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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위한 '인권'

김지용 |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과 의사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 중

[인-잇]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위한 '인권'
지난겨울의 일이다. 한 중년 분께서 불쑥 병원에 찾아와 수면제를 요구했다. 불면증 진단을 넣고 바로 약을 처방할 수도 있었지만, 관상을 보는 직업인 정신과 의사의 촉이 이유를 캐묻게 만들었다. 둘뿐인 진료실 안에서도 뭐가 불안한지 두리번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의 전말은 이랬다.

며칠 전까지 그는 지방의 한 국립정신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외박을 나가 노모와 시간을 보내던 중, 대형 연예기획사의 사장이 될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왔다. 이후 노숙과 백화점 시식코너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전 진단명과 처방 약은 알 수 없었지만, 조현병 진단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가진 과대망상이 연예기획사를 설립하러 혈혈단신 낯선 곳으로 오게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대망상에는 흔하게 피해망상이 붙어 있다. 아마 그의 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어떤 나쁜 세력이 있을 것이다. 과대망상을 가진 사람답지 않게 매우 조심스럽고 불안해하며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에서 피해망상의 존재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쨌든 집에 돌아가자' 설득하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수면제만 주고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대로 지낼 경우 그에게 닥칠 위협은 너무나 뻔해 보였으니까. 다행히 진심이 통했는지 근처 파출소로 동행해 상황 설명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그가 받아들였다. 내 인생에 파출소 문이 그렇게 반가울 일이 있을지 몰랐다만, 기대와 달리 그곳에선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 "정신과 의사면 잘 아시잖아요? 요즘은 저희가 이럴 때 뭐 했다가 인권 문제로 큰일 나요. 구청 쪽으로 모시고 가세요"라는 안내를 받았을 때의 허탈함과 배신감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대기 중인 환자들이 계시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죄송하다고 말하고 돌아서는 내게 그는 매우 민망해하며 식사 한 끼를 부탁했다. 해장국 한 그릇. 그것이 현실검증력을 상실한 위험한 상태의 사람에게 정신과 의사가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니.

무거운 마음에 해당 지역 광역정신보건센터에 문의해 보았고, 치료 도중 탈원한 환자 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결국 치료받던 국립대학병원에서 경찰에 연락하여 국밥을 드시던 그분을 모셔가는 것으로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미 국립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이던 분이었기에 해프닝으로 끝났지, 처음 정신과에 오신 경우였다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현실검증력. 현실을 판단하고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능력을 말한다. 얼핏 생각하기에 굳이 능력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조현병을 포함한 몇몇 정신질환에서는 원래 잘 있던 현실검증력이 손상된다. 그래서 헛것을 보고 환청을 듣고 망상을 만들어내며, 그것들을 근거로 잘못된 판단을 내려 자신이나 타인을 해칠 수 있게 된다. 현실검증력이 손상된 상태에서도 자기결정권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묻고 싶다. 추운 겨울날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길거리로 보내는 것이 정말 그 환자 분을 위한 길인가?

나는 인권 전문가가 아니고, 깊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또한 정신과의 치료 환경에서 인권침해를 경험한 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불법적인 입원이 자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인권에 대해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히 현실검증력이 손상된 그 순간에는, 그 사람의 자기결정권보다 우선시되는, 믿을 만한 판단을 대신 내려줄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가장 가까운 방안이 '사법입원제도'일 것이다. 여러 선진국들에서는 정신과 입원 여부를 법원에서 결정한다.

정신과 의사와 환자 가족들이 그 역할을 맡은 지금의 우리나라 시스템에서는 억울한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정신과 의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좋지 않은 제도이다. 비자발적 입원을 당한 분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하겠는가. 정신질환을 치료하기 위해선 의사-환자 사이의 강한 신뢰가 필수적인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인다. 가족들은 퇴원 후에도 그 분노와 원망을 받아내며 살아간다. 이 무거운 짐을 더 이상 개인들에게 지우지 말고 국가가 받아줘야 하지 않을까.

사법입원제도 또한 분명 완벽하지 않고,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현실은 이상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데. 아픈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을 편들어주는 것보다, 원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때 치료받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진정한 인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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