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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유죄와 무죄 사이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어떤 양형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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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10 : 유죄와 무죄 사이에서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어떤 양형 이유>

"살인 재판을 끝낸 뒤 맛있는 점심을 먹고, 강간재판을 마친 뒤 금목서 향기를 맡으며 산책을 한다. 내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라고, 다음 날이면 무자비한 학교폭력 사건을 처리할 것이다. 세상이 평온하고 빛날수록 법정은 최소한 그만큼 참혹해진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학대하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폭력으로 누군가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다면, 그곳에는 더 이상 가정이라 불리며 보호받을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


저자의 말처럼 현직 판사가 책을 내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세기의 재판' 만이 아니라 여느 재판에서도 그 사람의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미치는 판결을, 판사들은 어떤 마음으로 내리게 될까.

저는 북적북적 외에 '마부작침'이라는 이름의 데이터저널리즘팀에서 데이터에 기반한 취재와 보도를 하고 있는데 최근 '부부 살인' 사건 판결문을 수집해 분석한 기사를 썼습니다. 취재하면서 '부부 살인' 사건 판결문을 백 수십 편 읽었는데 그중 눈길이 갔던 판결문의 양형 이유(선고형을 그렇게 정한 이유)를 조금 옮겨보겠습니다. 정확히는 '양형 이유'를 상세히 적은 이유에 대한 대목입니다.

"... 피해자의 허망한 죽음을 애도함과 동시에, 이러한 비극적 결과를 전적으로 피고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 없는 사정을 일부 인정하고 이를 그 양형에 참작한 결과라는 점...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에서조차 개인의 음주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와 같은 비극적 결과에 이른 데 있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없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점, 그리고 일반 폭력과 달리 가족이라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심화됨으로써, 피해자 개인의 건강과 안전만이 아니라 가해자와 자녀,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건강과 안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쳐 결국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거나, 세대 간에 전이되거나, 사회 비행과 범죄로 확대되어 폭력을 구조화시키는 이 끔찍한 가정폭력의 참혹한 결과를 돌아보고 이를 근절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강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환기하고자 함에 있음을 여기에 굳이 부기해 둔다."

딱딱하고 건조한 글 입니다만, 그래도 여느 판결문과 사뭇 다릅니다. 보통은 이러저러해서 가중했고 저러 이러하여 감경했다, 그 정도만 나와 있거든요. 그래서 특별히 '상세히 적은 이유'라고 밝힌 거죠. 위 판결은 남편을 칼로 찔러 사망하게 한, 상해치사죄로 재판을 받은 아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판결문을 쓴 걸까 판사 이름을 보니 박주영 판사였습니다. 오늘 함께 읽는 책, <어떤 양형 이유>의 저자입니다.

판결문은 주문과 범죄사실, 판단, 양형 이유를 중심으로 적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판결을 내리는 것도, 그 판결에 따라 크든 작은 운명이 갈리는 것도 사람인데 기록에 묻혀 사람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록보다는 사람을 바라보려 노력했던 한 판사의 양형 이유가 담겨 있는 책입니다.

"성범죄 사건에서 수범자(受範者)에게 부과된 정언명령이나 금지 규정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그리 복잡한 기술이 아니다. 간단하고 단순하다. 다른 사람의 몸을 허락 없이 만지지 말라. 폭력이나 협박, 이와 동일시할 수 있는 힘을 사용해 간음하지 말라. 무엇이 어려운가."

"판사는 결코 법이라는 인식의 틀을 닮으면 안 된다. 인식의 틀이 강퍅할수록 인식하는 주체는 다정다감해야 한다. 그것이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 재판을 맡기는 이유다. 판결과 재판이라는 비정한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결코 서정을 잃어서는 안 되는 모순적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나는, 재판을 하다, 기록을 읽다 몰래 운 적이 많다. 재판은, 법정은, 아니 어쩌면 인생 자체가 슬프도록 생겨먹은 것 같다."



"이 책은 곧 1심 판결문이고, 독자는 당사자이면서 곧 상급심이다. 상급심은 1심의 결론을 받아들여 판결을 인용할 수도 있고, 결론이 틀렸다고 파기할 권한도 있다... 염치없게도, 이 판결이 일부라도 인용되기를 바라지만, 전부 파기되어도 항소는 없다. 국민은, 불복할 수 없는 상급심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여러 방면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한국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럭저럭 굴러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나. 자기 자리에서 업의 본질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되물으며 소임을 고민하고 실천하고 또 반성하고 그런 이들 덕분에 그러하다고. 이 책의 저자 같은 이들이 '법'이라는 엄중하고 무자비해 뵈는 때로는 불공정해 보이기만 하는 사회의 근간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도 책을 읽고 해 봤습니다. 저도 그러도록 노력해야 할 텐데... 길은 멀고 눈은 침침합니다.

*출판사 김영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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