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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한 청년이 노인이 될 때까지 바뀌지 않은 것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 지난 22일 수요일 오전 10시 10분.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320호 법정에서는 1967년 9월 21일 판결 이후 53년 만에 다시 같은 사건의 형사재판이 열렸다. 6·25 당시 행방불명된 형이 나타나 일본으로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은 28세 청년은 배를 타고 북한으로 끌려갔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청년은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살고 나왔다. 그리고 80세 노인이 되어 다시 재판정에 선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 소속 수사관들로부터 불법 감금, 고문과 가혹 행위를 당하였기에 재심이 열려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검찰도 아주 이례적으로 맞장구 쳐 주었고, 재판부는 비교적 신속하게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9재고합2). 그러나 재심 개시는 다시 재판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할 뿐 53년 전 공소되었던 범죄 사실과 맞서 싸워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하는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재심 개시에 대해 맞장구를 쳐 주었던 검찰은, 그러나 이 날 태도를 달리해 1967년 재판 당시 제출했던 모든 증거를 동일하게 제출했는데, 심지어 불법 감금과 고문 및 가혹 행위를 통해 얻어낸 피의자 신문 조서도 그 증거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1967년 28세였던 청년은 2020년 80세의 노인이 되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4월 22일 다시 시작하였다.

법 법정 재판 재판관 판사 (사진=픽사베이)

## 같은 날 오후 3시 30분.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402호 법정에서는 풍등을 날려 저유소를 폭발한 혐의로 기소된 외국인 근로자의 재판이 열렸다. 그가 풍등을 날린 게 2년 전이었으니, 공교롭게도 80세의 노인이 배를 타고 북한으로 끌려갔을 때와 같은 나이인 28세였다.
 

그러면 2018년 28세 청년은 1967년 28세 청년과 다르게 공정한 수사를 받았을까?


그는 수사기관에 풍등을 날린 사실은 인정하였지만, 공사현장 주변에 저유소가 있다는 사실은 몰랐고, 저유소 지상 잔디에 풍등이 떨어져 불이 붙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4차 조사 때 무려 '123회'에 걸쳐, 거짓말이 아니냐고 되묻거나 "거짓말하지 말라" 혹은 "거짓말이다"라고 말하며 자백을 강요하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런 식의 조사 방식에 대해 현행 형사사법체계가 인정하고 있는 정상적인 신문 과정이 아니며 피의자의 진술 거부권을 침해한 인권침해라고 확인했다(국가인권위원회 18진정091700).

그런데 이 날 추가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고양경찰서 수사팀이 피의자의 통역을 맡았던 통역인을 통역 직후 조사하며 '피의자가 거짓말하는 부분이 있었는지'를 집요하게 추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통역인은 이 날 법정에 나와 자신이 조사받은 사실마저 부인했다. 통역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경찰은 통역인을 정식으로 조사하지도 않고 진술 조서를 꾸며 증거로 제출했다는 것인데, 2020년에 벌어진 일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이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 이루어진 다음 조사 때에도 수사팀은 같은 통역인을 다시 불러 통역을 시켰다고 한다. 과연 그 통역인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통역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바로 그 조사가 무려 123회에 걸쳐 '거짓말'이라는 발언을 들은 4차 조사였다. 과거 1967년 28세 청년이 수사기관에서 당했던 고문과 구타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2018년 28세 청년이 받은 부당한 대우가 그냥 덮어져도 되는 걸까?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면 통역인을 이용해서라도 피의자가 진실을 이야기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대 의견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숱하게 경험한 바와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수사는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진실을 덮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한 번 가려진 진실을 다시 밝혀내는 건, 1967년 28세 청년이 2020년 80세의 노인이 되어 법정에 다시 서야할 만큼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노인 지팡이 (사진=픽사베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50년이 흐른 지금도 실체적 진실을 발견한다는 핑계 아래 이루어지는 강압적이고 무리한 수사관행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1967년 28세 청년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80세의 노인이 된 뒤 다시 법정에 서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2018년 28세 청년이 또다시 경험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코로나 사태 속 맞은 4월 25일 법의 날. 올해 법의 날은 더더욱 시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한 듯하다. 단순히 코로나19 때문일까? 강압적이고 무리한 수사관행 등 법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 시민들의 외면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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