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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정신과에서는 왜 상담을 안 하나요?

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 중

[인-잇] 정신과에서는 왜 상담을 안 하나요?
내가 수련 받던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송년회 때마다 작은 수상식을 열었다. 상의 이름은 최우수 임상교수상. 프로야구 MVP시상식 같은 것일 텐데, 정신과에서의 기준은 무엇일까.

운동 경기처럼 중계되는 것이 아니니 동료 선수나 기자단 투표를 할 수는 없다. 환자분들로부터 평점을 받을 수도 없다. 좋은 말 듣는 치료가 꼭 좋은 치료이란 법은 없으니. 결국 답은 실적이었다. 아무래도 많은 분들이 찾고, 왔던 분이 또 찾는 경우 실력 있는 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MVP 후보들의 실적은 정말 엄청났다. 2만 명. 한 명의 정신과 의사가 1년간 진료를 본 환자 수가 2만을 훌쩍 넘겼다. 100명이 넘는 외래 진료를 끝낸 밤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병동으로 올라온 그 MVP 교수님께는 입원 환자들과 전공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회진을 끝내고 퇴근하고픈 마음에 서둘러 환자 브리핑을 하려는 나를 막으며, 커피 한 잔 내리시던 교수님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지용아, 나 왜 이렇게 사니." 그러게요, 왜 그렇게까지 많은 진료를 보셔야 하는 걸까요. 교수님도, 환자분들도, 나도, 모두가 원치 않는데.

우리나라의 진료는 왜 이리 기형적일까? 내과, 정형외과 등 모든 임상 현장에서 선진국에 비해 매우 짧은 진료가 이뤄지는 것은 온 국민이 아는 사실이다. 그래도 정신과까지 3분 진료 대열에 동참할 순 없는 것 아닌가? 대체 이 짧은 시간에 진료가 가능한 걸까? 그게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가끔 참관하는 외래 진료실은 놀라운 곳이었다. 짧은 시간 내에 어떻게든 정보들을 캐내는 기술, 수많은 환자들의 디테일까지 담고 있는 초인적인 기억력, 그리고 그 짧은 진료 속에서 신기하게 호전되어 가는 환자들. 또한 교수님들은 정해진 시간이 넘지 않게 말을 잘라내는 제각각의 신묘한 기술들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환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 때까지 계속되는 '안녕히 가세요' 반복신공이었다.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기술이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적당한 미소를 계속 띤 상태로,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는 원망의 눈초리를 피하며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는. 곁눈질로 익혔던 이 기술을 지금 내 진료실에서도 아주 가끔은 사용하게 된다.

의원 문을 연 개인 사업자가 된 이후에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는 교수님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의원을 운영해 온 선배님들께서 3분 진료를 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이유다. 개원 당시 나는 '제대로 된 진료를 해보겠다'라는 초보 특유의 뜨거운 마음으로 예약제를 결정했다. 최소 20분, 원하는 분은 40분간 진료를 보았다. 환자분들도, 나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매월 말 정산을 할 때마다 어두운 미래가 그려졌다. 정신과 진료비는 진료 시간에 따라 국가에서 정해 놓았는데, 상담은 꿈꿀 수 없게 책정되어 있었다. 대다수의 정신과에서 3분 진료만을 했던 것은 선배 정신과 의사들이 아니라, 사실 국가가 결정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지금의 나는 아직도 예약제로 의원을 운영하고, 진료일 중 일부는 40분씩 상담한다. 이는 내가 특별히 양심적이거나 돈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나뿐 아니라 요즘에는 길게 진료하는 의원들이 꽤 있고, 동기들 대부분 비슷한 형태의 진료를 한다.

이러한 변화 또한 국가 때문이다. 2018년, 정신과 진료 확대의 필요성을 인식한 정부가 수가를 인상한 덕분에 하루 10명 조금 넘는 분들과만 길게 상담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물론 그런 날은 수입이 훨씬 낮지만, 신념과 현실이 타협 가능한 정도다.

둘째로 알게 된 점은 꽤 많은 분들이 3분 진료를 원하며, 그분들에게 유용한 가성비 높은 진료 형태라는 사실이다. 정신질환 발생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다. 뇌 호르몬의 변화 같은 생물학적 요인, 심리적 요인, 그리고 환경적 요인, 셋 다 영향을 미친다. 세 요인들의 비중은 개인마다 모두 다르기에 어떤 이는 환경만 바뀌어도 낫고, 심리적인 문제가 큰 어떤 이는 약물치료에 호전이 없다. 또 누군가의 우울증은 약을 통해야만 해결된다.

환경적인 부분은 의사가 손쓸 수 없는 경우가 많기에, 나머지 두 요인에 집중한다. 그러므로 약물과 상담치료 병행이 가장 좋지만, 둘 다 챙길 여유가 없는 분들께는 약물치료 단독 또한 괜찮은 차선책이다. 내인성 우울증, 공황장애, 성인 ADHD 등 생물학적 요인의 비중이 큰 질환들의 경우 아주 짧은 진료와 약물치료만으로도 잘 호전된다.

과거 짧은 진료에 실망했던 분들로부터 '왜 정신과에서는 상담을 안 해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할 말이 없다. 팩트였으니까. 다만 찾아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약물치료, 약물과 상담 병행, 정신분석, 인지행동치료 등 각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들이 있다. 메뉴와 시간, 가격이 모두 다르다. 입에 맞는 식당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듯, 정신과도 그렇다.

그렇기에 어떤 정신과에 가야 할지 궁금하시다면, 최소 두세 군데는 전화하여 메뉴와 가격을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한곳에 실망하더라도 자신을 위한 치료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더 맞는 곳이 어딘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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