산을 넘나들며 선암사를 가고, 또 송광사를 오고 갔던 수많은 스님들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던 그 말도 조고각하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산 너머 송광사의 불일암(佛日庵)에서 단순하면서도 가난하되, 절제된 삶을 사신 법정스님 또한 스스로 깨어 있기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하시며 무소유의 삶을 사셨을 것이다. 스님은 '자기 존재에 대한 그때그때의 물음, 나는 누구인가, 어떤 것이 내 온전한 마음인가, 거듭거듭 물음으로써 삶이 조금씩 개선되고 삶의 질도 달라진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법정스님께서 나는 누구인가를 거듭거듭 물은 이유는 '물처럼 흐르고,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나기' 위해서였다. 살아 있는 꽃이라면 어제 핀 꽃과 오늘 핀 꽃이 다르고, 그 꽃이 품은 향기와 빛깔도 새롭게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제법무상(諸法無相)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일체의 모든 것은 변한다. 다만 그 변화는 새롭게 피어나는 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변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묵은 데 갇혀 있으면 안 된다. 꽃처럼 늘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한다. (…) 어딘가에 집착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안주하면 그 웅덩이에 갇히고 만다. 그러면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썩기 마련이다." - 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

먼 곳의 둘레길을 걷자 하면 그 길이 원점 회귀 코스가 아닌 경우 부득불 출발지로 돌아올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드디어 큰굴목재다. 이곳을 오르느라 흘린 땀방울이 얼마이던가. 천년불심길을 걸으며 겪는 어려움의 7할 정도는 여기까지가 아닐까 싶다. 이제껏은 가파른 산길이었지만 이 고갯길만 지나면 길은 무난하다.

그런데 나보다 몇 걸음 앞서 홀로 산을 오르던 어느 여성분이 큰굴목재에 이르러 좀 쉬는가 싶더니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더니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아마도 출발지로 돌아가는 모양이다. 길을 돌아서 가는 그녀에게서 작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송광사까지 가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하는 속내를 알 듯도 하기 때문이다.

먼 곳의 둘레길을 걷자 하면 그 길이 원점 회귀 코스가 아닌 경우 부득불 출발지로 돌아올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래도 걷고자 하는 좋은 길은 대체로 한적한 산이나 강, 그리고 바다를 에둘러 이어져 있는 탓에 그곳들은 대중교통 이용이 원활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출발지로 돌아가는 방법이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걷고 이 길 역시 마찬가지다. 천년불심길이 조계산을 경계로 동서로 나뉘어져 있는 송광사와 선암사를 이어주는 길이니만큼 왕복을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득불 돌아갈 방법이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선택한 방법은 도착지에 차를 두고 택시를 이용해 출발지로 가는 것이었다. 전화로 택시를 부르고 요금을 여쭈니, 헐~ 최소 4만 5천 원은 받아야 한단다. 기사님 왈, 걸으면 10km남짓이지만 차로 가면 25km가 넘는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하신다. 어쩌랴. 이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미적거리며 조금 투덜거렸더니 5천 원을 깎아주신다. 저만치 왔던 길을 되돌아 산을 내려가는 여성분도 아마도 그런 사정이 있어 송광사를 지척에 두고 발걸음을 돌렸을 것이다.

골목재에서 10여 분 걸어가면 조계산의 명물이라는 보리밥집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집이라 조계산을 찾는 누구나 들러 허기를 면한다고 하는데, 나의 사정은 밥 때도 아니고 내려가야 하는 마음이 급했던 탓에 그 맛을 보지는 못하였다. 들은즉슨 조계산 보리밥집은 맛뿐만 아니라 나름의 훈훈한 스토리도 간직하고 있어 조계산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소문난 집이라고 한다.

이 길을 따라 계곡과 조릿대를 벗 삼아 30여 분을 걸으면 송광사다.

모든 것을 버리고 허공을 건너
송광사 가는 길


이제는 내리막이다. 길에는 양지꽃이며 금창초, 게으른 철쭉까지 여행자를 반긴다. 산길을 따라 한 줄기가 바람이 이제는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얼굴에 맺힌 땀을 거둬주고 등도 슬며시 밀어주는 것이 나름 고맙고 반갑다. 이제 길은 산보하듯 걸어도 될 것만 같다. 그런데 길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의 길이가 아까의 그 길이가 아니다. 서둘러야 한다.

호젓한 산길과 배도사 대피소, 송광사 주변 마을 사람들의 소득원이었던 숯가마터를 지나면 송광굴목이재다. '해발 720m'가 새겨진 표지석에서 왼쪽 길을 따르면 천자암(天子庵)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장군봉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계곡과 조릿대를 벗 삼아 30여 분을 걸으면 송광사다.

산길이 끝나갈 즈음 남새밭이 나오고 산사를 에둘러 있는 대숲을 지나온 바람마저 불력 깊은 스님의 독경 소리마냥 사르락사르락 낮고 깊게 산사로 향한다. 그래서일까. 공기마저도 알 수 없는 그윽함에 차분해지고 여행자 역시 저절로 고요해진다. 오래된 사찰이 건네는 묵언의 수행이 여행자에게도 전해졌던 탓이리라. 아마도 그럴 것이다.

대숲을 지나온 바람마저 불력 깊은 스님의 독경 소리마냥 사르락사르락 낮고 깊게 산사로 향한다.

그렇게 송광사에 든다.

송광사의 무거운 고요는 꽃놀이가 즐거운 사람들로 왁자한 선암사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송광사에 들면 먼저 개울 옆 침계루(枕溪樓)가 눈길을 끈다. '시내를 베고 누워 있다'는 이름을 가진 누각은 제각각의 기둥들이 개울의 높낮이에 따라 저마다의 길이로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 그런데 건물보다 건물이 베고 누운 개울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실제의 건물보다 개울에 빠져 잔물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누각이 훨씬 운치가 있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송광사의 보배는 이 개울이 아닐까 싶다. 이 개울 위로 가로놓인 작은 다리인 능허교(凌虛橋)를 건너면 대웅보전이다.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라는 의미의 능허교에는 엽전 세 닢이 꿰인 줄을 물고 있는 작은 용머리 석상이 달려 있는데 이 엽전은 조선 숙종 때 벌인 불사 당시 쓰고 남은 시줏돈이라고 한다.

능허교를 건너면 사천왕문이고, 이곳을 지나면 석탑이 없는 대광보전이다. 송광사는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 그리고 법보(法寶)사찰인 해인사와 더불어 삼보(三寶)사찰로 손꼽히는 승보사찰(僧寶寺刹)이다. 승보사찰인 이유는 이곳 송광사가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16명의 국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 속에는 송광사가 배출한 또 한 분의 스님인 법정스님이 있다.

송광사에 들면 먼저 개울 옆 침계루(枕溪樓)가 눈길을 끈다.

텅 비워야 영혼의 메아리가 울리고,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찰 수 있다


송광사에 딸린 작은 암자인 불일암(佛日庵)은 생전에 법정스님이 은둔 수행하던 곳이다. 송광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는 조그만 오솔길이 보인다. '무소유길'이다. 법정스님이 송광사와 불일암을 오르내리던 그 길이다.

스님께서 말하는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순함과 간소함을 추구하자는 말이다. 불필요한 것들을 다 덜어내고 꼭 있어야 할 것과 있어야 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어떤 결정체 같은 것, 그것이 '단순과 간소'라는 말이다. 단순과 간소는 스님께서 강조하신 '텅 빈 충만'의 경지이기도 하다.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이 이 '단순'과 '간소' 안에 들어있다고 한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리고, 텅 비어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찰 수 있기 때문이다.

"욕심은 부릴 게 아니라 버릴 것이다. 버림으로써 영혼이 빛을 발한다. (…) 내 자신이 부끄럽고 가난함을 느낄 때는 나보다 훨씬 적게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단순과 간소함 속에서 여전히 삶의 기쁨과 순수함을 잃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 스스로 선택한 청빈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삶의 어떤 운치이다." - 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대숲 너머에 불일암이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흔히 '풍요 속의 빈곤' 때문에 힘들어한다. 절대적 가치보다는 상대적 가치에 매몰돼 필요한 것보다는 맹목적으로 더 많이 갖기 위한 고단한 경주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스스로 선택한 가난인 '맑은 가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풍요로 둘러싸인 삶이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인간의 삶이고,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앞에서 자주 마주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물음과 대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고 단언하신다. 항상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고,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들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꽃들이 매번 새로운 꽃을 피워내듯이 사람도 어제와는 다른, 변화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신다. 변화가 없으면 삶은 침체되고 무의미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들 일상이 진부하고 지루하고 따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 역시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결코 아니다. 그건 한때일 뿐이다. 욕망은 새로운 자극으로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을 채워가는 삶은 결코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가치 있는 삶이란 의미를 채우는 삶이다. (…)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날 수 있어야 살아 있는 사람이다." - 법정스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을 사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을 사는 일'이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말이다. 현재의 이 순간 속에 자신을 온전히 불태우는 것, 그것이 제대로 사는 사람의 삶의 자세일 것이다. 사람이 불행하다는 것은 마지못한 삶, 순간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버리는 삶, 그것이 불행한 삶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아프게 다가온다.

길을 걸으며 때때로 자문한다. 나는 왜 굳이 이 먼 곳까지 달려와 뙤약볕 아래에서 걷고 있는가? 무언가 특별한 것을 얻기 위한 여정은 분명 아니었으나, 부지불식간에 내 안에 흔적도 없이 쌓이는 그 무언가가 있기는 할 것이라 믿는다. 다만 그것들이 헛된 욕심을 덜어낸 삶의 평화였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수많은 생명들의 '원래 그러하다'는 자연의 이치대로 욕심 없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수억 년의 작용들이 만들어낸 산이나 강, 바다 등 웅장한 대자연의 묵묵한 고요를 깨닫고, 스스로 행하는 작은 행위들을 인식하고, 내가 살아가고 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조급해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낯선 세상으로 떠났다가 한없이 이끌리는 삶의 시간들과 조우하는 경험이란 것이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이란 것이 어디 깨달음을 깨치기 위한 방편만도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걷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치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오십 줄을 넘긴 한 사내가 길 위에서 흘리는 땀방울이 그다지 헛되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오늘도, 또 걷는다.

불일암을 떠나며 바라본 울타리인 듯 아닌 듯 정체조차 불분명한 대나무숲이 먼바다에서부터 달려온 바람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다. 대숲마저도 스님 생전에 귀가 닳도록 들었다며 소유하지도 말고 소유되지도 말란다. 그렇게 순간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현재의 이 순간 속에 자신을 불태워 보라고 등을 떠민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 법정스님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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