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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장례식장' 가격으로 '요양병원'을 평가?…'투자자 보호'와 '붉은 깃발' 사이에서

[취재파일] '장례식장' 가격으로 '요양병원'을 평가?…'투자자 보호'와 '붉은 깃발' 사이에서
● 시대에 뒤쳐진 낡은 규제, '붉은 깃발 법'

운송 수단이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던 19세기,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교통법이 등장합니다. 자동차가 등장했으니 당연히 이를 규제하는 법률이 생겨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 내용을 보면 조금 이상합니다. 1865년 제정된 법률은 자동차의 최고 속도를 교외에서는 시속 6km, 시가지에서는 시속 3km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동차를 운행할 때는 다른 마차가 놀라지 않도록 붉은 깃발을 든 기수가 자동차 앞을 마차로 달리면서 접근을 알려야 한다고 규정했죠. 당시 자동차들은 이미 시속 3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었지만, 규제 때문에 시속 6km로 마차 뒤를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어쨌든 법은 법이니까요. 이 법이 바로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진 낡은 규제의 대명사로 불리는 영국의 붉은 깃발 법, 이른바 '적기 조례'입니다. 이 160년 전 이야기가 잊힐 만하면 불려 나오는 이유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 국내 첫 '의료 분야 리츠'의 중단

'리츠(REITs, Real Estate Investment Trusts)'라는 신탁 상품이 있습니다. 소액 투자자들이 부동산에 투자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금을 맡기는 상품을 뜻하는 말인데, 쉽게 설명하자면 빌딩 등 몇백 억에서 몇천 억에 달하는 부동산을 거래할 때 리츠 운용사가 여러 소규모 투자자들을 모아 마치 주식을 거래하듯이 일정 지분을 판매하고 나중에 지분에 따라 임대료 수익을 배당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큰돈이 없는 소액 투자자, 이른바 '개미'들도 대규모 부동산 투자가 가능해지죠. 현재 국내에서는 주로 빌딩이나 오피스텔 등에 사용되지만, 해외에서는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투자 상품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의료 분야, 특히 대형 병원의 매각입니다.

올해 국내에서도 처음으로 병원 건물 거래에 리츠 방식을 적용하겠다는 사례가 등장했습니다. 광주광역시의 한 병원 그룹이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이른바 '세일 앤 리스백' 방식으로 병원과 재활센터, 요양병원 건물 3곳을 묶어 리츠 운영사에 팔고 곧바로 다시 임대해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병원 측과 리츠 운영사가 약 1천3백60억 원 규모의 거래에 협의를 했고 운영사는 이 가운데 약 460억 원을 외부 소액투자자들을 통해 조달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첫 거래가 갑자기 멈춰 버립니다.

리츠는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가 참여하는 '공모' 방식인 만큼 분명히 위험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현행 부동산 투자회사법은 리츠 운용사가 영업 등록을 할 때 국토교통부 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최소한의 투자자 보호를 위해 국토부가 사업의 적정성과 타당성을 평가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이번 병원 리츠 운영사도 지난 7월 국토부에 등록을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국토부는 처분을 계속 미루다 지난 9월 초 등록신청을 보완하라고 요청하더니, 다시 또 한 달 동안 미루다가 결국 지난달 반려했습니다.

● 국토부 "건물 가격 과대평가…소액 투자자 보호 곤란"

국토부의 반려 사유는 '시장가치를 적정하게 반영하지 못한 자산 매입 예정 가격 등으로 인하여 투자자 보호가 곤란한 것으로 보인다'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병원과 리츠 운영사는 민간 감정평가를 통해 3개 건물 중 요양병원 건물 가격을 480억 원이라고 잡았는데, 국토부가 가치평가를 의뢰한 한국감정원은 이 건물의 가격이 최대 290억 원에 불과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근거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병원이 지난 2015년 해당 요양병원 건물을 115억 원에 사서 100억 원을 투입해 증축했는데, 5년이 지난 뒤 두 배가 넘는 480억 원에 매각하는 건 과도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해당 요양병원 근처에 있어 입지조건이 같은 장례식장의 거래 가격이 110억 원으로 제곱미터당 250여 만 원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면적당 매매가를 이와 비슷한 수준으로 잡았을 때 요양병원 가격은 270억 원 정도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임대료의 경우도, 주변 건물들의 경우 3.3제곱미터당 4~5만 원 선인데 유독 이 요양병원만 8만 5천 원이 넘는다는 이유였습니다. 국토부는 이런 요인들을 고려해 볼 때 병원과 리츠 운영사가 건물 가격을 부풀려 투자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우려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 병원 "현장 상황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 평가... 반론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병원 측은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첫 번째로 건물 가격의 경우 애초에 부도로 인해 급히 처분한 건물이라 인수 가격이 낮았을 뿐 시장 가격은 더 높았고, 증축으로 인해 수익성도 좋아졌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로 주변 장례식장과의 비교 역시, 해당 장례식장도 요양병원과 마찬가지로 경매에 넘어가기 직전에 급히 처분된 매물이라 가격이 낮았을 뿐 통상 매출액과 영업이익을 보면 적정 매매가는 두 배인 220억 원인 데도 감정원이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임대료의 경우 요양병원과 유사하게 도심 외곽에 자리 잡는 물류창고 평균 임대료 수준의 3배 정도인데 업종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과다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병원 측은 이런 내용들이 가치평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지만 이를 설명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규정된 절차에 따라 사업 계획 검토를 담당하는 한국감정원의 의견을 받아 결정한 만큼, 국토부의 결정에 절차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또 민간 평가와 한국감정원이 평가한 적정 가격에 차이가 나는 것 역시 지난 2014년 '한남 더 힐' 사례에서 봤듯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국토부의 이번 결정이 '부동산 가격 과열 억제'라는 정책 기조에 충실해 정작 유동성이 절실한 지방 병원들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국내 첫 사례가 반려된 만큼 앞으로 리츠 방식 자체를 적용하기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현재 해당 병원 측은 국토부의 처분에 대해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번 결정이 시대의 흐름에 뒤쳐진 또 하나의 '적기 조례' 사례가 될지, 아니면 소액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올바른 조치일지는 결국 법원의 판단을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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