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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잊었지만 잊지 못한 그 사람 -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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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90 : 잊었지만 잊지 못한 그 사람-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넌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모래가 말했다.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얼굴의 눈물을 닦아내는 모래를 나는 안았다. 모래의 몸은 감기 걸린 사람처럼 뜨거웠다. 얇은 니트 아래로 어깨와 등의 가느다란 뼈가 느껴졌다. 모래는 왜 이렇게 나약한 걸까.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겉으로는 울고 있는 모래를 달래면서도 속으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모래를 단죄했다."
( <모래로 지은 집> 中)
 
 
잊었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잊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잊어버린 지나간 마음들도 아마, 많이, 있을 겁니다. [북적북적]에서 읽는 190번째 책, <내게 무해한 사람>에 실린 7개의 중단편은 그런 사람들과 마음들을 한꺼번에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수이와 헤어진다면 그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위로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수이일 것이었다." (<그 여름> 중)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느낀 첫번째 기분은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밀려들어 오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끄집어내어 설명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지나고 나니 존재한 적이 있었는지조차 스스로에게도 증명할 수 없게 돼버린, 그러나 분명히 나 자신과 그때 그 인연들에게는 혈관처럼 산소처럼 절실했던 그 감정들이 실은 사라진 게 아니라 망각 속에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다가 갑자기 휘저어져 올라올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그런 기분 말입니다.
 
첫사랑과 두번째 사랑, 일종의 저글링이 무한히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세 친구'란 상태, 타인의 경계를 서성이는 가족들과 가족의 경계를 무색하게 하는 중요한 타인들...
 
최은영 작가는 아마도 누구나 틀림없이 경험한 적이 있는 관계와 상황들을 이야기의 얼개로 던져놓고, 그 안에서 휘몰아쳤던 무수한 감정과 생각의 편린들을 마치 자석을 갖다대 모랫속 철가루를 끄집어내듯 집요하게 끌어내 올립니다.

애정이 존재하거나 사실은 '애정이 존재하는 게 맞는 일일' 관계에만 도사린 위험들. 사랑을 담았다는 포옹으로 실은 상대의 급소를 날카롭게 찌르는 순간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싶을 때 서로를 뒤적였던 그 사람들.
 
존재하지 않았던 듯 소멸한 줄 알았던 그 생각들과 감정들과 미묘한 갈등이 실은 너와 나, 우리를 조각해 온 끌과 정 그 자체였음을 날카롭게 환기시킵니다. 이 작품들이 확대경을 들이대 갑자기 커다랗게 눈앞에 나타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력을 지녔었는지, 본래 그것들이 있던 자리인 우리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으로 순식간에 끌려들어가는 그 찰나에 문득 되새기게 됩니다.
 
 
"공무는 자주 글을 올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자기 생각을 적은 긴 글을 올리곤 했다. 나는 자신이 겪은 일을 자기 말로 풀어 쓸 수 있는 그애의 능력과 끝까지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태도에 마음이 갔다. 공무의 글이 올라오면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하며 클릭했고 여러 번 읽었다. 그애가 쓴 몇몇 문장들이 길을 걷다가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얼굴이 없던, 글로만 존재했던 사람이 내 눈앞에서 순대를 먹고 병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고등학교 떄의 이야기를 했다. 왜 소풍이나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날이면 매번 비가 내렸나. 급식이 부실해서 키가 안 컸다, 신축 건물을 짓는다고 벚나무를 다 잘라버린 건 잔인했다 등등의 말들을."
( <모래로 지은 집> 中)
 
 
"나는 그의 책장에 전시된 로봇 장난감을 바닥으로 던졌다. 로봇의 일부가 부서져 바닥에 뒹굴었다. 그떄까지도 그는 효진이를 떄리느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로봇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벽에 집어던졌다. 로봇이 산산조각나자 그제야 그는 효진이의 몸에서 떨어졌다.
 
"이기 뭐꼬?"
 
그는 부서진 로봇을 쥐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보란듯이 나머지 로봇 하나도 바닥에 집어던졌다. 어느새 아줌마까지 와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기 미칬나."
 
화를 낸 건 오히려 아줌마였다. 기준은 지금 자기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갔다. 방에 들어오고 나서야 긴장이 풀리고 다리의 힘이 빠지면서 울음이 터졌다.
나는 방으로 온 엄마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기준이 어떻게 효진이를 떄리고 욕하고 괴롭혀왔는지, 효진이의 부모가 그 모든 것들을 얼마나 태연하게 방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엄마는 무표정하게 내 이야기를 듣더니 말했다.
 
"남의 집 일에 나서는 거 아니야."
(<601, 602> 中)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브라질에서의 내 모습이,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민에게 아무렇지 않게 돈을 받아간 그녀의 오빠 모습이 브라질에서의 내 모습 위로 겹쳐 보였다. 나의 누나 마리솔도 떠올랐다. 언제나 알아서 잘하고 동생 잘 챙긴다고 칭찬을 받았던 누나도 하민처럼 외로웠을까. 누구에게도 걱정을 끼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그녀도 애를 썼을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은 없는 거잖아. 깊게 후회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픈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엄마와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아치디에서> 中)
 

두번째로 찾아온 감정은 반가움입니다. 내 친구들이 계속 흔들림없이 글을 썼다면, 아마도 이런 얘기들을 지금 내게 들려주지 않을까 하는 친숙함, 내 몸과 마음에 맞는 글을 내 몸과 마음에 맞으라고 쓰고 있는 사람을 발견한 고마움입니다. 어차피 나를 향해 쓰는 글이 아님을, 나 같은 존재는 장치나 기능으로만 여기거나 아예 지워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얘기를 확립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보편성'을 지녔다는 칭송을 받는구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기쁨입니다.

최은영 작가는 내가 아는 얘기, 내 얘기, 우리 얘기만 하겠다는 진짜 글쟁이입니다.
 
2000년 언저리를 경계로 청소년이 되거나 성인이 된 동시대 한국 여성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아는 바로 그들의 얘기를 하겠다는 자신감 또는 절실함이 이 책의 쉼표와 마침표마다 뿜어져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우리들의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 얘기를 해주지 않을 거야'라는 위기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최은영은 그런 위기감을 느껴본 자만이 갖고 있는 주변인의 관찰력으로, 자기 얘기를 확립하기 위해 '우리가 아닌 자'들을 지워버리거나 장치 또는 기능만으로 취급하지 않는 소설을 씁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상황이나 인물들의 관계는 유독 반전 아닌 반전을 거듭하거나 다층적인 구조로 전개됩니다. 누구도 함부로 지우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 글쟁이로서의 기교가 녹아있을 뿐 아니라, 시선의 깊이와 주제의식이 낳은 필연인 겁니다.
 
내 중심에 있는 이야기를 하되, '내가 아닌 자'들의 가능성에 대한 시선을 끝까지 거두지 않는 치열한 자세. '보편성'을 지녔다는 칭송을 받으려면 이 정도의 자세는 갖춘 경우라야 비로소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같은 보편성을 담아낸 그릇인 문장이 유난히 또렷한 리듬감을 자랑하는 데다 경제성과 담백함의 미덕까지 갖추고 있는 것도 반갑습니다. 그리고, 동시대 한국 여성 세대가 이런 자신감과 절실함과 가독성을 지닌 작가를 배출할 정도로 진전했다는 행복감으로 뿌듯해집니다.
 
 
"그날 밤, 여자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혜인아, 답을 하지 않아도 좋아. 나는, 네가 그냥 내 문자를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족해. 얼마 전에 꿈을 꿨어. 시청역 앞에서 우연히 만난 너와 함께 밤새 이야기하는 꿈을. 너와 함께 술을 마시고 네 앞에서 기타를 치고 같이 웃는 꿈을. 너와 함께 밤하늘을 보는 꿈을. 꿈 속에서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어. 꿈은 꿈일 뿐이라고, 잠에서 깬 내게 이야기했어. 그런데도 꿈속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꿈에서 깨어나서 너에게 말하고 싶어졌어.
 
잠자리에 누워서 혜인은 그 문자를 여러 번 읽었다. ........ 사람 사는 일에 그 정도의 이별은 별로 대수로운 일도 아니니까. 이건 특별한 일이 아니야. 혜인은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녀가 온갖 종류의 상처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 정도 일에 연연하지 말자, 자른 사람들이 겪는 일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들은 다 이러고 살아, 너만 겪는 일인 것처럼 유난 부리지 마, 스스로를 다그쳤다.

혜인은 여자의 문자를 보며 여자의 꿈속 장면을 떠올려봤다. 다시 얼굴을 마주보고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서로 주고받는 모습을.
 
혜인은 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손길> 中)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넌 네 삶을 살 거야." (<아치디에서> 中)
 
그래서 이 책에 실린 7편의 작품 중 마지막 두 편인 <손길>과 <아치디에서>가 유독 반가웠습니다. 이 작품집에서 7개의 중단편이 배치된 순서 그 자체에도 은근한 기승전결 구조가 엿보이는데, 전(轉)과 결(結)로 나아가는 <손길>과 <아치디에서>에는 '이제, 앞으로'를 바라보는 시선, 미래로의 발걸음이 있습니다. 방치됐던 과거에서 재회를 건져올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도록 서로 단절의 길을 택했던 인연을 "이제 짓눌리지 않고 그리워" 할 수 있게 된 성장을 보여줍니다. 동시대 한국 여성 최은영 작가가 돌아보고 곱씹고 기억해내서 분해하는 데에 만족할 글쟁이가 아니라,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를 이미 고민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안도감에 가까운 기대를 갖게 됩니다.
 
내 얘기, 우리 얘기, 당신의 얘기를 계속 들려주세요. 기다리고 싶습니다.
 
 
*출판사 문학동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번 낭독에 실린 대목들은 <모래로 지은 집> <601, 602> <손길>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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