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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누가 날 조종하고 있는 건 아닐까

김창규│입사 21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회사 보직자 애환을 연재 중

나는 방금 들어온 이메일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새로운 회사 정책에 대한 안내문이었는데 정말 시행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다. 왜냐하면 그 효과가 있고 없음을 따지기 전에 내가 아는 최종결재권자는, 성향상 이 정책을 수용하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행? 어떻게 된 거지?'라는 의구심이 생겼다.

의문을 억누르고 차분히 문서를 보며 하나씩 결재를 해 나갔다. 야호, 이제 하나 남았다. 신규 고객 유치에 관련된 거다. 거래 조건을 보니 이 고객과는 거래를 하고 싶지 않다. 매출 기여도는 있지만 고생만 하고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아서다. 바로 부결을 누르려고 했지만 최근에 들은 관계자들의 보고를 감안하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며칠 전 판매팀장이 하반기에는 실적이 빠지면서 매출 목표에 미달될 수 있다고 했고, A지점장은 최근 본사에서 이익보다 매출을 중요시 여긴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했다. 고민하다가 승인했다.

그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나 혼자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그저 그랬다. 그런데 영화 제목과 줄거리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이상하게도 유독 한 장면만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 장면은 대략 이렇다.

『장소는 미식 축구장 관중석. 여기서 주인공은 내기를 좋아하는 한 거물과 황당한 내기를 하게 된다. 그 거물이 미식 축구장 선수 중 한 명을 마음속으로 지목하면 그게 누구인지를 주인공이 맞추는 거였다. 도저히 주인공이 이기기 힘든 내기였지만 예상 밖으로 주인공이 마음 속 선수를 맞추고 거액을 땄다. 잠시 뒤 옆에 있었던 여자친구가 어떻게 맞출 수 있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거물을 타깃으로 잡은 후 그의 주변에 계속해서 그가 조금 전 지목한 사람(A)을 배치해 놨어. 거물이 이동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광고판에서, 길거리에서, 어디에서든지 A를 보게 했지. 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A가 강하게 인식된 거지. 난 그가 내기에서 A를 선택하도록 미리 수를 써 놓은 거라고."』

"내가 미리 수를 다 써놓은 거라고"
이 장면이 계속 떠오르는 것은 혹시 며칠 전 최종 결재권자가, 승인하지 않을 줄 알았던 정책을 승인하게 된 이유를 짐작하게 해 주는 단초를 제공해서 그런 것 아닐까? 아하, 그렇다. 영화 속 거물이 당했던 것처럼 우리 회사 최종결재권자도 같은 방법으로 당한(?) 것이다. 아마도 이 정책을 추진했던 관계자들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최종결재권자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그와 함께하는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 자리에서 사람을 바꿔가며 또 시간차를 두면서 지속적으로 그 정책의 당위성을 그에게 조금씩 주입시켰을 것이다. 그 후 결정적 순간에 이 정책을 최종결재권자에게 내밀었을 테고 이미 당위성을 인정해 버린 그는 심리적 저항 없이 그것을 승인했을 거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거 무서운 일이다. 이 짐작이 맞는다면 아무리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람도 자기도 모르게 무엇으로부터 조종 당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러자 며칠 전 내가 헛장사하게 하는 고객과의 계약을 '군말 없이 승인했던 일'이 떠올랐다. 혹시 나도 당한 거 아닐까?

우리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갖고 의사결정을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 의사결정 과정에 외적인 힘과 우연한 사건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최종적으로 본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결정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자유 의지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이긴 할까? 위의 사례로 미루어 보면 이 자유 의지는 여러 가지 상황 조작으로 실제로는 자유 의지가 아닌데 우리가 그냥 자유 의지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이런 실험이 있었다. 피실험자를 거대한 뇌 스캐너에 넣고 양손에 스위치를 하나씩 쥐어 줬다. 그리고 맘대로 스위치를 누르라고 했다. 피실험자는 오른쪽, 왼쪽 아무렇게나 막 눌렀다. 아무도 자신이 뭘 누를 것인지 모를 것임을 확신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이미 사전에 예측되고 있었다. 컴퓨터 스크린에 이미지화된 실험자의 뇌신 경망 영상에서 그가 오른쪽 버튼을 누르려고 하기 전 이미 해당되는 부분의 뇌신경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지켜본 과학자는 피실험자보다 먼저 그가 무엇을 누를지 쉽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자유의지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이 오롯이 '나의 것'이라면 누구도 나보다 먼저 내가 무엇을 할 지 알 수 없어야 하지 않을까?

관련해서 또 하나의 실험 결과도 있다. 이 과학자는 쥐의 뇌 중 보상, 감정을 주관하는 특정 부위에 전극을 이식했다(전극을 통해 과학자는 리모컨 조작으로 쥐의 뇌에 자극을 줄 수 있다). 전극이 이식된 쥐를 풀어놓자 쥐는 이곳저곳을 누비다가 실험자가 리모컨으로 어떤 자극을 보내자 즉각 반응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자극 반복과 그에 따른 쥐의 반응을 본 뒤 과학자는 어렵지 않게 그 쥐를 자기 마음대로 전후좌우 조정할 수 있었다. 윤리적 문제로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지만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누군가가 내가 결정하기도 전에 내가 무엇을 할지를 알고, 누군가가 내 뇌 특정 부위에 자극을 주어 나를 조종할 수 있다면 도대체 인간의 자유 의지에 근거한 의사결정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이고, 너무 멀리 왔다. 난 단지 내 결정이 내 뇌신경을 아는 자에게 농락을 당한 것은 아닌지 혹은 나도 모르게 사람, 책, 언론, 인터넷, 유튜브 등을 통해 뇌에 전극을 붙인 쥐처럼 부지불식간에 조종 당한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심을 한 것뿐인데…… 어쨌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과학자, 철학자 님들에게 맡기고 난 내 뇌가 잘 속아 넘어가는 '약점'이 있음을 알고 정말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한 번 더 따져 봐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 생명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알고리즘이고 인간의 알고리즘은 자유롭지 않다고 본다. 이 알고리즘은 유전자와의 영향을 받고, 자유 의지가 아니라 결정론적으로 또는 무작위로 결정을 내린다. 그렇다면 자유 의지도, 현대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내적 목소리들과 진짜 소망들처럼 단지 생화학적 불균형이나 신경 질환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인잇 필진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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