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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단언컨대, 이보다 더 강한 반전은 없다- 프레드 울만 동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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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08 : 단언컨대, 이보다 더 강한 반전은 없다- 프레드 울만 <동급생>

"그는 1932년 2월에 내 삶으로 들어와서, 다시는, 떠나지 않았다."

프레드 울만의 중편소설 <동급생>은 이 한 줄로 시작합니다. <동급생>은 엄청난 울림의 반전을 담은 마지막 문장으로 유명한 작품인데, 첫 문장도 이렇게 인상적입니다. 삶과 역사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으스러지지 않은 특별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한 마디로 참 제격입니다. 울만은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파고드는 묵직하고 로맨틱한 문장을 적재적소에 구사한 작가였습니다.

1971년 출간된 <동급생>은 나치즘의 그림자가 독일에 드리우기 시작하던 193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유대인 소년과 '게르만 귀족' 소년의 우정을 통해 그 시대를 덮쳤던 거대한 광기와 부조리를 돌아본 작품입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에 <데미안>이 남았다면,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독일에는 이 소설이 남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데미안>처럼, 이 책도 전쟁을 전후한 시기 두 소년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사실 이 두 작품은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르고요. 저는 <데미안>보다도 이 중편소설을 더 좋아합니다.

(<데미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서 처음 읽었을 땐 보이지 않았던 불편한 점들이 눈에 좀 띄는데) 이 소년들의 이야기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이야기처럼 원형적이고 시적이면서도, 훨씬 더 소박합니다. 그리고 <데미안>에는 없는, 애정을 느끼게 하는 투박함과 가슴이 미어지는 현실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데미안>보다 훨씬 더, 섬광처럼 찰나처럼 스쳐 지나가는 소년기의 결벽적인 순수성과 그런 순수성에 대한 갈구가 부서지기 시작하는 순간들에 마음 아프게 공감하게 됩니다.

이 책은, 작품 자체도 걸작이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출간되면서 실렸던 서문들이 또, 명문입니다. 이 이상 더 이 작품을 잘 소개하는 글을 쓰기는 힘들 것 같아서, <동급생>을 유럽에 널리 알리는 데 공헌했던 작가, 아서 쾨슬러의 서문 마지막 대목을 공유합니다.

"… 그는 결국 독일에서 쫓겨나고 그의 부모는 자살을 하도록 몰린다. 그런데도 오래도록 남아있는 이 중편소설의 뒷맛은 네카어 강과 라인 강변의 짙은 색 나무로 지어진 가게들에서 나오는 그 지역 와인의 향기다. 바그너의 분노라고는 없어서 마치 모차르트가 <신들의 황혼>을 다시 쓴 것 같다. 인종 청소를 위해 시체들을 녹여 비누로 만들었던 시기를 다룬 두꺼운 책들이 이제까지 수백 권 쓰였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얇은 책이 서가에서 영원히 차지할 자리를 찾아낼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로부터 20년 후 1997년 프랑스 언론인 장 도르메송이 썼던 서문은 도르메송 개인의 삶에서 우러나온 공감이 어우러져 놀랍도록 특별한 감동을 자아냅니다. 이 서문의 참으로 아름다운 마지막 구절들을 공유하는 것으로써, <동급생>에 대한 찬사를 갈음할까 합니다.

"… 이 책의 결말은 몇 줄에 걸쳐 걸작 내에서도 걸작이다. 그 결말이, 갑자기, 중편소설이었던 것을 서사시 차원의 소설로 바꾸어 준다. 즉 짧은 이야기의 강력한 우아함과 단순함을 유지하는 교양소설이자 성장소설이었던 것에, 오르간 소리가 고조되듯, 더 명료하고 드라마틱한 특성을 더해 주는 것이다. 대단원을 이루는 행들에서 나는 싸움을 포기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 어쨌건 상관없이 그것이 결말이었다.

내 개인적 메모를 짤막하게 끼워 넣어도 될지 모르겠다. 프레드 울만의 걸작이 탄생한 시대를 통틀어 나의 아버지는 독일 주재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히틀러를 혐오했고 한스 슈바르츠와 그의 부모 같은 수많은 유대인을 구해냈다. 아버지는 또한 울만이 그렇게도 잘 묘사한 호엔펠스 집안사람들이 자주 출몰하는 환경에서도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내가 울만의 소설에 나오는 그곳에서 자랐고 -그때 나는 여섯 살 아니면 일곱 살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이자르 강둑 근처의 집에서 내 작은 침대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울만의 책을 읽는 동안, 슈바르츠와 호엔펠스의 엇갈린 길을 따라가는 동안, 가슴이 저려 왔고 목이 메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고 그러자 눈물이 더 하염없이 흘렀다. 그리고 기쁨도 함께. 프레드 울만의 소설에서 더할 나위 없고 비길 데 없는 것은 인간의 위대함과 완전무결함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천박함, 어리석음, 잔인함도 같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우리를 슬픔과 공포 속으로 던져 넣고 마지막 행에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품을 이유를 되살려 준다. 영국에서 살았던 유대계 독일인 화가가 쓴 몇 페이지의 글이 단체, 셰익스피어, 밀턴 또는 파스칼의 위대한 구성들과 공통적으로 지닌 특성은 이것이다. 최악의 것에 언제나 의지할 수는 없고, 저주받은 것들 가운데에는 항상 정의가 있으며, 그 정의는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이 어둠 속에서 끌어올린다는 것."


자, 이런 명문으로 찬사를 받은 이 작품. 나치 독일로부터 프랑스로 도망쳐 온 뒤 런던에 정착했던 망명 유대인 화가의, 직업 작가가 아닌 자 특유의 투박한 글쓰기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그 투박함으로 인해 더 감동적인 소설 <동급생>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이 작품은 1932년 당시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명문 고등학교를 다니던 유대계 의사의 아들 16살 소년, 1인칭 주인공 '나' 한스 슈바르츠의 학급으로 한 소년이 전학을 오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소설의 서두는, 이제는 동시대 누구에게 써달라고 부탁해도 차마 쓰지 못할, 원형 그대로의 '러브스토리'입니다.

"그 아이가 일어섰다."

"그라프 폰 호엔펠스, 콘라딘이라고 합니다."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1916년 1월 19일 뷔르템베르크의 호엔펠스 성에서 태어났고요." 그러고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 또래임에 틀림없는 그 이상한 소년을, 마치 그가 다른 세상에서 오기라도 한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가 백작이라서가 아니었다. 우리 반에도 이름 중간에 <폰>이 들어가는 귀족 집안 출신들이 꽤 있었지만 그 아이들은 나머지 우리들, 그러니까 상인, 은행원, 목사, 재단사 또는 철도 공무원의 아들들과 별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얘기가 달랐다. 호엔펠스는 우리 역사의 일부였으니까. 호엔슈타우펜과 테크, 호엔촐레른 사이에 위치한 그들의 성은 폐허가 되어 성탑들이 파괴되고 헐벗은 산 같은 원뿔꼴의 꼭대기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의 명성은 여전히 푸르렀다. 나는 그들의 행적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한니발이나 카이사르의 행적 못지않게 잘 알고 있었다. 힐데브란트 폰 호엔펠스는 1190년 소아시아의 빠르게 흐르는 강 칼리카드누스에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 위대한 바르바로사를 구하려다 사망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내게서 단지 몇십 센티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내가 홀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 걸출한 슈바벤 집안의 구성원이 나와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앉아 있었다."

"<내가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친구>라고 쓰기 전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뒤에도 나는 이것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으며 내가 친구를 위해 -그야말로 기뻐하며-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독일을 위해 죽는 것이 달콤하고 옳은 일이라고 당연하게 여겼듯, 나는 친구를 위해 죽는 것도 달콤하고 옳은 일이라는 데에 동의했을 터였다. 열여섯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에 있는 소년들은 때때로 천진무구함을 심신의 빛나는 순결함, 완전하고 이타적인 헌신을 향한 열정적인 충동과 결부시킨다. 그 단계는 짧은 기간 동안에만 지속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 강렬함과 독특함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경험 가운데 하나로 남는다."


한스는 유대인이고, 콘라딘은 그야말로 독일 명문 귀족 소년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묘사하는 건 이 시점의 이 소년들에게는 그야말로 가당치 않은 분류입니다. 한스가 처음에 콘라딘을 보고 깜짝 놀라면서 경외심을 가질 때, 한스의 마음속에 그처럼 엄청난 경외심이 일어난 이유는 콘라딘이 '나의 역사' 속 '명예'를 상징하는 집안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스 본인을 포. 함. 한. 세계의 귀족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라기보다 독일인 소년인 한스가 독일의 역사를 자기 것으로,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콘라딘을 그 같은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 거죠.

1932년 당시 한스도 한스의 부모님도, 독일을 조국으로, 자기 이웃들을 이웃으로 생각하는, 그야말로 뼛속 깊이 독일 사람입니다. 문학을 사랑하고 세속적인 것들을 아직 경멸하던 이 결벽적으로 순수한 10대 소년들은 가장 독일적인 시인, 횔덜린의 시를 함께 낭송하며 우정을 쌓아나갑니다. 그들은 같은 공동체에서 서로를 발견한 두 영혼입니다.

이 책엔 유대인 학살이나 차별의 끔찍한 면모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돼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느 시대 어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일상 속의 감정과 일견 사소해 보이는 에피소드들로, 개인 개인의 인생이 나치와 정치에 의해 으스러지고 부서진 순간들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내가 당연히 나 자신을 그 일부로 받아들였던 세상, 내가 사랑했던 내 세계로부터 배제되고 낙인찍히기 시작하는 순간들의 그, 분열감을요. '역사의 수레바퀴에 스러진 개인'이라고만 말해버리면, 바로 다가오지 않는 거대한 그림이 저 멀리 펼쳐지는 느낌이지만요. 유대인을 배제하기 시작한 나치 독일에서 학급 내 동급생들끼리 사이에 번지기 시작한 균열과 따돌림에 대한 묘사는 그 거대한 그림의 끔찍한 촉감을 별안간 가슴에 문대오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나는 이스라엘을 위해 돈을 걷으러 왔던 시온주의자와 아버지 사이에서 벌어졌던 격렬한 논쟁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시온주의를 혐오했다. 그 모든 생각이 아버지에게는 미친 짓으로 보였다. 2천 년이 지난 뒤에 와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탈리아인들이 로마 시대에 한때 독일을 점령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그런다면 결국 끝없이 많은 피를 흘리게 되고 유대인들은 아랍 세계 전체와 싸우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리고 또, 어쨌건 간에, 슈투트가르트 사람인 아버지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 시온주의자가 히틀러를 입에 올리며 그 때문에 이 나라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냐고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혀 아니오. 나는 내 독일을 알고 있소. 이건 일시적인 질병, 경제 상황이 나아지기만 하면 바로 사라질 일종의 홍역 같은 거요. 당신 정말로 괴테와 실러, 칸트와 베토벤 같은 우리나라의 위인들이 이따위 쓰레기에 넘어갈 거라고 믿는 거요? 당신은 어떻게 감히 우리나라를 위해, 우리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1만 2천 유대인들의 기억을 모욕하는 거요?"

그 시온주의자가 아버지를 <전형적으로 동화된 자>라고 하자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되받았다.

"그렇소. 나는 동화된 자 맞소. 나는 독일과 나를 동일시하고 싶소. 나는 유대인들이 독일에 완전히 흡수되는 걸 분명히 더 선호할 거요. 그러는 게 독일에 항구적인 이익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말이오. 좀 의심이 들기는 해요. 내가 보기에는 유대인들이 자기네끼리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덕에 여전히 촉매 역할을 하면서 예전에 그래 왔던 것처럼 독일 문화를 풍요롭고 비옥하게 하고 있는 거요."

한스의 아버지는 그 당시 웬만한 유대인들보다 더 지적이고 온건하며 합리적인 인물이었던 거죠. '독일 공동체' 안에서 꽤 성공한 것도 그럴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였을 거고요. 오늘날의 지적인 독자들이 거부감을 가지지 않기 힘든 '시온주의'가 21세기까지 어떻게 뿌리내렸나, 를 이 책은 미루어 짐작하게 해 줍니다. 지금으로선 오만과 특권주의, 끔찍하게 자기중심적이며 합리가 통하지 않는 태도처럼 보이는 '시온주의'가 왜 많은 유대인들의 공감을 얻어왔고 얻고 있는지, 그 뿌리를 이 소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차별과 살육의 경험이 또 다른 차별과 불합리를 낳았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담담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독일을 사랑하고 독일을 조국으로 받아들였던 한스의 가족은 공기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자기들의 공동체에서 서서히 내몰립니다. 한스와 콘라딘의 우정에도
가슴을 저미는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콘라딘, 어제 왜 나를 모른 척했어? … 나는 세상의 모든 호엔펠스 집안 사람들 못지않게 가치 있는 사람이야.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누구도 나를 모욕하게 두지 않을 거야. 그 어떤 왕도, 왕자도, 백작도."

…. 그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다면. 이건 네가 바란 바야. 조르주 당댕(몰리에르의 희곡 속 인물). 자업자득이라고. 네가 진실을 원한다고 했으니 이제 알려 주지. 너도 보았다시피,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어떻게 그걸 보지 않을 수 있었겠냐만, 나는 너를 인사시킬 수가 없었어. 그 이유는, 모든 신들에게 맹세하건대, 부끄러운 것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고 -그 점을 너는 잘못 알고 있어- 훨씬 더 단순하고 더 불쾌한 거야. 우리 어머니는 명망 있는 -한때 왕가였던- 폴란드 귀족 집안 출신인데 유대인을 싫어해. 몇백 년 동안 어머니 집안에 유대인이라고는 없었고 그들은 농노보다도 더 비천한, 이 세상의 최하층민, 불가촉천민들이었어. 어머니는 유대인을 혐오해. 유대인을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으면서도 그들을 두려워해. 만일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는데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네 아버지 하나뿐이라고 해도 어머니는 그분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야. 너를 만나보겠다는 생각 같은 것도 절대로 하지 않을 거고. 어머니는 너를 경계하고 있어. 유대인인 네가 자기 아들을 친구로 삼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게 남들 눈에 띄는 걸 호엔펠스 가문의 오점이라고 생각해. 어머니는 또 너를 두려워하기도 해. 네가 내 종교적인 믿음을 갉아먹고, 네가 속해있는 유대인들 집단이라는 건 볼셰비즘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고., 내가 네 악마 같은 간계의 희생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 웃지 마. 우리 어머니는 심각하니까. 나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벌였지만 어머니 말은 이런 거였어. "이 불쌍한 녀석아, 너는 네가 이미 그자들의 손아귀에 있다는 걸 모르니? 너는 벌써 유대인 같은 말을 하고 있어." 그리고 네가 진실을 모두 다 알고 싶어 한다면 말인데, 나는 너하고 같이 보내는 한 시간 한 시간에 대해 싸워야 했어."

이후의 이야기는 한 소년의 세상과 가족과 우정이 붕괴된 시간들을 달려 나갑니다.

한스의 부모는 한스를 미국으로 대피시키지만, 자신들은 독일에 남습니다. 지금의 우리 눈으로 보면 "도대체 왜요? 같이 도망쳐야죠! 정신 차리세요!" 어깨라도 흔들고 싶지만, 저는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실제로 많은 유대인들이 자식은 대피시키면서도 독일에 남았습니다. 사람 잡는다는 그 설마, 내가 사랑한 나의 공동체가 나한테 설마… 그 설마의 심정이야말로, 결단력 있게 신세계를 찾아 떠나는 모험심보다 더 평범한 마음이니까요.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시대와 세대가 광기에 물들었던 시간의 단면 단면들이, 지금의 우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문득문득 '현재'가 덮쳐오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 <동급생>은 언제 어디를 살고 있는 사람이 읽든, 독자 각자 본인의 시대와 세대에서 아무리 사소하게든 발생할 수 있는, 혹은 발생하고 있는, 부조리와 광기, 외면과 차별, 위선들을 상기시킵니다. 나치 독일의 가장 끔찍한 현장들이 아니라, 당시의 명문고교를 다녔던 평범한 소년들의 성장과 우정, 갈등, 좌절을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서 그런 귀신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스며들듯이 속삭여주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한스와 콘라딘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한스는 콘라딘이 나치주의자가 되는 모습을 목도하고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그리고 독일에 남은 부모의 자살에 대해 듣게 되며, 회색빛 인생을 살아갑니다. 때로는 기쁘지만, 대체로 숨죽인 절망 속에 휩싸인 세월 안에서, 세속적으로 성공했지만 마음 깊이 실패한 중년의 변호사로 나이를 먹어갑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보다 '고구마'이기 힘든 소설입니다. 그런데 <동급생>은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지막 몇 문장, 특히 마지막 그 한 줄의 반전으로 정말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번 낭독에서는, 읽을 수 없었습니다. 제 낭독은 고구마만 백만 개 드시게 한 뒤 끝납니다^^ 하지만 이 고구마가 답답해서, 그 뒤가 궁금해서 이 책을 찾아보신다면, '아… 이 한 줄을 듣지 않고 찾아 읽기 잘했어. 정말 잘했어'라고 꼭, 생각하실 겁니다.

현실의 한스들과 콘라딘들의 비극은 분명히 오늘의 가을바람만큼 오늘날까지도 엄연합니다. 하지만, 초입에 읽어드린 장 도르메송이 말한 것처럼… 나치 독일 당시 독일인 관리들과 태연하게 어울리며 공무를 수행하면서도 실은 몰래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왔던 외교관 아버지를 추억하는 프랑스 작가 장 도르메송의 그 서문처럼 "이 책은 우리를 슬픔과 공포 속으로 던져 넣고 마지막 행에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품을 이유를 되살려" 줍니다.

 영국에서 살았던 유대계 독일인 화가가 쓴 몇 페이지의 글이 단테, 셰익스피어, 밀턴 또는 파스칼의 위대한 구성들과 공통적으로 지닌 특성은 이것이다. 최악의 것에 언제나 의지할 수는 없고, 저주받은 것들 가운데에는 항상 정의가 있으며, 그 정의는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이 어둠 속에서 끌어올린"다고 마음 깊이 박히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설사 이 같은 믿음이 사. 실. 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장 도르메송의 이 말을 언제까지나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인생이죠.

그러니까… 꼭 한 번 <동급생>의 그 마지막 문장을 찾아 이 책을 직접 읽어봐 주신다면, 제가 지금 낭독으로 남겨드리는 오늘의 고구마를 해소해주신다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언제나, 고맙습니다.

*출판사 <열린책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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