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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나를 살리는 것도 희망, 죽이는 것도 희망"

세밑에 만난 최승우 형제복지원 생존 피해자

[취재파일] "나를 살리는 것도 희망, 죽이는 것도 희망"
2019년 12월 30일. 종일 궂더니 밤중엔 진눈깨비가 내렸다. 택시에 내려 1백 미터도 안 될 거리를 걷는데 홑겹을 입은 사람처럼 떨었다. 국회 앞엔 백팩을 멘 어머니들 몇 분이서 "공수처법 무효"를 외치며 경찰과 실랑이했다. 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에 다다르자 2년 전부터 자리한 농성장이 보였다. 네 귀퉁이가 있다 뿐이지 길바닥에 앉는 것과 매한가지인 천막도 그대로였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 씨(50)가 천막 문을 걷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후에 공수처법은 통과됐더만요."

지척에서 일어난 일을 휴대폰으로 기사를 보고 알았다 했다. 강풍이 쉬지 않고 천막을 때려 대형 트럭이 인도로 돌진하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바닥의 냉기가 온몸에 전해졌다. 가뜩이나 좁은 천막인데 무릎이 부딪치게 가까이 앉아야 서로 하는 말이 들렸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최승우 씨

- 농성장엔 언제 돌아오셨어요
= 저저번 주 금요일에 퇴원하고. 아버지 몸이 안 좋으셔서 (고향인) 부산에 잠깐 들른 거 빼곤 일주일 정도 됐어요.

- 병원에서 만류했다면서요
= 회복도 안됐는데 어딜 가냐고. 24일을 물이랑 소금만 먹고 지냈거든요. 병원에서 다시 조금씩 먹는 걸 시작하는데 그게 또 힘들대. 몸이 너무 망가져서… 단식하러 올라갈 때만 해도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법이 통과되는 걸 관철시키고 내려 와야겠다 했는데… 정말 물, 소금만 먹었어요. 혈압이랑 당뇨가 있다 보니 밑에서 효소를 올려 보내줬는데 그게 또 안 맞아서… 의사 말로는 건강한 일반인이 50일 정도 단식한 것과 같은 상황이래요. 나 같은 고혈압 당뇨 환자가 24일 단식한 거면.

두어번 본 사이인데,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얼굴이 상해 있었다. 간간이 터져 나오던 특유의 너털웃음도 찾기 힘들었다.

- 여기서 지내는 게 어떤 건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다시 올 생각을 하셨어요.
= 의사 선생님들이 만류 안했으면 병원에서도 곡기 끊으려 했어요. 의식 돌아오자마자, 다시 올라가려고 했어. 주변 사람들이 농성도 단식도, 사람처럼 살기 위해 하는 건데 목숨은 유지해야 한다, 목숨까지 걸어선 안 된다, 붙잡대. 지금도 사실 하루에 몇 번씩 올라가고 싶어. 20대 국회에서 또 넘어간다고 하면… 나는 이제 더….

최 씨는 과거사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 개정안)의 법사위 통과를 촉구하며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2년 넘게 노숙농성을 벌여온 농성장 천막 바로 옆, 5미터 높이의 지하철역 출구 지붕 위였다. 서 있기에도 부족한 좁은 공간인 데다 조금만 잘못 디뎌도 미끄러지기 쉬운 모양새였다. 2년간 지낸 농성장이 벼랑 끝인 줄로만 알았는데, 스스로를 벼랑에 떨어지기 일보직전까지 내몬 셈이었다. 곡기를 끊은 지 24일째인 지난 11월 29일, 결국 그는 병원으로 이송됐다. 신고를 받은 구급대원이 출동해 인근 병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오갈 데 없이 하루 24시간 있다 보면 정말 생각만, 생각만, 한단 말이에요. 과거사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생각. 온 신경이 국회로 가 있어요. 우리 법 어떻게 되나, 누가 챙겨주고 있나. 매 순간 초조했어요. 민주당 의원님들이 나중엔 올라오셔서 계속 설득하셨어. 이러다 정말 죽는다고. 법사위 통과 반드시 시킬테니 일단 내려가자고. 내가 '19대 때도 그러시더니 어떻게 믿나. 본회의까지 통과시켜야 한다' 했지. 밑에서 종선이(** 최 씨와 함께 노숙농성을 해 온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는 내가 잘못될까 봐 애가 타서 지가 먼저 죽겠더라고. 혼자서 로텐더 홀 가서 1인 시위도 하고 그랬대. 피켓 들고서. (단식농성 중인) 지붕에서 그 소식을 전해 듣는데, 정말…"

최 씨가 쓰러졌던 11월 29일은 자유한국당이 본회의에 상정될 모든 법안에 대해 필리버스터, '무제한 토론'을 신청한 날이었다.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 표결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도였다. 199건의 민생 법안을 처리하려했던 본회의는 무산됐다. 상정조차 되지 못한 과거사법엔 형제복지원 외에도 권위주의 시절 국가 폭력에 의해 피해 입은 여러 사건이 포함돼 있었다.

"의원님들이 반드시 어떻게 해보겠다고 다녀간 뒤에 희망이 생기니까 잠을 한 숨도 못 자겠더라고. 너무너무 기대가 되는 거야. 기대를 안 한다고 해놓고 기대를 하고 있더라고, 내가. 그래놓고 다음날 한국당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는 기사가 나오니까… 정신을 놔버린 거지. 의식을 잃어서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앞이 하얗게 변하면서… 제대로 못 잔 상태에서 흥분해 있다가 갑자기 실망을 하니 온 힘이 쭉 빠지면서… 신경계가 교란을 일으키더라고… 일어나니까 병원이더라."


돌아온 농성장. 다시 시작한 노숙농성은 이제 783일차. 최 씨는 이틀 뒤 기상예보에 체감온도가 영하 25도라고 했다.

"그래도 고공단식하면서 하나 얻은 게 있어. 전기라도 끌어줄 테니 올라가지 말고, 밑에서 지내라고… 그래서 이제 휴대폰 충전도 되고 불도 켤 수 있게 된 거예요."

최 씨가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위한 운동을 시작한 지 7년이 되어간다. 그는 어릴 적 형제복지원에서 지냈던 4년을 '짐승으로 살았던 악몽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부산시와 위탁계약을 맺은 이른바 '부랑인 강제수용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은, 실은 '한국판 아우슈비츠'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현대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공간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거리의 부랑자를 단속한다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들였다. 이들이 끌려간 형제복지원에선 10여 년간 3천 명 넘는 사람들이 강제 수용돼 감금됐고 노역에 폭행, 살해까지 당했다. 감금한 근거는 박정희 정권 때 만들어진 내무부 훈령이었는데 '부랑자'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고아나 장애인까지 끌려갔다.

우연히 이들의 강제노역 현장을 목격한 김용원 당시 검사(현 변호사)가 수사에 착수하면서 형제복지원의 참상은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수사 결과 10여 년간 숨진 사람이 513명이나 공식 확인됐지만, 암매장된 희생자의 수도 그 못지 않을 것이란 얘기가 있다.

진상 규명의 길은 험난했다. 수사 착수부터 진행까지 모든 과정에서 방해, 축소의 시도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김용원 당시 검사는 '정부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서 수사에 착수한 것 아니냐'며 부산지검이 외압을 행사했다고 말했다.

재판 과정도 비상식적이었다. 고등법원이 유죄로 판단한 형제복지원 원장의 특수감금 혐의를 대법원이 무죄로 돌려보내는 일이 두 차례나 반복됐다. 당시 고법 재판부는 "대법원 판결이라 어쩔 수 없이 무죄를 선고한다"면서도 "위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고 판결문에 썼다. 결국 형제복지원 박인근 원장은 국고보조금 횡령 등 몇가지 작은 혐의로만 재판에 넘겨져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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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단란했던 최 씨의 가정이 무너진 것도 형제복지원 때문이었다. 아껴먹으려 가방에 넣어둔 급식 빵을 훔친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경찰의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형제복지원에 입소된 게 1982년 4월. 가혹한 폭행과 강제노역으로 눈 앞에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세상 밖에선 아무도 실상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성폭행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탈출하는 사람들이 다시 잡혀들어오는 모습을 볼 때면, 무력해져 죽고만 싶었다.

"온갖 인권유린을 당하며 버티고 있는데, 3년 뒤엔 제 친동생까지 끌려 들어온 거예요. 여기가 어디라고… 저 하나도 모자라 동생까지 죽임을 당했는데, 지금에라도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거죠. (** 최 씨의 동생은 형제복지원을 나오고 나서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말 평범한 가정이었거든요 우리 집이. 우리 그냥 정말 국민이었는데…"

"괴물같이 살았어요. 보고 배운 게 그것 뿐이니까요. 내 불행한 삶의 이유가 나 때문이지 않나 한동안 착각을 했어요. 아닌데. 국가가 범죄를 저지른 건데. 그 동안 내 동생이 잘못된 게 먼저 들어온 나 때문이진 않나. 나 뿐 아니라 내 부모까지 원망했던 거죠. 지금부터라도 사람답게 살려고 이렇게 발버둥치는 거예요. 진상규명만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국가폭력이나 사회적 차별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는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를 출범시킨 원동력이었다. 5년간 활동했던 이 위원회는 피해자들의 해묵은 소망을 들으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미처 다루지 못한 사건들을 무수히 남겨둔 채 쫓기다시피 문을 닫았다. 해방 이후 반세기 이상 쌓였던 문제들을 5년의 한정된 시간으로 치유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한 번의 기회를 놓친 많은 사람들은 보수 정권 9년을 버티면서 촛불을 들었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기를 기원했다.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이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가고 있다.
- [창비 주간논평] 평화와 포용 사회를 위한 과거사 문제 해결
 

삭발, 1인 시위, 노숙농성, 단식. 이제 최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 세상은 아직도 최 씨가 온 정성을 다해 바라온 것들에 대해 답을 들려주지 않고 있다.

"사람이 참 그래.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버티는 거거든요. 근데 이번에 쓰러질 때 보니까, 사람이 희망을 잃어서  또 한 순간에 무너지더라고. 희망 때문에 살고 희망 때문에 죽는 거야. 다시 이렇게 돌아올 때엔, 이젠 진짜 희망이 없으면 안되겠는 거예요. 없어도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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