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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청해부대 '이란군 교전 작전지침' 없다…"무책임한 파병"

지난달 27일 부산해군작전사령부에서 출항하는 청해부대 31진 왕건함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 때 우리 해군의 NLL 작전지침은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순의 5단계였습니다. 상대적으로 빠른 우리 고속정들은 느린 북한 해군 경비정, 어뢰정 주변을 고속 질주해서 흔들고 충돌해서 밀어냈습니다. 정부의 '선제사격 금지' 명령에 따라 우리 고속정들은 북한 함정들의 공격을 받은 뒤에야 반격할 수 있었습니다. 1차 연평해전은 다행히도 완벽한 승리였지만 2차 해전에서는 전사 6명, 부상 18명, 고속정 1척 침몰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2차 해전의 우울한 결과를 교훈 삼아 NLL 작전지침은 이후 간소화됐고 현장 지휘관의 재량권은 커졌습니다.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순의 3단계 작전지침입니다. 현장 지휘관이 1단계 조치를 한 뒤에도 북한 함정이 퇴각하지 않으면 선제적인 경고사격, 이어 격파사격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미세조종은 있지만 현재까지도 큰 틀에서는 3단계 작전지침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작전지침은 이렇게 군 지휘관이 부대를 이끌고 전투할 때의 상세 절차, 매뉴얼, 가이드라인입니다. 문민정부의 군사정책을 창끝에서 구현하는 최종적 방법론입니다. 작전지침이 어떠한가에 따라 전투에서 이기기도, 지기도 합니다. 예비역 해병 준장인 차동길 단국대 군사학과 교수는 "작전지침은 현장 지휘관에게 교전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이것이 없다면 교전 상황 발생 시 당황하여 적절한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제(21일)부터 작전 해역이 호르무즈 해협 너머까지 확장된 청해부대는 이란 정규군과 교전에 적용할 작전지침을 하달받지 못했습니다. 기존 임무인 해적 소탕, 우리 선박 호송과 관련된 작전지침만 있습니다. 경무장 해적과는 차원이 다른 중무장한 이란 정규군과 맞서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하는데 군은 하지 않았습니다.
청해부대 31진 왕건함, 지난 21일부터 작전해역이 호르무즈 해협으로 확대됐다.
● 독자 작전한다면서 청해부대에 새로 하달된 작전지침은 없다!

청해부대는 작전 해역이 확장됐지만 미국 주도로 창설된 국제해양안보구상(IMSC) 즉 호르무즈 호위연합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작전을 한다고 국방부는 밝혔습니다. 호르무즈 호위연합과 엮이지 않고 나홀로 항해하면서 호르무즈 해협 주변에서 우리 선박 보호 임무를 하겠다는 겁니다.

남의 도움 없이 펼치는 독자적인 작전이니 더더욱 상세한 상황별 작전지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군은 "청해부대의 작전 해역 확대 이후 청해부대에 새로 내려간 작전지침은 없다"고 거듭 확인했습니다. "2009년 청해부대 창설 초기부터 여러 상황을 반영한 작전지침은 있다"고 부연했는데 지금 청해부대에게 필요한 건 그런 느슨한 작전지침이 아닙니다.

이란 해군의 함정과 잠수함, 이란 육군의 지대함 미사일, 이란 공군의 공대함 미사일 공격에 맞춤 대응할 작전지침입니다. '변두리 깡패' 같은 아덴만 해적과 대적하기 위한 작전지침으로는 '중동 최강' 이란 정규군과 맞설 수 없습니다. 우리 선박, 국민 보호는커녕 청해부대 장병들의 안전도 장담 못합니다.

어떤 현역 장교는 "이란군 교전 작전지침은 없지만 자위권으로 대응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자위권은 마지막 수단입니다. 청해부대 작전 해역 확대의 취지 따위는 내팽개친 채 앞뒤 안 가리고 마구잡이 전투를 해야 할 경우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먼저 냉정하게 작전지침에 따라 전투하는 게 순서입니다. 자위권을 함부로 꺼내 들면 일이 커져 확전(擴戰)되기 십상입니다.

● 군은 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다더니…

전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모든 게 불확실합니다. 기온, 바람, 안개, 눈비, 사기, 운, 통찰력 등 당장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요인들이 화력이라는 물리적인 요인을 압도할 때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군은 온갖 상황에 대비한 상세 계획을 세웁니다. 즉 작전지침의 수립입니다. 민간인들이 보기엔 답답하지만 군은 "늘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웅변합니다.

호르무즈 해협 너머로 작전 해역을 확대하는 청해부대도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마땅합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면 순식간에 중무장 이란 정규군과 단독 전투에 말려드는 경우입니다. 청해부대 왕건함 함장이 관련 작전지침에 정통하지 못하면 패전을 면치 못합니다. 하물며 작전지침조차 없다면 그 결과는 참혹할 수밖에 없습니다.

청해부대 작전 해역의 한시적 확대 조치가 한미동맹, 대 이란 우호관계를 모두 보전하기 위한 묘책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청해부대가 위험한 데를 피해 다니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길 수 있다는 겁니다. 일이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 바랄 나위 없습니다.

그럼에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작전지침은 수립해야 합니다. 군은 하루속히 이란 정규군과 교전 시 작전지침을 수립해 청해부대에 하달해야 합니다. 작전지침 없는 파병은 장병의 안전을 경시한, 지독한 직무유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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