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나랏돈 쉽게 내 주머니에 넣는 방법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SBS 뉴스

작성 2019.09.20 11:01 수정 2019.09.20 11:0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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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인-잇] 나랏돈 쉽게 내 주머니에 넣는 방법
오늘은 나랏돈, 우리의 세금을 가장 쉽고 간단하게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 정부 또는 지자체의 공모사업을 검색한다.
2. 해당 공모사업의 취지에 가장 맞는 청년 단체, 청년 스타트업을 검색한다.
3. 베끼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는 곳을 몇 개 골라낸다.
4. 후보군 중 언론이나 업계에서 이미 이름을 많이 알린 팀은 피한다.
5. 도용 사실을 알게 되어도 손쓸 도리 없는 군소한 청년들을 고르는 게 핵심!
6. 그대로 베껴 제출한다. 혹시 추후에 들통나면 어쩌지?
7. 담당 공무원들이 피해자의 항의를 알아서 덮어주니 안심!

이 무슨 개념 없는 소리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몇 년 전 저도 당했고, 지금도 많은 청년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이 '말도 안 되고 개념 없는 짓'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합니다. 특히 7번 항목에 중점을 두고요.

며칠 전, 한 통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모 대학 창업동아리 학생들의 편지였지요. '도무지 어디에 도움을 청할지 몰라 헤매다가, 저희와 같은 피해를 당하신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도움을 청합니다.'라는 서두를 읽자마자 머리가 띵 했습니다. '아, 또 이런 일이...' 싶었지요.

그들은 장애인을 위한 기술 개발을 하고 있는 대학생 창업자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주변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겁니다. "너희 주민참여 예산제 신청했어?" 무슨 소린가 싶어 찾아보니, 본인들이 개발한 기술과 아이디어, 심지어 제품 사진까지 그대로 누군가가 베껴 공모에 제출했던 겁니다.

여기까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던 저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습니다. "담당 부서에 전화했는데, 누가 베낀 건지 알려주질 않아요. 본인들의 소관이 아니래요." 머리가 띵 했습니다. 이 사건이 있었던 지자체는, 저희 상담소가 몇 년 전 피해를 본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태도가 하나도 바뀌지 않았더군요.

그때 그 시점으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몇 년 전, 상담을 진행하고 있던 제게 한 통의 카톡이 왔지요. "너희 주민참여 예산제 신청했지? 홈페이지에 있더라." 부랴부랴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지요. 저희 상담소 홈페이지에 적힌 팀 미션이 사업 목적으로, 상담 프로그램 소개가 사업 운영 세부내역으로 탈바꿈해 그대로 제출되어 있더군요.

놀라서 해당 지자체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도용당했다고요. 하지만 첫 마디는 이것이었습니다. "음, 전화 주신 분 말씀은 잘 알겠고요. 근데, 원래 주민참여 예산제라는 게 옆 동네에서 화단 재정비 사업을 하면 '와! 우리 동네도 저거 해보자'하면서 노하우 얻어 가고 하는 거거든요. 서로 서로 좋은 아이디어 나누면서 동네가 활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저희는 동네 화단 재정비 팀이 아니었고, 활동 범위가 전국인데다, 가장 황당한 것은 저희 아이디어를 베껴가서 받는 사업비의 용처였습니다. '상담 카페 조성을 위한 비품 구입비'라며 냉장고 구입, 커피머신 구입을 한다고 적혀있었지요. 자신들의 자산 취득을 위해 엉뚱하게 상담이라는 아이디어를 끌어다 쓴 겁니다. 그런데도 원래 좋은 아이디어는 옆 동네에 나누는 것이라니, 그래서 도용한 곳이 어딘지는 알려줄 수 없다니,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응이었지요. 그냥 이번엔 이해하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했냐고요? 이해를 해줄 수 없었습니다. 도용한 곳도, 담당 지자체 공무원도 상대를 잘못 골랐지요. 위 항목에서 저희 팀은 4에 해당하지 않았습니다. SNS에 호소문을 올렸고, 1천 번 이상 공유가 되었습니다. 이미 언론을 통해 여러 번 소개된 팀이었기에 짧은 시간 안에 해당 지자체 출입기자들의 취재가 시작되었고, 해당 지자체 내부에서도 '왜 이런 일이 생긴 거냐?'라는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세 시간 뒤 전화가 왔지요. "선생님, 저희가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말씀하시는 대로 할 테니 기사만은 나가지 않도록 모쪼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기사가 나갈 '위기'에 처해지고서는 일사천리로 상황은 정리되었습니다. 해당 도용사업은 선정 취소가 되었고(저는 이게 이렇게 빨리 되는 것인지 몰랐습니다), 베낀 곳이 어딘지도 알려주시더군요. 베낀 측이 개인이 아닌, 충격적이게도 나랏돈으로 운영되는 공공시설이었던 것을 알게 된 건 덤이었고요.

그토록 항의할 땐 '전화 주신 분'이었다가, 사태가 커지니 '선생님'이 된 저는 참담했습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우리보다 더 작고 걸음마 단계인 청년단체는 도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걸까.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이 에피소드를 대학생 동아리 친구들에게 말해주면서도 참담한 기분이었습니다. 또다시 똑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제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고작 '언론에 제보해라. 문제를 크게 만들어라.'였으니까요. 학생들은 전화를 끊으며 물었습니다. "여기 지자체만 이러는 거예요? 원래 다들 이러는 걸까요?" 저는 답했지요. "안타깝게도, 거의 다들 그런 것 같아요."

아직도 많은 곳에서 '공정하게'가 아니라, '큰일 안 나게'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잘못 건드리면 큰 이슈가 될 피해자에게는 즉각 조치를, 그렇지 않은 피해자에게는 '원래 그래요'로 다르게 대처하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 아닐까요?

청년들의 아이디어는 공공재가 아닙니다. 그 하나를 만드는 데 몇 주, 몇 달, 아니 몇 년의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릅니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진다'던 기생충의 결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들은 행복해졌던가요? 아이디어는 나눌수록 커질까요? 커질지도 모르지 않냐고요? 글쎄요, 피해자는 나눈 적이 없습니다. 빼앗겼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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