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는 '감독 차두리'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날이기도 했다. "한 것 이상으로 너무 큰 사랑을 받았다"며 눈물을 흘린 그는 솔직하고 담담하게 대표팀 생활을 정리했다. 진지한 분위기를 스스로 바꾼 한 마디가 있었다. "얼마 전 댓글을 봤는데 공감하면 안 되는데 공감이 가더라고요. '피지컬은 아버지, 발은 어머니.'" 웃음소리가 기자회견장을 메웠다. "저는 분명히 기술이 뛰어나고 화려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다른 장점이 있었어요. 음... 그런 것 같아요. 유럽에선 선수 장점을 크게 봐요. 장점을 극대화해 팀에 맞춰 기용을 해요. 우리나라엔 완벽주의가 좀 있는 것 같아요. 단점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선수들이 위축되는 듯해요. 완벽한 선수는 없어요. 단점을 열심히 찾아내 평가하기보단 장점을 보면서 축구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이런 솔직함과 유쾌함 그리고 따뜻함. 차두리가 두루 사랑받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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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5년. FC서울의 18세 이하(U-18) 팀인 오산고 사령탑에 오른 차두리 감독은 그때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듯했다. "상훈~ 굿!" "그렇지, 거기 봐야지." "오케이, 오케이." 부천 U-18팀과 경기에서 그는 90분 내내 선수들을 독려하고 칭찬했다. 한 순간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감독 데뷔 첫 해, 고등리그 6경기(저학년부 2경기 포함)에서 모두 승리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궁금했다.
-뜻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칭찬만 하기 답답하지 않나요?
"축구엔 정답이 없잖아요. 수학 공식처럼 정답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제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것도 모순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선택지를 선수들에게 얘기해줄 뿐, 결국 경기장 안에서 선택은 스스로 해야 해요.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되도록 아이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려고 합니다."
선수생활을 마무리한 뒤 그는 독일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2018 러시아월드컵 대표팀엔 코치로 합류해 독일 전력분석을 맡아 '카잔의 기적'에 힘을 보탰다. 이후 그는 소셜미디어에 '#한국축구뿌리부터튼튼히'라는 글귀를 반복해 적고 있다.
- 지도자 연수 시절 독일에선 무엇을 느꼈나요.
"우리 선수들에게 많이 하는 얘기가 있어요. '너희들 전성기가 지금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때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갈수록 어려움을 겪으면서 원하는 곳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나라에선 참 많아요. 지금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과정일 뿐이에요. 고등학교 때 배워야 할 걸 잘 배워서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서 꽃을 피우는 선수가 됐으면 좋겠어요."
-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2010 남아공월드컵 첫 원정 16강, 또 코치로 2018 러시아월드컵에선 독일전 승리에 힘을 보탰죠. 월드컵 영광의 경험이 지도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나요?
"어쩌면 이 선수들이 가보고 싶은 곳이 월드컵이고, 유럽 무대이겠죠. 그곳에 가기 위한 길이 어떤 길인지, 그곳엔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다는 점이 도움이 돼요. 준비를 돕는 길잡이가 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 '#한국축구뿌리부터튼튼히'를 강조하는 이유는?
"축구 강국은 하나같이 유소년시스템에 굉장히 많은 투자와 정성을 쏟고 있어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그 나이에 꼭 배우고 넘어가야 할 것들을 지도하는 거죠. 때를 놓치면 결국 성인이 되어서 빠른 속도의 축구에 적응할 수 없기 때문이죠. 우리 유소년 선수들이 연령대에 맞는 훈련을 잘 받았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오산고 주장 이태석(18)은 "감독님 오신 뒤 많은 변화가 있었다"면서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가운데 더 세밀하고 정확한 판단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선수들이 느끼는 차두리 감독의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역시 에너지다. 이태석은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시고, 운동장 안팎에서 많은 즐거움을 준다"며 웃었다.
- 감독으로 첫 해인데, 재밌나요?
"하하. 재미있어요. 매일 아침 아이들을 만나고 훈련 준비하고, 또 소리 지르고 웃고 때론 화도 내고요. 선수로 뛸 때보다 보람차고 즐거워요."
- 지도자로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꿈은...모르겠어요. 훈련프로그램과 시스템에 변화를 주려고 하는데, 구단도 그걸 긍정적으로 생각해줘서 뜻을 모아 가고 있어요. 우리 FC서울이 앞장서서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죠. 우리 어른들이 잘 인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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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한 마지막 질문이 있었다. '감독으로서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지 않는지'였다. 2001년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며 처음 태극마크를 단 차두리는 당시 "제가 못해서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지 않을지 부담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14년 뒤 선수 인생을 이렇게 정리했다. "평생 아버지보다 잘하고 싶고, 그럴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 명성에 도전했어요. 현실의 벽을 느끼면서 한편으론 조금 밉더라고요. 이놈의 축구를 아무리 잘해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도저히 그 근처도 못 가니까." 이번엔 아들 '차감독'에게 '아버지 '차감독'을 넘어서겠다'는 포부를 듣고 싶었다.
입을 떼려는 데, 문득 2014 브라질 월드컵 기념 다큐멘터리 속 차 감독 부자(父子)의 말이 차례로 떠올랐다. 먼저 아버지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워낙 아버지 그늘이 있으니까 아무리 해도 나하고 비교를 하니까 얼마나 피곤하겠어. 참 아빠로서 너무 마음이 아프지." 다른 공간에서 아들은 "제가 (박)지성이 만큼 축구를 잘했으면 손흥민만큼 축구를 잘했으면 아버지도 자랑스러우셨을 거고. 제가 거기까지 못 간 것에 대해서 굉장히 아버지께 죄송하죠"라며 말끝을 흐렸다.
마지막 질문을 삼켰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차두리 감독이 차범근 감독이 오르지 못한 곳까지 올라 환하게 웃는 모습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