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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평범한 일본인들의 분노…역풍 맞은 '혐한 장사'

이홍천|일본 도쿄도시대학 사회미디어학과 준교수

[인-잇] 평범한 일본인들의 분노…역풍 맞은 '혐한 장사'
최악의 한일관계에도 '혐한'과 맞서 싸우는 일본인들이 있다. 이들은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도 아니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평범한 회사원이고 학생이고 주부들이다. 혐한 발언을 쏟아내는 인사를 출연시킨 방송국 앞에서, 혐한 기사를 내보낸 잡지사 앞에 플래카드를 들고 자발적으로 모인 것이다.

언론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던 일본 시민 사회가 특정 언론사를 타깃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평범한 일반인들의 분노가 그만큼 크다는 걸 반영하고 있다. 이들은 일부 방송과 신문 잡지가 아베 정권에 대한 비판은 등한시하면서 혐한을 선동하는 '한국 때리기'에만 열중하는 것에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그렇다 말겠지'하며 이런 언론의 행태에 눈을 감는다면 혐한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고 결국엔 더 자극적이고 더 선동적인 혐한 보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바라지 않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최근 일본인들의 이런 정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혐한 시류에 편승하다 역풍을 맞은 것이 일본의 유명 시사잡지 주간 포스트의 특집 기사였다.

주간 포스트는 9월 초 <귀찮은 이웃, 한국은 필요 없다>라는 혐한 특집에 다음과 같은 3건의 기사를 게재했다. '혐한이 아니라 단한(한국을 잘라내다는 의미)이다, 귀찮은 이웃에게 작별을 고하자', '10명 중 한 명 치료가 필요(대한신경정신의학회)- 분노를 조절 못하는 한국병', '폭주 문재인은 독도 상륙 계획 중'.

잡지가 발매되자마자 해당 편집국에는 아침부터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항의 전화가 쇄도했고 잡지에 연재를 기고하던 필진들은 인터넷에서 공개적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출판사는 같은 날 저녁 '해당 특집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점은 배려가 부족했다'며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했지만 보통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혐한을 빙자해 정신 질환에 대한 차별을 용인하는 기사를 두고 볼 수 없다는 비판까지 더해지며, 해당 출판사 쇼가쿠칸은 양심적인 시민 사회의 적이 됐다. 시민들의 분노를 보여주자며 한 여성이 트위터를 통해 항의 데모를 제안하자, 다음날 150여 명이 자발적으로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출판사 앞에 집결했다.

혐한 상술을 멈춰라, 혐한 서적으로 밥 벌어먹지 마라, 활자로 사람을 죽이지 마라, 쇼가쿠칸의 책을 자식에게 보여주기 부끄럽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차별을 멈춰라…… 플래카드 안엔 시민들의 분노와 질책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출판사를 향해 항의 구호를 외치는 대열에는 주변의 출판사와 서점 관계자들도 동참했다. 한 신문사는 혐한 보도로 선동된 증오심이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까라는 걱정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항의 집회에 참가했다는 한 시민의 인터뷰 기사를 내보냈다.

지난 7일에는 '일한연대행동'이라는 시민 모임이 도쿄와 오사카에서 혐한 보도와 차별을 선동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비난하는 집회를 제안해 도쿄에서는 300여 명이, 오사카에서는 200여 명이 모였다. 앞서 8월 31일에는 나고야의 CBS TV본사와 도쿄 지사 앞에서도 항의 집회가 열렸다. 이 방송국은 지난달 27일 '노상에서 여성 관광객을 덮치는 곳은 한국뿐이다. 일본 남성도 한국 여성이 일본에 오면 폭행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출연자를 게스트로 기용한 프로그램 제작사이다.

일본 신문노조가 6일 '다른 나라에 대한 증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보도를 멈추자'라는 성명서를 전국 언론사를 상대로 발표하기도 했지만, 개인이 언론을 직접 비판하는 것은 일본에서 흔한 일이 아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악화되고 있는 한일관계를 이용해서 자극적인 혐한 콘텐츠를 생산해 시청률을 높이려는 방송이나 판매 부수를 늘리려는 신문 잡지들이 많은 상황에서 반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더욱 부담스러울 수 있다.

100만 명 규모의 촛불집회를 경험한 한국인의 눈에는 수백 명이 모인 항의 집회가 크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민들이 힘을 모으면 정부를 움직이게 할 수 있고, 그 시민들의 힘은 한 명 한 명의 깨어있는 의식과 양심적인 행동에서 비롯된다. 지금 당장은 달걀로 바위 치기인 듯 보일지 몰라도, 이런 움직임들이 모여 한일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동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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