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남의 연애 말고 우리 연애

김지미 | 영화평론가

SBS 뉴스

작성 2019.06.26 11:00 수정 2019.07.04 14:2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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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 스틸컷

미국으로 이주한 뒤 정체성에 새로운 겹이 생겼다. 전체 인구 중 1%도 안 되는 한인 정체성만으로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층이 너무 희박하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문화적 인접성과 시각적 유사성에 기반을 둔 '아시아계 미국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중국계 코미디언 엘리 웡과 한국계 배우 랜달 박이 주연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Always Be My Maybe)>은 반가운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마디로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주연했던 <노팅힐(Notting Hill)>의 아시아 버전이다.

어린 시절부터 단짝 친구였던 사샤(앨리 웡)과 마커스(랜달 박)는 대학생이 되어 잠깐 연애를 했다가 어색하게 헤어진다. 마커스의 엄마에게 요리법을 전수받은 사샤는 스타 셰프로 승승장구하며 부와 명예는 물론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셀럽'이 된다. 또 다른 레스토랑을 오픈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사샤와 배관공인 아버지 일을 도우며 작은 클럽에서 밴드 활동을 하는 마커스가 재회하며 다시 로맨스가 싹튼다.

로맨스에서 남성이 재정적 우위에 있을 때는 자연스럽게 '신데렐라 스토리'가 펼쳐질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경제력을 갖추고 있을 경우 로맨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젠더권력과 계층문제가 복합된 갈등이 해결되어야 한다. 어떻게 남성의 자존심을 살려주면서 둘 간의 계층적 간극을 봉합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늘 불거지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도 성공한 사샤의 삶을 마커스가 어떻게 감당할지를 결정하는 일이 둘의 인연이 이어지는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떠오른다.

20년 전 <노팅힐>에서 대스타 줄리아 로버츠는 만년 적자 책방 주인 휴 그랜트의 자존심을 살려주느라 자신의 성공을 대놓고 즐기지 못했다. 휴 그랜트의 결단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무리 세계적으로 성공한 스타라고 해도 '사랑 앞에서는 당신에게 선택을 원하는 수줍은 여자'라며 어필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 어쩌면>의 사샤는 자신의 성공을 감추지 않는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마커스의 기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라 인디 뮤지션으로서 그가 가는 길을 응원하면서 자신과 함께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두 영화 사이의 시간적 격차는 여성 주인공의 태도 변화를 통해 달라진 사회상과 관객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 영화가 마음을 끄는 데는 앨리 웡과 랜달 박의 친근한 외모도 한몫한다. 초등학교 동창 중 한두 명은 있었음직한 현실적인 외모가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으로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된 학습 탓이다.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에서 아시아인들의 자리는 주인공의 '너드(nerd; 사회성 결여된 공부벌레)' 친구가 최대치였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인'과 '로맨스/현대'라는 조합 자체가 드물다. 아시아인 캐릭터는 주로 쿵푸, 너드, 일벌레, 동양주의적 신비함이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지의 옳고 그름을 논하려면 일단은 이미지가 존재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시아인들은 '재현의 올바름'보다 '재현의 유무'를 고민해야 할 수준이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빈도 자체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특히 로맨스는 거의 백인들의 전유물이어서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 아시아인들은 '남의 연애'에 자신을 욱여넣어야 했다.

USC 커뮤니케이션 학과에서 매년 발행하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할리우드 및 방송 미디어의 고질적 문제였던 인종/젠더 편향에 슬슬 변화가 일고 있다. 이 통계는 '백인 남성이 주인공이어야 세계 시장에서 소비 경쟁력이 있다'는 명제가 허구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스틸컷<크레이지 리치 아시안(Crazy Rich Asians)>이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싱가포르 재벌 3세들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기 위해 출신 국가를 불문하고 다양한 아시아인들이 극장으로 몰려갔다. 지금까지 주류 영화 속 아시아계 미국인의 전형성에 신물이 난 많은 아시아인들이 인권운동 하듯 이 영화를 감상했다. 내용적으로는 뻔한 고부갈등 막장 드라마지만, 장르적으로 아시아인들이 할리우드에서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재현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아시아 문화, 특히 한국 문화가 흥미롭게 다뤄지는 콘텐츠들을 접할 수 있다. 무성적 존재였던 아시아 남성들의 매력도 부각되기 시작했다. 캐나다 시트콤 <킴스 컨비니언스(Kim's Convenience)>나 얼마 전 개봉한 <태양도 별이다(Sun is also a star)>에서 젊은 한국 남성들이 로맨틱한 서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도 이런 흐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미디어의 편향된 이미지 재현 문제는 미디어 생산자들의 인종/젠더가 편향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미디어를 만드는 실제 환경에 변화가 생겨야 콘텐츠의 변화도 따라오게 된다. 현실의 다양한 인종 구성과 젠더 균형이 반영된 영화들이 많아져 '남의 연애'말고 '우리 연애'의 달콤함을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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