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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이 선택은 정말 내 선택일까 - 나를 찾는 연습

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 중

최근 책을 한 권 내었다.

지난 몇 년간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간간이 기고 글도 쓰다 보니 예상치 못했던 출간 제안들이 들어왔고, 어쩌다 보니 책이 탄생했다. 이 과정 속에 사람 마음은 참 간사하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많이 부족한데 무슨 책이냐며 자꾸 집필을 망설이던 난 어디 갔는지, 출간 후엔 베스트셀러 자리를 탐내는 날 보게 되었다. 퇴근길 서점에 들러 내 책들을 쳐다보며 흐뭇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비교하는 마음이 떠올랐다. 서점 입구부터 눈에 바로 들어오도록 전시된 다른 베스트셀러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서점엔 정말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종류의 책들이 있었지만, 결국 계산대에 선 사람들의 손에 들린 책의 대다수는 베스트셀러들이었다. 부럽지만 또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베스트셀러니까.

그렇게 책의 순위에 민감하게 지내던 어느 날, 북토크를 위해 찾아간 삼일문고에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구미를 대표하는 지역 서점인 그곳에는 베스트셀러를 위해 따로 준비된 공간과 가판대 같은 것들이 전혀 없었다. 서점을 찾은 이들이 최대한 다양한 책들과 만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몇몇 베스트셀러들에게 시선이 쏠리도록 조성된 서울의 대형서점들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이게 가능한 걸까? 책이 팔릴까? 의아하고 신기했다. 그리고 북토크 후 기차역까지 가는 길에 서점 대표님과의 짧은 대화 속에 더 놀라게 되었다. 삼일문고에는 베스트셀러를 위한 공간만 없는 것이 아니었다. 베스트셀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1000권이 판매될 경우 각기 다른 800종류의 책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야말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SBS 보이스(VOICE)로 들어보세요.
김지용 삼일문고
베스트셀러가 없던 삼일문고,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다. 사람들의 취향과 욕구는 아주 색다르고 다양하다. 애당초 사람들은 그 순간의 자신에게 필요한 책을 구하러 서점에 들른 것이지 베스트셀러를 사러 온 것이 아니다. 삼일문고가 그 살아있는 증거이다. 그런데 그 외에서의 현실은 많이 다르다. 소수의 책, 영화, 노래가, 베스트셀러가 그 시장을 독식한다. 왜 그럴까? 이 베스트셀러라는 것은 누가 만든 것일까? 그것은 욕망이다. 최대한 많은 책을 팔기 위하여 소위 팔릴 만한 책에 한정된 마케팅 비용을 들이는 것이 판매자 입장에서는 당연할 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구매자 측의 욕망도 베스트셀러를 만드는데 일조한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인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나 자신의 선택들로 이뤄질까?

요즘 읽는 그 책, 누가 고른 것일까? 정말 나의 선택인가? 내 손이 집었다고 해도 꼭 내가 고른 것이 아닐 수 있다. 나 자신의 영혼을 살찌울 책을 고르는 순간에도 타인의 욕망들에 꽤 영향받는다. 남들이 읽는지, 괜찮다고 하는지, 읽고 있는 내가 남들에게 괜찮아 보일지가 선택 기준이 된다.

비슷한 심리를 진료실에서도 자주 접한다. 겨우 무기력에서 벗어나면서 새로 시작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지 물을 때 '영어 공부'라는 답이 그렇게도 자주 돌아온다. 왜 영어인지, 영어가 업무에 필수적인지, 영어를 좋아하는지 되물어볼 때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라는 답이 주로 돌아온다. 나 역시 그렇다. 책, 음악, 영화 모두 가장 다수가 좋다고 한 것부터 찾아보게 된다. 작은 선택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의과대학 입학과 정신과 전공이라는 큰 선택의 기로에서도 타자의 욕망들이 분명 영향을 미쳤다.

이는 꼭 나쁜 것만이 아니고,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다수가 욕망하는 베스트셀러는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안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바쁜 현대인들에겐 실패할 여유 같은 건 없다. 여러 전공을 공부해보고 여러 진로를 둘러볼 수 없다. 매일 책을 보고 매일 영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모험적인 선택을 할 여력이 없다. 사회 속 경쟁에서 잠시라도 뒤처지면 안 되기에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모든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더욱더 타자의 욕망에 따라간다.

나 자신의 욕망을 알아볼 시간적 여력만 없는 것이 아니다. 공간 역시 부족하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적 가던 조그마한 동네 서점에도 베스트셀러를 위해 따로 나누어진 공간은 없었다. 누구도 내게 어떤 책을 권하지 않았다. 그저 한 권 한 권 끄집어 내며 살펴보았던 기억이다. 그 작은 동네 서점들이 사라지고 비교할 수없이 더 많은 책을 품은 대형서점들이 생겨났지만, 이곳에서 나의 선택은 오히려 더 제한받는다. 바쁜 와중에 겨우 들른 서점에서는 매번 보이지 않는 압력에 밀려 타인들이 고르고 있는 베스트셀러를 나 또한 집어 들게 된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진짜 나'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삼일문고의 예에서 입증되었듯, 개개인의 취향과 욕구는 매우 제각각이니까. 현재의 내 모습이 타인의 욕망들을 내 욕망들로 착각하고 추구하며 만들어진 '가짜 나'가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진짜 나'를 찾지 못한 채 '가짜 나'로 살아가는 삶은 공허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공허함과 우울감을 느끼는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 공허함을 채울 것을 찾지 못해 또 타자의 욕망에 매달린다. 그리하여 불경기 속에서도 명품 매출은 늘어나며, 백화점 명품관 속에서도 가장 인기 많은 브랜드의 대기열만 더 길어진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공허하여 무언가로 채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가? 그럴 때 책은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비슷한 고민을 먼저 한 누군가가 얻어낸, 내게 도움될 답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책을 고를 때 타인의 추천은 매우 소중하고 존중할 만하다. 하지만 그만큼 나 자신의 욕구도 존중해보자. 조금의 시간만 더 투자해보자. 진짜 나의 욕구를 고민해보고, 그에 맞는 책을 찾아보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를 위한 책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서점 내 북적거리는 구역이 아닌 한적한 구석에 숨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을 찾아내는 과정이 진짜 나로 살아가는 좋은 연습이 될 것이다.

인잇 필진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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