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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힐링 마이웨이… 내 방에서 '랜선 트레킹'! 토닥토닥,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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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55 : 힐링 마이웨이… 내 방에서 '랜선 트레킹'! <토닥토닥, 숲길>

"마침 그날은 정선아리랑시장 장날이었다.

"저거 중국산일지도 몰라."

짚을 가지런하게 엮어 만든 바구니를 보고 내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닐지도 모르고."
"저게 사람 손으로 만든 거면 만 원일 리가 없지. 품이 얼마나 비싼데. 그리고 자세히 봐. 기계로 뽑은 것처럼 일정하잖아. 백퍼 중국산이야."

나는 근거 없는 추측을 합리화하며 열을 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추측은 거의 90퍼센트의 확률로 틀리곤 한다. 백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방금 전 내가 중국산이라고 박박 우기던 바구니를 직접 만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제 시장에서 바구니를 만드는 사람은 자신 뿐이며, 자신이 바구니를 만들지 않으면 이 시장에서 이 바구니는 없어질 거라고 했다. 나는 작은 바구니를 하나 샀다. 용도를 여쭤보니 밭에 콩을 뿌릴 때 콩을 담는 바구니라고 했다."


올여름 참, 하 수상합니다. 꿉꿉하고 기나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이제 좀 한여름다운 날들인가 했더니,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어딘가 늘 좀 곤두서 있던 신경을 다시 한번 더 바짝 조여야 한다니,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아 이제 지쳐" 소리가 절로 나오는 걸 감추기 힘듭니다.

그래서 오늘 [북적북적]은 이른바 '랜선 트레킹'을 도모해 봤습니다. 당분간 이런 여행, 어렵잖아요. 그냥 어느 주말 아침에 불현듯 '가볼까?' 충동이 불쑥 일었을 때, 운동화 끈 다시 한번 단단히 조여매고 떠나 시골장터에서 바구니를 집어 드는 하루 이틀짜리 나들이. 올해 들어 코로나19 때문에 제대로 열리지도 못하는 그 삼일장, 오일장들에서 바구니 엮어 팔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생각하기도 죄송스럽고요.

어쩔 수 없는 많은 것들에 대한 걱정이 밀려오는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이런 여름이 닥치기 전에 우리 땅의 아름다운 곳곳들을 느긋하고 살뜰하게 트레킹 했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직접 떠날 그날을 먼저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우리 이번 주말엔 따로 또 같이 '랜선 트레킹'을 함께 하는 겁니다!

[토닥토닥, 숲길]은 번역가 박여진 님이 글을 쓰고 잡지사 기자이자 다큐 사진작가인 백홍기 님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두 분은 초등학교 동창이자 부부입니다. 2018년 말에 출간돼 많은 분들이 읽은 책이라 [북적북적] 가족들 중에는 이미 아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저는 최근에 친구의 책장에서 처음 발견했어요^^; 신간은 아니지만, 요즘 같은 때에 '다시 꺼내 읽기에' 오히려 더더욱 어울리는 책이 아닐까 싶어 선택했습니다.

불쑥 떠나 하루 이틀짜리 산책 또는 산행하고 돌아오기에 걸맞은 국내 곳곳의 숨은 보석 같은 '유명하지 않은 명소'들을 부부가 두루 다니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참 다정하고 차분한, 소박하면서도 품위 넘치는 실용서입니다. 나 역시 하얀 운동화를 신고 따라나서고 싶다는 기분이 절로 들게 하는 정갈한 에세이와 함께, 그냥 눈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할퀴어진 마음에 연고를 바르는 것 같은 사진들이 장마다 실려 있습니다. ([북적북적]에 이 사진들은 함께 소개해드릴 수 없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 사진들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책이거든요!)

그냥 우리 땅 곳곳의 호젓한 숲 길들. 안개가 내려앉은 논밭. 고요한 그 공기가 배어 나오는 것 같은 산사.... 장터, 다원, 성당, 왕릉, 항구. 우리 땅에 이렇게나 가보고 싶어 지는 곳이 많구나, 분위기 좀 좋아지면 여기부터 가볼까... 모서리를 접게 되는 단락단락마다(매 단락이 그렇습니다), 트레킹에 걸리는 시간과 준비물 등 깨알 팁이 붙어있기도 합니다.

"그거 챙겼지?"
"응."
"그거는?"
"챙겼어."

'그거'가 의미하는 건 485가지 정도 되는데, 청태산에서 '그거'와 '그거'는 바로 베개와 담요다. 우리는 청태산에 오면 늘 낮잠을 잔다.
몇 해 전 생활이 어려웠던 적이 있었다. 백의 직장에서 몇 달째 월급이 나오지 않았고 공교롭게 나 역시 번역료가 들어오지 않았다. 퍽퍽하고 힘들었다. 자고 눈을 뜨면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오는 어느 행성의 어마어마한 파도처럼 걱정이 밀려들곤 했다. 결국 백은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하고 내게 말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난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리 청태산 갈까?"
……
우리는 둔내와 횡성을 다니고, 잣나무가 만든 부드러운 길을 걷고, 침엽수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했다. 누워서 하염없이 흩날리는 잣나무 허물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따금 음악을 들었고 이따금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매일 낮잠을 잤다.
이상하게 잠이 왔다. 늦여름 특유의 서늘하고 따뜻한 바람을 덮고 푹 자고 일어나면 머리가 맑아져 있었다. 잣나무가 내쉰 맑은 숨이 우리 폐 깊숙이 들어가 온몸을 구석구석 휘돈 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자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는 일이 그다지 수고롭지 않게 느껴졌다. 툭툭 털어내면 그만인 숲 먼지처럼 낮잠에서 깨면 어깨와 마음을 짓눌렀던 걱정도 툭툭 털려나가는 것 같았다.

"별 거 아니네."
"응, 별거 아니야."


이 부부도, 남들처럼, 남에게 일일이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단단해지는 삶을 걷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담백하게, 그런 삶의 중간중간 우리 땅 이곳저곳으로 함께 떠나 걸으면서 마음을 달래고 스스로를 치유한 시간들과 그 장면들을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도 나눠줍니다. 이제 너무 자주 쓰여 식상하게 들리는 '힐링'이란 외국어보다, 정말이지 '치유'해 주는 힘이 있는 여행안내서라고 소개하고 싶네요.

"나의 풍수원성당은 커다란 나무와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고딕 양식의 늙은 성당, 그 뒤 주름진 산에서 시작된다. 성당 옆으로 난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도 있다. 종교 특유의 엄숙함과 경건함이 깃든 조용한 숲길이다. 잠시 마음을 털어내기 더없이 완벽한 숲길을 내려오면 복원한 가마터와 초가집이 있고 그 아래 아담한 유물 전시관이 있다.

유물 전시관에는 가난했던 시절, 시절보다 더 가난했던 이들의 삶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다. 주로 닳아서 새까매지고, 깨져서 때우고, 찢어져서 꿰맨 생활용품들이다. 전시관 옆 사제관에는 옛날 사제복과 빛바랜 성경책들이 있다. 교적 상자에는 1886년생 김베드루 님의 교적카드도 있다. 내 기억, 뿌연 필터를 통과한 내 휴대전화 사진 속 기억은 이렇다.

백의 성당은 부챗살 무늬로 깔린 돌길에서 시작된다. 나무와 성당 사이에 걸린 하루 새 늙은 햇살, 윤이 나는 성당 마룻바닥, 너무 소박해서 경건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감싸고 있는 아치형 벽돌, 벽돌과 벽돌 사이 시멘트 모르타르를 비집고 나온 노란 꽃, 우리를 경계하느라 나뭇가지를 입에 문 채 안절부절 못하고 머리 위를 맴돌던 새, 게으른 늙은 개와 꼬리가 뭉툭한 검은 고양이가 있다. 나의 뒷모습도 성당의 일부였다.

백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어떤 무리의 뒤를 따라 비아 돌로로사를 걸었다고 한다. 그들은 모르는 여자가 자신들을 따라오는 것을 보고 연신 뒤를 흘끗거리며 조금 당황하는 듯 했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따라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성당에도 1886년생 김베드루 님이 있다."


'아 나도 '당일치기'로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봐야지. 하얀 운동화를 신고 걸어야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읽었지만, 일단 올여름은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초가을도 늦가을도 있으니까요. 당분간은 운동화 끈 고쳐 매고 시원하게 떠날 수 없더라도! [토닥토닥, 숲길] 그리고 [북적북적]과 함께, 신선한 바람을 쐬는 기분, 숲길을 거니는 청아한 감각을 '랜선 타고 다 같이' 조금이라도 느끼실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출판사 [예문아카이브]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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