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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생활비 아껴 넣은 보험, 날 사기범으로 만들었다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보험사기범으로 진정서가 접수되었으니 조사받으러 오십시오!"

갑자기 경찰서에서 조사받으러 나오라는 이야기를 듣는 건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범죄 피해를 당해 피해자로 수사기관에 출석해 진술하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인데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것도 파렴치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일컫는 '사기범'이라는 죄명을 들었을 때 정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쓰러져 다치기까지 했다며, 한 시민이 법률상담을 요청해 왔다.

일단 수사기관에 조사를 받는다고 무조건 처벌받는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지만, 불안함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 불안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이 분은 이 같은 불안을 겪어야 하는가?"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은 후 쓰러져 다쳐 출석일자를 늦췄는데, 경찰은 12월 중순까지는 조사받으러 와야 한다며 다시 전화를 걸어와 '보험회사와 합의해서 진정이 취하되는 경우도 있으니 보험회사와 잘 이야기해보라'는 말을 남겼다. 그 이야기를 엿들은 것 마냥 며칠 후 보험회사 직원은 연락을 해 '아름답게' 마무리하자고 제안하며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분쟁, 제안, 거래, 직장인 (사진=픽사베이)

"의료기관에 자문을 해 보았는데 입원기간 중 85%가 과장 입원으로 결론 났으니 지금까지 수령한 보험금 절반을 돌려주고 보험계약을 해지하기로 하면 진정을 철회하겠다."

이 시민은 보험회사의 제안대로 '아름답게'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 걸까?

2002년부터 매월 꼬박꼬박 납입한 보험료, 아깝다고 생각하면서도 생활비를 아껴가며 보험료를 납입한 건 미래에 발생할 위험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불행하게도 당사자는 2015년 교통사고를 당해 큰 부상을 입었고, 그 이후 후유증으로 일상을 회복하지 못한 채 입원을 반복해야 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었던 건 보험 덕분에 그 험난한 과정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당사자는 이제 와서 보험금의 절반을 돌려주고 보험계약을 해지해야 경찰 조사를 면할 수 있다는 가혹한 현실 앞에 놓여 있다. '보험회사와 싸울 것인가?' 아니면 '보험회사가 제시하는 합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 당사자는 보험 때문에 잘 견딘 '험난한' 과정을 떠올리며 앞으로 보험회사 때문에 견뎌야 할 '험난한' 과정 생각에 하루하루 편할 날이 없다고 한다.

병원, 병실, 병상, 환자, 입원 (사진=픽사베이)

그렇다면 보험회사의 '과장 입원' 주장은 옳은 것인가?

2013년 골프장 경기보조원이었던 A씨는 허리와 골반 부위에 심한 통증을 겪어 입원을 하였고 보험금 지급을 신청했는데, 보험회사는 적정 입원기간을 초과하여 '과장 입원'을 했다며 보험금 지급을 거절한 뒤 A씨를 고소했고, 검찰은 보험회사의 고소를 받아들여 A씨를 보험사기범으로 재판에 넘겼다.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게 된 A씨는, 주치의가 입원하라고 해서 입원했고, 퇴원하라고 해서 퇴원했는데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어 병원 입퇴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또 검찰이 적정입원기간으로 제시한 자료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입원치료기간은 다를 수 있는데 그저 일반적인 기준을 개별적인 사안에 들이미는 게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이 사안에 대해 법원은 결국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아래는 판결문에 기재된 무죄 이유다.
[▶ 해당 판결문 전문 (울산지방법원 2014. 2. 20. 선고 2013고단3889)]
 
"입원기간을 결정할 권한은 진료를 하는 의사에게 있는 것이고, 피고인이 입원기간을 결정한 의사들에게 금품 지급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에 관한 아무런 자료가 없는 이 사건에 있어서 검사가 들고 있는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이 적정입원기간에 대하여 피해자를 기망한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

또한 검찰이 적정입원기간으로 주장하는 자료는 일반적인 기준으로서 골프장 캐디로 장기간 일하다가 허리와 골반 부위에 심한 통증을 겪었던 피고인에게는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없다."

입원기간을 결정할 권한은 진료를 하는 의사에게 있기에 의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운 대부분의 환자에게는 사실상 그런 식의 보험사기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범죄다. 또한 치료기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입원 및 퇴원 여부는 환자를 직접 대면한 주치의의 결정이기에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존중받아야 할 것인데, 나중에 의무기록만 살펴 입원기간의 적정성 여부를 따져 보험사기 운운하는 건 의사의 의료행위를 위축시킬 위험이 크다.

보험회사로부터 보험사기범으로 몰려 어려움을 겪는 보험소비자는 이 분들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 뇌전증을 앓고 있던 분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보험료 문제로 갈등을 겪자 보험회사는 보험사기를 친다며 수사기관에 진정과 고소를 반복하였고, 근거 없는 고소 등으로 여러 차례 조사를 받은 보험소비자는 정신적 고통을 배상하라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법원도 보험소비자의 억울한 호소를 받아들여 교통사고로 인한 위자료만이 아니라 보험회사의 반복적 고소로 인한 정신적 손해까지 인정해 위자료 20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선고하기도 하였다.
▶ 관련 기사 [보험금 신청하니 사기범으로...'소송 남발' 횡포]

2011년에 언론보도로 알려진 고 모 씨도 마찬가지였다. 고 모 씨는 그 당시 자기를 보험사기범으로 몰아가는 보험회사의 횡포를 막아달라며 금융감독원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금융감독원은 수사 중인 사건에는 개입할 수 없다며 민원을 취하하라고 종용할 뿐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금융감독원이 당시 입장을 바꿨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인잇용 이미지

금융감독원은 보험사기방지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홈페이지 인사말에 적힌 글처럼 보험사기는 건전한 윤리의식 및 생명존중의 가치관을 파괴하고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하며 궁극적으로는 보험제도의 존립기반을 위협하므로 근절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입원 횟수가 많고 입원기간이 길었다는 이유만으로 보험금을 노리는 보험사기범으로 몰려 재판에 넘겨져 어렵게 무죄를 받고, 반복적인 보험회사의 고소로 인해 정신적 피해를 당해 위자료 청구까지 해야 했던 보험소비자들처럼 오늘도 보험회사로부터 그런 부당한 위협을 받고 있는 보험소비자에 대한 보호 또한 금융감독원이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보험소비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그와 같은 피해를 방지하겠다는 이야기는 금융감독원 홈페이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금융감독원은 보험금을 노리는 약탈 환자 등 보험사기를 방지하기 위한 노력만큼이나 일반 시민들을 보험사기범으로 몰아가 보험금 추가 지급을 막고 보험계약을 해지하려는 보험회사의 부당한 행태를 방지하기 위해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금융감독원은 보험소비자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보험회사를 감독하기 위해 설치된 국가기관이지 보험회사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보험소비자를 감독하기 위해 설치된 국가기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융위원회의 설치 등에 관한 법률 제1조(목적)
이 법은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을 설치하여 금융산업의 선진화와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하고 건전한 신용질서와 공정한 금융거래 관행(慣行)을 확립하며 예금자 및 투자자 등 금융 수요자를 보호함으로써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전문개정 2012. 3. 21.]
 
인잇 네임카드 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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