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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거리를 두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이른 아침, 환기를 시키려고 창문을 열다가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집 앞에 우뚝 서 있는 우람한 나무 가지에 요상한 하얀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게 아닌가. 몇 초가 흘러서야 '아참, 벌써 3월도 다 지나갔지' 깨닫고는 다시 나무를 바라보니 그제야 하얀 덩어리가 아닌 활짝 핀 목련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찰나의 순간은 마치 한겨울 일식집 앞에 있는 조화 벚나무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코로나 국면' 속 잔뜩 얼어붙은 마음에 더해 대대적인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출을 자제하다보니 계절감마저 사라진 탓이었다.

코로나 속에도 봄은 왔다.

현재로선 치료약도 없고 전파력은 빠른 코로나19에 전 세계가 대응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라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 간의 접촉을 최대한 줄여 바이러스 전파를 늦춤으로써 궁극적으로 사망률을 최소화하는 감염 관리법이라고 한다. 지인들과의 모임이 기약 없이 연기되고, 모든 학교가 개학을 미루고, 또 기업은 재택근무를 실시하고, 크고 작은 단체 행사를 멈춘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다. 얼마나 더 지속해야 할지 분명한 답은 없지만, 짧든 길든 이 강력한 '거리두기 체험'이 우리의 가치관과 삶, 일의 방식, 그리고 사회의 작동 방식을 크게 바꿔놓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나 또한 20세기부터 직장생활을 해왔고, 그 사이 신종 플루와 메르스 사태도 겪었지만 근무 방식이 제법 보수적인 회사가 재택근무를 장려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재택이 힘들면 출퇴근 시간이라도 탄력적으로 운영했다.) 여태껏 구성원의 건강과 안녕은 그저 개인의 몫이라 여기고 성과와 효율이 앞머리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일하는 이들의 건강이 일의 지속성에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체감하고 있다. '아파도 참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면 쉬어야 한다'는 간단한 명제가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각자의 공간에서 사람들과 대면하지 않고 일하는 '리모트 워크'도 더 이상 디지털 노마드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 되어버렸다. 오랫동안 '리모트 워크' 컨설팅을 해왔던 지인은 그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려왔던 10년 동안, 좀처럼 변하지 않던 기업들이 불과 최근 두 달 만에 업무 방식을 바꾸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학의 경우 한 학기에 가까운 수업들이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는 중이다. 비대면 업무와 강의를 위한 툴과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사실 좀 더 근본적으로 접근하면 새로운 일의 방식, 대면 중심의 조직 운영의 필요성, 대학이 제공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와 같이 우리가 즉답을 피해왔던 질문을 직면하게 한다.

활발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시간은 오히려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가능하면 만남을 다음으로 미루지만, 그런 중에도 결코 미룰 수 없는 관계가 나에겐 무엇인지... 많은 이들에게 미룰 수 없는 존재란 가족이지 않을까. 관계의 우선 순위가 명료해지니 가족의 소중함을 요즘처럼 절실히 몸으로 느낀 적도 없는 듯하다. 거리를 두니 불편한 점도 있지만 사실 편한 점도 크다. 거품 많았던 인간관계의 다이어트가 절로 되며 에너지 소모도 줄어드니 말이다.

재택근무로 휑했던 사무실로 다시 사람들이 출근하자, 반가움과 동시에 나를 둘러싼 공기의 밀도와 스트레스가 높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 우리는 그냥 직원 1, 2, 3이 아니라 일정한 공간을 공유하고 함께 숨 쉬고 있는 생명 있는 '존재'들이구나.' 그 '존재의 존재감'이 훅 체감되었다. 동시에 '연결의 연결감'도 느껴졌다. 연결 사회라는 말이 지금처럼 또렷이 느껴진 적이 없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일상을 덜어내고 보니 그 밑바탕에 빽빽이 이어져 있는 관계의 망이 드러난다. 나의 허약한 일상이 그 연결로 건강해지고 무탈히 영위되어 왔음을, 당신의 안녕이 나의 안녕을 부축하고 있었음을.


당신과 나의 안녕을 위해.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란 표현 대신 '물리적 거리두기'라는 표현을 권장하고 있다. 물리적으로만 거리를 둘 뿐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비록 같은 공간에 함께 하진 않지만, 마음의 손을 '더욱 꽉' 맞잡아야 한다는 것. 

거리를 두니 비로소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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