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밀라논나 현상-'우리의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52년생 장명숙'

2030 롤모델로 떠오르고 있는 68세 '신생 패션유튜버' 장명숙 씨 인터뷰

[취재파일] 밀라논나 현상-'우리의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52년생 장명숙'
"이 세상 힙(hip)이 아니다"(고**)
"할머니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여고생입니다."(s**)
"25살 남자인데 댓글 처음 달아봐요. 스킵 없이 끝까지 다 봤어요."(나**)
"이건 패션 채널이 아니라... 그냥 인생 수업"(김**)
"선생님한테 유튜브 알려준 사람한테 노벨상 줘야 한다."(핫**)


2019년 10월 개설 이후 3개월 만에 21만 구독자를 확보한 유튜브 '패션' 채널, '밀라논나'에 달린 수많은 댓글 중 일부이다.

'밀라논나'는 68세 패션 컨설턴트 장명숙 씨의 유튜브 활동명. 염색하지 않은 하얗게 센 머리를 손수 군더더기 없이 바짝 자르고, 점잖은 '서울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갈 때마다 존재감 뚜렷하게 여러 개 겹쳐 한 팔찌들이 배경음처럼 부드럽게 찰랑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밀라논나'란, 이탈리아 어로 '밀라노 할머니'란 뜻이라고 한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혜성처럼 나타났다'는 말이 이보다 더 어울리는 신생 한국인 유튜버는 단언컨대, 적어도 지난 1년 동안엔 달리 없었다. (남극 출신 펭귄은 논외로 하자.)

"이 채널 분명 거대하게 뜰 것 같아요. "(박**)
한 '댓글러'의 예언대로 최근 '밀라논나'는 2020년 1월 중순 기준 단 18개의 클립만으로, 한국어를 쓰는 유튜버 가운데 단시간에 가장 '핫'하게 떠올랐다. '밀라논나'에 열광하는 구독자들은 11살 초등학생부터 70대까지 드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지만, 게시물 하나하나마다 수백 개에서 1천 개 넘게 달리는 댓글들로 추정해 보건대, 그중에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2030 세대다. '패션'을 보고 싶다면, 말 그대로 사방에 널려있는 이른바 또래 '셀럽'들의 유튜브 채널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낄 법한 연령대의 이들이 '밀라논나'로 열렬히 모여들고 있다. 초기 게시물에 주로 달렸던 느낌표 가득한 감탄들이, 점차 물음표 가득한 뜨거운 질문들로 바뀌고 있다는 게 지난 3개월 동안의 미묘한 변화라면 변화랄까. 패션 팁도 묻고, 인테리어며 몸매 관리법에 대해서도 묻지만, 무엇보다 '이 삶,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세상 살아갈 철학을 구하는 질문들로 댓글란이 연일 달아오른다.

기자는 작년 연말의 어느 주말, 드러누워서 빈둥빈둥 유튜브를 헤매다가 '밀라논나'를 접했다. 그리고, 몇 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거짓말 안 보태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혼자 보기 너무 아까워 같이 보고 흥분해 줄 사람을 찾아 옆방으로 진출했다.)

"이거 봐. 이런 분이 다 있네. 누굴까? 이 스타일 봐. 팔근육 봐. 얘기하는 거 봐. 장난 아니지."

그때까지 올라온 게시물을 '스킵 없이' 몽땅 보고도 아쉬워서, '구독' 버튼을 눌러 새로 올라온 거 없나 확인하기를 여러 번. 한 번 본 게시물 또 틀어보기도 여러 번. 그래도 이것뿐이었다면, 인터뷰를 요청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1978년 밀라노 유학길에 올라, 도미니코 돌체('돌체 앤 가바나'의, 그 돌체)와 나란히 앉아 공부했고, 페라가모 같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평생 패션 바이어이자 디자이너이자 직장인으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다가, 한국-이탈리아 교류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은 멋진 사람의 삶은 유튜브에서 본인이 보여주는 만큼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족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정부가 준 '기사' 작위 인증서(이하 모두 인터뷰 당시 영상 캡처)<br><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장명숙 씨는 한-이 교류 공헌을 인정받아 이탈리아의 'knight'가 되었다." data-captionyn="Y" id="i201394273"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200119/201394273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밀라논나'를 만나보고 싶어졌던 건, 오히려, 영상 밑에 달리는 (1월 중순 시점) 21만 구독자들의 열렬한 댓글들 탓이 컸다.

"일-가정 양립, 육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또 버티셨는지 궁금합니다. ...... 하루하루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아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r**)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이 들어서도 자기 자신의 일을 하며 사는 여성이었음을 절실하게 깨닫는 요즘이에요."(매**)

"아직 취준생이라 인생에서 제일 불안정한 상태지만 곧 원하는 곳에 취업하고 제 앞날도 논나처럼 단단해졌으면 좋겠어요ㅎㅎ"(h**)

"이렇게 다양한 여성 롤모델들이 등장하기 시작해서 너무 행복해요. 덕분에 제 훗날이 너무 기대돼요."(살**)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인 건 일단 자백하고 얘기하자면) 몇몇 댓글들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까지 뜨거워졌다. 아마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공감 때문이었으리라. 이렇게 절실하게 묻고 싶은 것이 많고 듣고 싶은 말이 많아서, 그 질문을 받아 안기에 적당한 것으로 보이는 여기, '밀라논나'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이 사람들 어디서 얼마나 헤맸을까. 우리는 이다지도 '롤모델'에 목말라 있었나.

'밀라논나'가 내놓는 유튜브 클립이 쌓여갈수록, 그는 화려한 전직 디자이너라기보다 자신의 뜻과 꿈을 끝까지 살아내고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려고 노력해 온 굳건한 인생 선배의 이모저모를 좀 더 보여주고 있다. '밀라논나'의 '패션 컨설팅'이 소구하는 대상은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브랜드이자 본인의 유튜브 클립에서 잠깐 거론한 '아르마니'가 겨냥하는 소비자층에 대한 그의 설명과 일치한다. "매일 출근하는 지적인 여자를 위한 옷" 같은 패션.. 아니 인생상담 채널.

패션을 매개로, 어떻게 내 인생을 경영하며 나이를 먹어갈 것인가 고민하는 젊은이들을 향해 말을 걸고, 매일 출근하고 있거나 매일 출근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금의 2030세대들이 기대하는 스스로들의 노년을 앞서서 비춰주는 거울이 돼준다.

그래서 2019년의 마지막 날, 밀라논나를 만났다. 유튜브 클립을 보고 있으면, "제 채널을 보시는 여러분의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제가 좀 더 노력할게요."처럼, 자신의 시간을 헛되게 써오지 않은 사람에게서 우러나는 말들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걸어오고,

남성이 주변 여성들에게 미모사 꽃을 선물하는 3월 8일 여성의 날 이탈리아의 관습을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그 꽃을 받으면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요. 미모사 꽃은 만지면 금방 시들잖아요. 그게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거 같아서. 이걸 저한테 준 '남사친'이라고 하나요? 친구에게 '나 이거 주지 마! 나 이렇게 건드리면 금방 시드는 사람 아니야. 나 강한 사람이야'라고 놀렸어요." 마무리짓는,

'페라가모'를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명품 바이어인 동시에, 비행기에서 트렁크에 붙여주는 수하물표까지 재활용해 그 표의 끈끈이 부분으로 옷먼지를 떼는 근검절약과 환경보호 실천을 자연스럽게 자기 삶 속에서 해내는 생활인 '밀라논나'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면, 새해를 앞두고 나날이 고민이 많아지는 후배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뭔가 소중한 것을 좀 더 마음 깊이 얻어와 시청자들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 만난 '밀라논나'는 사소한 몇 가지에서 예상을 빗나갔지만 -유튜브의 '뽀샤시'한 화면보다도 훨씬 더 곱고 산뜻한 '실물' 자태, 놀랄 만큼 정갈하고 아늑할 뿐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자택 등- 결정적인 그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밀라논나
2시간을 훌쩍 넘긴 인터뷰와 카메라를 끄고 난 뒤에도 커피 한 잔을 놓고 그 뒤 계속 이어진 대화에서, 일단, '밀라논나'의 채널에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거의 들어냈다. 여기에는, '밀라논나'라기보다, '밀라논나'라는 난생처음 입어본 옷이 아직 신기한 장명숙 씨가 인터뷰를 통해 전달하고 싶어했던 말들이 들어 있다.

● "'상큼한 할머니'를 보여주고 싶다"

Q. 선생님, 유튜버로서의 활동명도 그렇고, '할머니'임을 유독 강조하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60대 후반의 여성인 것과 '할머니'라는 정체성이 딱 일치하는 것은 사실 아닐 것 같은데요.

어디를 봐도 할머니 나이죠. 그런데 유럽에서는 '할머니'란 용어는 안 쓰긴 해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한테 할머니라고는 안 하죠. 그냥 '마담'이라고 그려죠. 이탈리아 말로는 '시뇨라'고. 우리는 아줌마, 할머니, 꼰대... 다소 비하를 섞어 이야기하면서 이런 말들을 쓰는 경향이 있는데, 말에 세금 내는 것도 아니고 기왕이면 말을 좋게 하면 좋을 거 같긴 해요.

그렇지만, '할머니'라는 호칭은 편안하잖아요. 제가 유독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할머니'라고 하면, 따스한 마음이 드는 게 있어요. 그리고 전, 친손주는 없지만, 고모할머니이긴 하거든요. 그래서 '할머니'란 호칭에도 익숙하고요. 저는 정말 '삶에 찌들지 않은 상큼한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유튜브'에서 본인을 소개하며 했던 말). 그래서 집에서 한 발짝을 나가도 꼭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요.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고, 유럽에서 배운 것도 그런 거예요. 우리 동네 꼬맹이들이 내가 나가면 '예쁜 할머니' 나왔다고 나를 너무 반가워해요.
밀라논나
노인들이 표정이 없고, 어두운 표정을 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늙어도 개성이 있고 깔끔할 수 있다는 것.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저렇게 표정이 어두워지면 어쩌나... 그런 생각만 들면 얼마나 싫겠어요. 그래서 내가 댓글을 보면서 '아 그래. 내 진심이 동네 꼬맹이들한테도 전해졌지만 저기 젊은 '아미치'(이탈리아 어로 '친구들'. 장명숙 씨가 유튜브 구독자들을 부를 때 쓰는 말)에게도 전해졌구나.' 생각할 때가 있어요.

Q. 유튜브를 어떤 계기로 시작하시게 됐는지가 일단 궁금합니다.

어떤 분이 댓글에 '이 분이 유튜브를 해주는 건 사회환원'이라고 얘기했더라고요. 그 말이 참 고마웠어요. 제가 10년 전에 이탈리아(장명숙 씨의 입말을 따라 이하 '이태리'로 쓴다.) 문화에 관해서 책을 썼거든요. 그런데 그때가 리먼브라더스 사태(2008년 금융위기) 다음이에요. 제법 팔렸지만, 출판사에서 기대했던 것엔 못 미쳤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이태리에 관심 있던 분들은 많이 보셨나 봐요. 그리고 10년이 지났으니까.... 저는 여전히 이태리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이태리 반 한국 반 이렇게 살고 있는데요. 우리나라에 유럽 문화가 왜곡돼서 들어와 있는 것들이 많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책을 하나 더 쓸까 했는데, 제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후배가 '선생님, 그러지 말고 유튜브를 한 번 해보세요' 권하더라고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유튜브를 더 많이 봅니다. 젊은이들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으시면 책 보다 유튜브가 훨씬 나아요."라고요.

Q. 유튜브나 요즘 소셜미디어 같은 데 원래 익숙했나요?

유튜브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고. 컴퓨터는 할 줄 알아요. 이메일도. 하지만 영상 편집 같은 건 전혀 몰랐고. 친구들이 왜 요새 카카오톡으로 뭐 링크 보내주잖아요. 누르면, 음악 노래 나오고. (웃음) 그렇게는 봤죠. 인스타그램이 뭔지도 알고, 트위터가 뭔지도 알긴 다 알았어요. 그걸 제가 할 일은 없었어요. 그리고 사실 저는 제 삶을 남한테 보여주는 데 관심이 없었어요. 전 늘 저 살기가 너무 바빴어요. 졸업하자마자 결혼했고. 결혼하자마자 아이 낳고, 대학원 다니다가 유학 가고. 젊어서, 어려서부터 꿨던 내 꿈을 실행하느라고 남이 어떻게 살고 뭐 이런 게 관심이 없었어요.

요새 네일아트가 유행이잖아요. 그런데 저 대학 다닐 때 제 학교에서 저 모르면 가짜 학생이라고 그랬대요.(웃음) 그것도 나중에 알았어요. 열 손가락에 색깔 다 다르게 매니큐어 바르고 다녔거든요. 그 옛날에. 매니큐어를 안 바른 게 우리 큰애 낳고 이유식 만들면서 안 하기 시작했는데, 학창 시절엔 진짜 열 손가락 다 다르게 바르고 다녔었어요. 매일 어머니한테 야단맞아가면서 옷 사 입고 모양내고.(웃음) 내 삶에 충실하느라고 남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지금도 사실 없는 편이에요. 그렇잖아요. 내 삶이 바쁘면 (다른 사람 삶을 들여다보거나 내 삶을 보여주는 데) 눈 돌릴 겨를이 없잖아요.

아무튼 그렇게 후배 도움을 받아서 유튜브를 시작했죠. 후배 도움으로 촬영과 편집 등을 해주시는 분들은 있습니다. ('밀라논나' 채널 관리자에게 나중에 묻자, 유튜브에 프로모션 같은 건 전혀 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빠른 구독자 수 증가에 대해 "어떤 알고리즘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스킵' 없이 보는 시청자가 많은 영상들은 그만큼 관련 주제를-이 경우 패션 등- 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랜덤 노출 빈도가 올라가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덕을 봤나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얘기했다.) 댓글 읽는 법도 몰랐는데, 배우게 됐어요. 이게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요. 생각도 해야 되고, 무슨 말을 할지 정리도 해야 되고. 그리고 제가 유튜버가 되다 보니까 다른 유튜브는 뭐가 올라와 있나 봐야 되고. 그러다 보니까 좋은 유튜브도 발견하게 되고. 시간이 많이 걸려요. 얼마나 더 할 수 있을까요?(웃음)

Q. 더 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만하시면 구독자들이 너무너무 서운해할 거 같은데요!

내가 보여줄 콘텐츠가 바닥이 난다면 말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오락 콘텐츠를 할 그릇은 못 되거든요. 젊은 사람들이, 길을 묻는 나그네들이 제게 요즘 물어오는 것에는... (대답을 하고 싶어요.) 일단은, 이 시즌에는 나한테 이 역할이 맡겨졌구나, 그런 생각이 들긴 해요. 그래서 지금 스스로도 저를 다듬어 나가고 있어요.

제일 부담스러운 게 길거리에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알아봐요. 지하철에서 젊은 학생들이 "선생님, 우상이에요!" 하면서 사진 찍자고 하고, "오래오래 해주세요, 할머니 아니고 큰언니세요." 그러고... 코엑스에서 공예전을 하는 게 있어서 갔더니, 젊은 친구들 열 명 정도가 줄을 서는 거예요. 같이 사진 찍자고. 정말 놀랐어요.

그리고, 솔직히 아무도 안 만났으면 싶은 날 있잖아요.(웃음) 그런 날도 요새는 꼭 인사를 해오는 사람이 있어서, 이제 밖에 잠깐 나갈 때도 신경을 써요. 저는, 말한 것처럼, 원래 막 하고 다니지는 않았어요. 집 밖으로 나갈 땐 항상 색깔은 맞췄어요. 그런데 이제는 조금 더. 나만 편한 게 아니라 보는 사람도 좀 기분 좋게 했으면 좋겠다, 그 선까지 하는 거죠.

● "내 아이들이 자식 낳지 않으면 인류가 멸망하나. 이 아이들이 다 내 새끼 내 손주"

Q. 사실 제가 선생님을 찾아뵙고 싶다고 연락을 드리기까지, 선생님의 영상들에 달리는 댓글들의 온도가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2030세대를 비롯해서, 특히 젊은 여성들이 이렇게 '롤모델'을 갈구해 왔나, 다들 이렇게 롤모델에 목이 말라 있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러니까요... 이제 제 유튜브에 달리는 댓글들이, 패션 이야기보다, 그냥 다 인생상담이에요. 아, 내가 허투루 살면 안 되겠구나, 조금 더 반듯하게 살아야겠구나, 이런 생각도 하고요. 저는, 유럽사회를... 말하자면 제 연령대에선 제일 많이 본 사람이잖아요. 41년 전에 유학 갔으니까. 유럽의 사회 패러다임이 변하는걸 쭉 봤잖아요. 제 첫 영상에 "사회의 패러다임이 좋은 길로 가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 마음은 있어요.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애기들도 보러 다니는 거고요.

사람들이 "아휴. 손주가 없어서 섭섭하시겠어." 그러는데요. "뭐, 있으면 좋죠." 저는 그렇게 말하고 말아요. 하지만 속으로는 '아니, 사랑 못 받고 크고 있는 아이들한테 내가 사랑을 주면 되지. 길게 보자고. 내 자식들이 손주 안 낳아도 인류 안 멸망해. 이 아이들이 다 내 새끼 내 손주잖아' 생각해요.

● "제 세대에 커리어우먼이 별로 없잖아요… 전 '쟨 바쁜 애'였어요"

Q. 선생님 친구분들은 선생님이 이렇게 활발하게 유튜브 활동을 시작하신 데 대해서 뭐라고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동년배들에게서 오는 반응은 어떤가요?

(인터뷰 초반부에 가벼운 웜업 질문으로 생각하고 던졌는데, 장명숙 씨는 짧은 침묵과 함께 잠깐 먼 곳을 바라봤다.) 저는.... 친구 만날 새가 많이 없었어요. 계모임도 없어요. 솔직히... 10년 전에 만나나 10년 후에 만나나 비슷비슷한 이야기만 하는 건, 시간이 너무 아까웠어요. 그 시간에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게 저는 훨씬 낫더라고요.

제 세대에는 커리어우먼이 별로 없잖아요.... 그냥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 '워낙 바쁜 애'였어요.

41년 전(1978년)에 이태리 유학을 간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어요. 그때는 유학 가고 싶다고 갈 수가 없는 때였어요. 국가고시로 유학 시험을 봤어야 해요. 자격을 얻으려면. 그리고 유학생은 한 달에 1000달러밖에 갖고 나가지 못할 때였어요. 그래서 유학생은 당연히 자동으로 가난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어요. 우리나라가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단속한 거죠. 제가 우리 큰 아이를 잠깐 두고 나갔던 이유가, 1978년에 처음으로 유학생 부부가 동시 출국했던 게 우리 부부였어요. 그 전에는 그것도 허가가 나지 않았어요. 권애리 기자한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 같겠지만요.(웃음)

내가 1년을 공부하고,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할 것 같아서 외무부에 탄원을 했더니, 외무부가 (아이도 데리고 가려면) 이태리인 재정보증인을 세우라는 거예요. 대한민국 어린이를 데려가는데 이태리 사람이 재정보증을 왜 서요. 그 정도로 달러 유출을 걱정할 때였어요. 그런 것 생각하면 정말, 우리나라가 압축적으로 성장을 한 거죠. 6.25 전쟁 이후에 정말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잘 살아보자고 노력했지만, 그 안에는 삶의 양만 있지 질이 없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황폐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정서적인 배려라는 건 없었어요. 저도 그렇게 컸고, 또 저도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실수한 게 있고요.

Q. 부러워하는 친구들, 나도 일을 더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제 자기 일들을 좀 하고 싶어 하긴 하지만, 대개 보면, 또 손주들이 있으니까요. 친구들한테 나 이런 거 한다고 따로 말은 하지 않았는데, 저랑 아주 친한 몇몇이 보고 얘기는 하더라고요.

"너는 그거 했었어야 돼. 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사회적인 손실이었어. 너 잘못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라고 말해준 친구는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아냐. 나 아직도 일하잖아. 나 이태리에서도 일하고 있고..." 했더니, "그렇지만 네가 살아온 길이 요즘 젊은 여자들이 살아가고 싶은 길이잖아. 네가 이런 걸 진작 했었어야 돼.'라고 말해줬어요. 그런 얘기해 주는 친구들이 진짜 친구죠. 그 친구도 여전히 화랑을 하는...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친구예요. 그런 친구들은 응원해 줘요."

(기자가 은퇴 전 활동 시절의 자료들을 보고 싶다고 요청하면서, 사진 자료 등과 함께 청중년 시절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가 잠깐 이어졌다.)
장명숙 씨의 3~40대 시절 사진과 당시 잡지 기사
86 아시안게임 개/폐회식 무대의상을 디자인했어요. 그리고 이건... 다시 유학을 갔다와서 삼풍백화점 고문으로 일할 때죠. 정말.... 삼풍, 내 직장, 그 많은 사람들.... (장명숙 씨는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삼풍백화점 붕괴가 그의 삶에 미친 영향은 그가 연초에 올린 '밀라논나' 채널의 최신 클립에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하고 있다.) 삼풍이 1995년에 무너졌는데, 이건 94년이니까 제가 42살 때. 이때 벌써 나는 이렇게 조금씩 앞머리가 하얗게 되기 시작했어요.

삼풍에서 거액을 주고 페라가모 독점권을 땄어요. 그런데 바이어의 역할은 어떤 브랜드의 상품을 들여올 때, 시즌마다, 그리고 시즌과 시즌 사이의 연속성을 생각해서, 그 안에서 제대로 소비자들이 코디를 해서 입을 수 있도록 골라서 들여와야 해요. (이번 시즌에 이 브랜드에서 보라색 스커트를 샀으면, 다음 시즌에 거기에 맞출 니트 상의를 고를 수 있는 식으로) 명품 브랜드들은 그런 걸 많이 신경씁니다. 돈을 받고 판매권을 주지만, 판매가 시작된 곳에서 자기들 상품이 어떻게 코디될 수 있도록 어떻게 팔리는지 수준 유지를 하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당시 페라가모가 요구하는 수준의 바잉(구매)을 해 올 수 있는 바이어들이 없었어요. 페라가모가 '한국 백화점엔 못 주겠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서 삼풍백화점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저를 찾았어요. 저는 에스콰이어 고문을 하다가 막 끝내고 학교에서 강의하던 중이었고요. 그때 큰 애가 고3이었기 때문에 뒷바라지를 해야 해서 못하겠다고 계속 그랬어요.

그런데 출퇴근도 다 마음대로, 뭐든지 내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계속 부탁하셔서 일을 시작했죠. 제가 그때 페라가모 회장을 만나서 담판을 지었어요. 나를 믿고 이 백화점과 계속 해다오. 그래서 계속 진행이 된 거죠. 그랬는데 삼풍이 95년에 무너져서... 아무튼 그러니까 페라가모가 저보고 한국 판매를 맡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어요. 비즈니스 할 여건은 안 됐어요. 아들 둘에 남편도 보수적이었고... 일단 패션에서 직접 사업을 하게 되면 제대로 퇴근한다는 건 없으니까요. 아시잖아요. 그래서 페라가모는 일본 담당 바이어를 통해서 한국에 현지 법인 형식으로 들어오게 된 걸로 알고 있어요.

● "명분 없는 시간은 보내지 않는다"

Q. 지금 이태리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은퇴하시고, 선생님이 오래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는 이태리에 때때로 다녀오시는 건 줄 알았어요. (장명숙 씨는 이태리에서 혼자 촬영한 V-로그로도 클립을 만들어 올리고 있다.)

"아녜요. 여전히 일을 하고 있어서 가요. 저는 명분이 없는 시간은 보내고 싶지 않아요. 몇 년 전까지는 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에서 해마다 4월에 하는 디자인 박람회의 전문위원을 했어요. 하지만 그건 딱 3년만 하고 그만뒀어요. 저는 나이 든 사람이 제 경험을 갖고 기틀을 닦았으면, 그다음엔 그 자리를 후배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이형기 시인의 '낙화' 좋아하거든요. '떠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웃음)

국가에서 주는 자문료를 제가 계속 받을 일은 아니잖아요. 이 자리는 이 일을 계속할 만한 젊은 사람에게 줘라,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이태리 사람들 섭외는 도와주겠다, 고 하고 그만뒀어요. 지금도 사람들 섭외는 도와주고 있어요.

지금은 밀라노에서 강의를 해요. 동양 문화, 한국 문화에 대해서요.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우피치 미술관과 쌍벽을 이루는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 미술학교) 같은 데서 특강도 하고요. 물론 이태리에서 여행도 하고, 수녀님들 도와서 봉사도 해요. 재미있는 일들이에요. 하루하루가 저는 재미있고 색달라야 하거든요."

● "젊은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은 물려주고, 나이 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파"

Q. 선생님, 유튜브에서도 '재밌지 않아요?'라는 표현을 유독 많이 쓰시는 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삶을 대하시는 자세를 좀 엿볼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네, 저 그 말 자주 써요. 재밌어야 되잖아요. 영어에 'enjoy'란 말이 있잖아요. 고통도 'enjoy'하게 되면 즐거워져요. 제가 "재밌지 않아요?"라고 할 때의 재미는 'fun'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경험을 말하는 거죠. 새로운 경험을 저는 굉장히 좋아해요. 유튜브도 재미있어서 하고 있어요. 다 새로운 경험이잖아요.

● "재밌지 않아요?"
밀라논나
Q. 유튜브에서 선생님이 느끼시는 '재미'는 새로운 경험이라는 것 외에 다른 갈래도 있지 않은가요? 내가 이 정도의 연령대가 되었는데, 이제 내가 하는 일은 좀 더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거나, 그동안 내 인생에 쌓인 것을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의도한 건 아니지만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젊은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안 하려고 그래요. 학교 강의 같은 섭외가 많이 들어오는데, 그런 건 젊은 친구들도 할 수 있잖아요. 그건 장명숙이 안 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꼭 제가 해야 하는 일도 있잖아요. 그런 걸 찾아서 하고 싶어요. 이젠 내가 일을 선택하는 거죠. 젊었을 때처럼 생활기반도 잡아야 하고, 노후 대책도 세워야 하고... 그런 건 이제 없으니까요.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저는 연금이 얼마니까, 거기에 맞춰 살면 돼요. 형편에 맞게 씀씀이를 줄이고 당당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부자여도 샤넬 10개는 못 들어요.(웃음) 이제 제가 아르마니, 보석 이런 걸 더 사서 뭘 하겠어요. 저는 이제 줄이는 삶을 살고 있어요. 옷도 많이 나눠줬어요.

● "생활은 연금으로…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을 선택할 때"

그리고 유튜브에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 아들들에게도 늘 얘기해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단, 네 노후와 네가 하고 싶어 한 일을 한 그 책임은 네가 져. 사회에 해는 끼치지 마.'라고요.

이제, 제가 태어나 살다 죽으면서 이 사회에 대단한 건 못해도, 조금이라도 일조는 하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 돼서가 아니라, 각자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서 24시간 사시는 분들이 제일 가치 있는 삶을 살고 계시다고 생각하고,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 "하고 싶은 일을 해. 거기에 책임을 지고 노후대책은 해. 사회에 해는 끼치지 마."

Q. 은퇴 연령대가 되면서, 그런 생각이 더 강해진 건가요.

네. 그건 차이가 나요. (나이가 들면) 차이가 나게 돼있어요. 내 것만 보다가, 내가 떠날 때가 언제인가를 보게 되면요. IMF 때였어요. 저는 어느 회사에서나 이미 고문이었는데, 직원들이 저한테 와서 그러는 거예요. '저 퇴사해요.' 1997년 말에 다 구조조정을 했잖아요. 분명히 며칠 전까지 자기 집 샀다고 집들이한다고, 돌잔치한다고 나를 초대했던 젊은 친구들인데 구조조정을 당하는 거예요.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그런데 저는.. 제가 이태리 쪽과 교섭하는 일을 쭉 해왔고, 인맥이 중요한 그 사회에서 그런 걸 형성해 왔기 때문에 제가 그때 당장 (회사를) 나갈 수는 없었어요. 제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앞으로는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고, 타인을 위해서 삶을 좀 살아보자. 큰 부자는 아니어도 내 존엄성이 망가지지 않을 만큼 노후대책은 해놨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보자, 고요.

● "요새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이 유행하죠? 전 '52년생 장명숙'이에요."

Q.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내 시간을 활용해서 하고 싶은 일이 뭔가, 라는 생각을 하신다는 거죠.

네. 내 시간이 많아지죠. 아시잖아요. 한참 일할 적에는 내 시간이라는 게 없잖아요. 항상 쪼개요. 저는 15년 동안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났어요. 아들만 둘이라서요. 새벽에 아이들 학교 가게 준비해 놓고, 아침에 차려입고 나가서...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니다 저녁 6시에는 죽어도 퇴근을 했어요. 아이들 오는 시간이니까. 얼마나 바빠요.

● "살면서 가장 많이 먹은 점심은 '건빵'"

제가 평생 제일 많이 먹은 점심밥이 뭔지 아세요? '건빵'이에요.(웃음) 오전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오후엔 학교 가서 강의하고, 운전을 87년부터 했는데, 차에 항상 영어사전이랑 이태리어 사전 놓고 공부하고. 라디오로는 AFKN 듣고. 그러니까 점심 먹을 시간이 없으니까, 건빵이 든든하잖아요. 그때는 바나나가 비쌌어요. 지금은 싼데. 어떤 때는 바나나, 어떤 때는 요구르트. 그거 먹으면서 다음 근무지로 가는 거예요. 나는 너무 치열하게 살아봤기 때문에... 극기훈련하듯이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을 보면 딱해요.

● "그 삶을 알아요. 요즘 젊은이들이 달리는 울퉁불퉁한 길을 저도 달렸어요."

Q. 왜요?

아니까. 내가 그 삶을 아니까요. 나도 그 울퉁불퉁한 길을 어떻게 달리는지 아니까. 요새 '82년생 김지영'이란 소설이 유행이고 영화로도 나왔잖아요. 저는 '52년생 장명숙'이에요.

차 속에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이걸 내가 왜 하지. 왜 이러고 살아야 하지. 그런데 그럴 때마다 '나 어렸을 때부터 이것, 꿈이었잖아' 하고 스스로를 다잡았어요.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하라고 응원해주지 않는 길을 저 혼자 가면서 얼마나 실수가 많고 얼마나 힘든 게 많았겠어요." ('밀라논나' 유튜브 클립 中)
밀라논나
밀라논나
기자 : 선생님, 저 인터뷰하면서 감정적으로 동요하면 사실 안 되는 건데요. 좀 동요가 됩니다. 저도 일하는 게 솔직히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어렵고, 그만큼 더 재미있고... 고통스럽게 즐거운 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서, 고통스러운 재미를 좀 더 알아가고 싶은데요. 외로운 게 뭔지 모르는 성격이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사실 가끔 좀 외롭다는 생각은 들더라고요. 저를 가장 사랑해주는 주변 사람들까지도 모두 다 뭔가 '왜 그러고 사니, 그렇게 살 필요 있니'라고 말하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내가 달릴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사실 나밖에 없나, 싶을 때가 있거든요.

"알아요, 무슨 얘긴지."

기자 : 그런데 선생님이 저한테 괜찮아, 좀 더 달려도 돼, 라고 해주시는 거 같아서 좀.... 동요를 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기자가 인터뷰하다 울컥하면 어떡해.(웃음) 그래도 내가 그만큼 진솔하게 이야기를 해서, 권애리 기자가 이렇게 자기 얘기를 나한테 하게 되는 거겠죠? 다음에 올라갈 클립에서도 얘기했어요. 내 마음 안에 옹달샘 하나 만들어라. 그래서 에너지가 고갈될 때면, 그 에너지가 올라오도록. 그 에너지가 다시 모일 때까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세요."

기자 : 저, 조금 더 힘들게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일해온 거는 선생님께 비길 강도가 아니네요. 저도 좀 더 해도 될 것 같아요.

이태리 여자들도... 일하는 여자들은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가까이 살아요. 힘든 일이에요. 저는 결혼도... 이태리 유학을 너무 가고 싶은데, 결혼하지 않은 딸이 유학을 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해서, 같이 유학을 갈 수 있는 사람과 결혼했어요. 그리고 첫애는 정말 얼떨결에 생겼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이는 정말 축복이지만, 그때는 제가 굉장히 어렸고 아무 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우리 남편이, 애는 하나만 낳기로 하고 결혼했는데, 하나만 더 낳으라는 거예요. 이건 계약 위반이잖아요(웃음). 그래서 8살 터울이 지게 둘째를 낳았는데, 둘째를 낳으면서 내가 내건 조건은 나 혼자서 유학을 한 번 더 가게 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아이 낳고, 아시안게임 개/폐회식 무대의상 디자인 끝내 두고, 85년 가을부터 86년 봄까지 메이크업을 배우고 '라 스칼라'에서 연수하고, 나중에 라스칼라에서 우리나라 오는 것도 주선했죠.

저는 예전에, 직원들이 절 굉장히 좋아했던 게, 아침에 회의를 하잖아요. 그럼 패션회사 같은 데 여자 실장들이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이사들이 괜히, 뭐, "김 실장, 시집 안 가?" 그러는 거예요. 전 그럴 때 정색을 했어요. "이사님이 김 실장한테 신랑감이라도 소개해 주신 적 있어요?" 바로 그랬어요.

결혼하면 애를 낳아라, 하나 낳으면 하나 더 낳아라, 내가 아들을 둘 낳았더니 이제 딸을 낳아라.... 그땐 정말 싸우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랬어요. "그래, 내가 딸 낳으면 네가 키워줄래?" 제가 둘째 낳고 그랬어요. "나한테 둘째 낳으라고 했던 사람들, 다 줄 서서 하루에 한 번씩 와서 우리 애들 봐줘야 된다"고. 봐줄 것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남의 인생에 간섭을 하는지요.

● "'금수저'란 단어 정말 싫어"

Q. 젊은이들에게 좀 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요?

저 이 얘기 꼭 하고 싶어요. 금수저, 은수저, 엄친아, 이런 단어 너무 싫어해요. 그러면 그 아들 입장에서 '내 친구 엄마는 이렇지 않은데'라고 하면 뭐라고 말할 거예요. '엄친아' 같은 단어가 나오는 사회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거예요. 서로 비교하면서.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면서.

이태리 유학할 때 너무 좋았던 건, 사람들이 자식을 부를 때, 미오 아모레(내 사랑), 미아 스텔라(내 별), 내 보물 이렇게 불러요. 우린 그러지 않잖아요. 애를 낳아 키우면 공부를 잘 해야 하고. 솔직히 제가 그렇게 키워졌거든요. 저는 자식은 공부 잘 해야 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힘들게 성장하면서 공부를 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자식한테 그걸 바란 거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자식들에게 일류, 일류 하셨구나... 그런데 그게 사실 좋은 건 아니잖아요.

● "제일 중요한 것, 나 자신으로 사는 것"

Q. 지금 선생님에게 제일 중요한 건 뭔가요?

나로 사는 거요. 나 자신으로 사는 거예요. 사회환원... 그런 거창한 것보다도.. 그냥 예전에 그런 게 있었어요. 권애리 기자도 알지 모르겠는데, 여의도에서 어려운 사정으로 돈이 없어서 실명하게 된 젊은이가, 너무 분하니까, 차를 훔쳐서 여의도 광장에서 광란의 질주를 했어요. 그때 여러 명이 죽었는데, 8살짜리 남자아이도 하나 있었어요. 그 젊은이도 불쌍하고, 아이도 불쌍하고... (실명 위기에 놓였던 젊은이를) 누군가가 케어했다면 그렇게까진 안 갔을 거 아니에요. 그 누군가가 이 사회면 가장 좋은데, 사회에서 그런 것이 충분치 않다면 나도 보탬이 되고 싶다. 우리 유튜브 클립에도 올렸지만, 후원이나 봉사는 오래전부터 해오긴 했어요. 저도 그 옛날에 비교적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으니까 유학도 갈 수 있었던 걸 스스로 알고요. 그리고 제가 가톨릭 신자거든요.
밀라논나 손
밀라논나 손
● "'책임지는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싶어"

Q. 선생님이 지금 나 자신으로 사는 방법으로 제일 충족이 되는 일은, 후배들과 다음 세대와 나누는 것인가요?

유튜브도 그런 맥락이 좀 있긴 한 거 같아요. 제가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옷 이렇게 입으면 좋은데' 이럴 순 없잖아요. 패션 유튜브들이 너무 많은데, 너무 옷을 사라고 해요. 아직 자기 가치관이 정립되기 전의 청소년들은 '그래야 되나 보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건 아니지 않나. 저는 다양성을 얘기해 주고 싶어요. 많이 사고 싶으면 사. 마음에 안 들면 누구 주고, 또 사고 싶어? 그래, 그것도 좋아. 단, 네 노후대책은 네가 생각해.

● "왜 인생의 경험을 지우고 젊어 보여야 하나"

Q. 선생님의 헤어스타일에도 '아미치'(구독자)들이 관심이 많습니다. 염색하지 않고, 하얗게 세게 내버려 둔, 그리고 손수 자르시는 짧은 머리가 멋있다고 많이 그래요.

제가 머리가 길고 염색을 했다면 좀 더 젊어 보일 순 있었겠죠. 그런데 전 60대 후반이거든요. 60대 후반이 왜 굳이 40대로 보여야 하죠? 내가 젊어 보여야 할 이유가 뭐죠? 내가 40대에서 지금 67세가 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왜 40대를 또 해요. 저는 항상 그걸 반문을 해요. 좋아요. 이제 와서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난다고 쳐도(웃음) 그럼 이 흰머리도 좋다는 사람이 와야 진짜 연애를 하는 거죠. 안 그래요? (웃음) 굳이 염색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이제 성형수술 안 한다, 내가 이 주름 하나하나 생길 때마다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는데'라고 말했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저도 제 경험을 지우고 젊어 보이고 싶지 않아요.

기자 : 그런데 선생님은... 머리카락만 하얀 편일 뿐 실제로 뵈니까 주름도 하나 없으신데요.....

파운데이션 같은 것도 거의 발라본 적이 없었어요. 마사지 한 번 받아본 적이 없고요. 의상학과 선생이니까 옷은 갖춰 입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리미리 내일 입을 거 챙겨봤자, 비가 오면 또 꽝이고, 그러면 다시 맞출 시간도 없었어요(웃음) 그래서 색깔만 맞춰 입는 게 습관이 됐어요. 이태리 멋쟁이들 콘셉트가 그거예요. 브랜드는 중요하지 않아요. 색을 맞춰요.

이제 막 애써서 투자해서 젊게 보이려고 하는 건... 얼마나 아까워요, 그 돈이. 저는 항상 그렇게 생각해요. 물이 흘러가는데 그걸 억지로 꺾어 누르려면 얼마나 힘들어요. 거기 에너지를 쓰느니, 그냥 물이랑 같이 흘러가면서 산천 몇 개 더 보는 게 낫지 않아요?

● "노인의 우위는 시간…살아온 만큼 깊어진 감수성으로 청년 대하고 싶다"

Q. 선생님이 젊은 사람들과 만나실 일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 같은데요. 나이차가 나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 고려하는 게 있으신가요?

젊은 사람들과 만나면, 그 사람들을 좀 편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앉아서 대접받으려고 하면 어떤 젊은이가 좋아하겠어요. 요즘 나이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예능 같은 것도, 젊은 사람들이 늙은이 때문에 불편해하는 것 같은 양념을 치는 건 싫어요. 왜 늙은이 역할은 철딱서니 없게 만들어 놔야 재미있나요? 늙은이는, 오래 살았잖아요. 젊은 사람보다. 이 세상에 연륜은 뭘로도 못 쫓아와요. 권 기자님이 책을 아무리 많이 읽었어도 나보다는 덜 읽었을 거 아니에요. 늙은이가 젊은 사람에게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시간뿐이에요. 더 오래 산 만큼, 깊어진 감수성만큼, 젊은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밀라논나
Q. 아들들에 대해선 어떠세요? 두 분 다 결혼을 안 했다 하셨는데, 정말 바라는 게 하나도 없으세요?

전 다 좋아요. 아들들이 (그냥 결혼식 안 하고) '어머니, 저 요즘 이 사람이랑 살아요.' 그래도 좋아요. 전 '10번 결혼해도 돼. 나만 귀찮게 하지 마' 그래요. (웃음)

● "며느리는 내 아들과 같이 사는 여자"

Q. 그래도 며느리가 생긴다면, 어떻게 관계 설정을 하고 싶으세요?

그냥 오고 싶으면 오고. 며느리는 손님. 내 아들과 같이 사는 여자. 그거죠. 전 유럽에 41년 전부터 왔다 갔다 했잖아요. '왜 얘네들한테 없는 고부갈등이 우리에겐 있지?' 끊임없이 비교하다 내린 결론이에요.

아, 저야 며느리 노릇 다 했죠. 시아버지 병원에 입원해 계시면, 새벽에 일어나서 좋아하시는 죽 쑤어가지고 출근 전에 가지고 갔어요. 그러면 시아버지가 '너희 시어머니도 이거 좋아하는데.' 그러시는 거예요. 전 갈등이 싫었기 때문에, 아 네, 하고 다음날은 죽을 두 개 쑤었어요. 그래서 차에 싣고 가서 근무하다가 점심시간 이용해서 시아버지 갖다 드리고, 시댁 어머니께 갖다 드리고, 그러고 다시 회사를 갔어요. 그러니까 점심을 못 먹고 건빵을 먹었죠.(웃음) 싸우기가 싫어서 저는 그렇게 살았어요. 하지만 그건 80년대, 90년대의 일이고, 이제 밀레니엄이잖아요. 밀레니엄 된 지 20년이 지났는데, 내가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 내 자식들이 날 뭘로 생각하겠어요. 내 자식의 여자들은 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들은 제 아들들이랑 결혼했지, 이 남자의 사랑받는 여자가 되려고 결혼한 거지, 층층시하 섬기려고 온 게 아니잖아요. 그게 꼰대죠. 그런 꼰대는 되고 싶지 않아요.

● "아들들은 해외에 있는데, 아들 친구들이 토요일에 나를 초대해요"

Q. 아들들이 원하는 삶에 간섭을 하지 않으신다는 거군요. 단, 스스로 책임을 진다면.

네. 우리 아들은 글을 쓰는 작가이고. 자기 생계는 자기가 책임져요.

이번 주 토요일에 우리 아들 친구들 14명이 저를 초대해요. 우리 아들은 영국에 있는데요. 제가 아들 친구들에게 세뱃돈도 줄 거예요. 많이는 못 주죠. 그 아이들 다 돈 벌고 있고. 중요한 건, 우리 아들이 여기 없다고 우리 아들 친구들이 저를 초대해서 밥을 같이 먹는다는 거예요.(웃음)

얼마 전엔 아들 친구들에게 물어봤어요. 옛날에 그 '고고클럽'이란 걸 한 번도 못 가고 결혼해서 너무 억울하다고. 그랬더니 '아 어머니 클럽 못 가보셨어요?' 그러고 우리 아들 친구들이 절 데리고 이태원에 있는 무슨 클럽에도 갔었어요. 우리 아들 친구들이 거길 주름잡더라고요.(웃음) 아무튼 저는 늘, 네 인생 책임지면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부모가 노후대책은 해놨으니까,라고 말해요. 그리고 딱 얘기했어요. "엄마가 치매 조짐 보이면 비싼 데 넣지 마. 제일 싼 데 넣어. 돈 아까워."

● "기사 딸린 차 뒤에 앉아 다니다가, 그걸 놓칠까 봐 사람이 얼마나 치사해질 수 있겠어요"

Q. 그런 얘기도 하세요?

네. 미리미리 (마음속으로) 살아보거든요. 내가 80 됐을 때 살아있을까, 뭐 하고 있을까. 생각해요. 재미있지 않아요? 저는 이게 재밌어요. 저는 인생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에스콰이어 고문을 할때, 회사에서 차를 바꾸라고 하는 거예요. 회사 차를 준다고.

저는 거절했어요. 좋은 차 타는 건 '가오' 잡는 거잖아요. 그런데 제가 제 사업을 할 체질은 아닌 것 같고, 저는 아이들 키우면서 일하는 여자였고, 남편은 대학 교수라서 평생 월급쟁이 와이프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기사 딸린 '로열살롱' 타고 뒤에 앉아 다니다가는, 그걸 놓칠까 봐 사람이 얼마나 치사해질 수 있겠어요.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돈은 덜 쓰면 되죠.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거. 이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거. 이제 24시간을 정말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거.

● "이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거. 24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면서"

전 이제는 대사관 파티 같은 것도 잘 안 가요. 가면 뭐.... 맨날 샴페인 터뜨리고 "나중에 또 봐요" 그러고 오는 거잖아요. 유튜브에서도 얘기했지만, 정말 죽을 때까지 변화하고 싶어요. 진짜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우리 30대 때는 내가 70대 가까워졌을 때 유튜브라는 게 생기고 내가 이런 걸 하리란 걸 상상도 못 했단 말이에요. 이제 인공지능하고도 경쟁해야 하는 세상이고.(웃음)

Q. 선생님 새해 계획이 있으신가요.

휴대폰 바꾸려고요.(웃음) 휴대폰 쓰는 법을 더 배워서, 제가 좀 더 잘 찍어서 올리고 싶어요. 제가 이태리에서 일하면서 본 것이나 여행한 곳이나 정말 보여드리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어요. 유튜브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여러분이 제 채널을 보는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

'밀라논나'는 언제가 될지 모를 마지막 클립에서 꼭 전하고 싶다는 메시지가 있다. 본인의 채널에서 그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충실히 보여주고 들려준 후에 말하고 싶다며, 어떤 메시지인지는 '오프 더 레코드'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며 이야기했다. 기자로서 보다, 옷도 잘 입고 싶고, 귀고리는 뭘 달아야 티 안 내고 예쁘면서도 '힙'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되고, 무엇보다도 내 인생에서 이제 제대로 달려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냥 인생 후배로서, 밀라논나의 그 패션철학, 또는, 패션을 매개로 전달하고자 하는 인생철학에 120% 공감했다. 너무너무 누설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지만, '아미치'들이 '밀라논나'의 유튜브 클립에서 제대로 기승전결을 통해 논나와 함께 그 결론에 도달하시라고, 일단은 혼자만 들어둬야 할 것 같다.

그 마지막 클립이 기대되지만, 마지막 클립은 볼 날이 없으면 싶기도 하다. 좀 더 많이, 좀 더 오래, 다른 '아미치'들과 '밀라논나'의 클립들을 함께 보면서, 그 클립들 밑에 여러 사람들이 남긴 말처럼 '밀라논나'가 비춰주는 나의 내일을 좀 더 기대하며 새해를 살고 싶다. "이제 진짜 24시간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밀라논나처럼 말할 수 있는 노년을 맞기 위해 정말 더 열심히, 제대로 일하면서,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정성을 다 하고 싶다.

저렇게 살면 되는 걸까. 또는, 저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어쩌면…역시, 저렇게 살아도 되는 거잖아.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틀리지 않았어. 좀 더 달려도 되는 거야.

자신의 꿈과 노력과 고통을 긍정해 주는 이 인생 선배를 보면서, 오늘도 열심히 자기 길을 달리고 있을 많은 '아미치(친구들)'도 기자와 마찬가지 마음일 것이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