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전쟁 아니면 방법 없다"…日 의원 망언 또 나왔다

유성재 기자 venia@sbs.co.kr

작성 2019.05.15 16:0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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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안 하면 방법이 없는 거 아닙니까"

지난 11일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영토분쟁이 있는 오호츠크해 쿠릴열도의 쿠나시르 섬(러시아명, 일본명은 구나시리토 國後島)를 일본의 '무비자 교류 방문단'이 찾았습니다. 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 캄차카 반도 사이의 4개 섬은 2차 대전 당시까지는 일본 영토였다가 패전하면서 러시아 영토가 됐는데, 일본이 러시아와의 조약을 통해 되찾으려는 교섭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죠. 전전(戰前)에 이 섬에서 태어난 일본 국적의 선주민들은 1992년에 시작된 러시아와의 '무비자 교류'를 통해 이 지역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인도적 견지에서 선주민의 '고향 방문'이 비자 없이 가능하도록 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교류 방문단'의 일원으로 쿠나시르 섬을 방문한 일본 국회의원이 '대형 사고'를 쳤습니다. 오사카(大阪) 등 간사이(關西)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 유신의 모임(日本維新の會) 소속 중의원 마루야마 호다카(丸山穗高). 오사카 19 선거구에서 3선을 하고 있는 35세의 젊은 의원으로 '고문' 자격으로 이번 방문단의 일정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마루야마 호다카 의원 홈페이지지난 11일 이 섬의 숙박 시설인 '우호의 집'에서 열린 방문단 간담회에서 마루야마 의원은 방문단의 단장 오츠카 고야타(89) 씨와 다음과 같은 대화를 했습니다. 당시의 녹취를 들어보면 대화라기보다는 마루야마 의원의 '공격'으로 들립니다.

마루야마 의원 : 단장은 전쟁으로 이 섬을 되찾는 것에 대해 찬성입니까, 반대입니까?
오츠카 단장 : 전쟁으로?
마루야마 의원 : 러시아가 혼란스러울 때 섬을 되찾는 것은 OK입니까?
오츠카 단장 : 아니, 전쟁 같은 말은 쓰고 싶지 않아요. 쓰고 싶지 않아.
마루야마 의원 : 그래도 (그러면) 되찾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오츠카 단장 : 전쟁을 해서는 안되죠.
마루야마 의원 : 전쟁 안 하면 다른 방법이 없는 거 아닙니까?
오츠카 단장 : 아니, 전쟁은 필요 없습니다.

오츠카 단장은 이 섬에서 태어났다가 고향이 러시아의 영토가 되면서 섬을 떠났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평화교섭이 잘 이뤄져 고향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할 겁니다. 그런데 방문단의 고문으로 따라온 젊은 의원이 자기의 고향에서 '전쟁이 아니면 섬을 되찾을 수 없다'는 망언을 내뱉는 것을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당연히 발언 내용이 문제가 되자 마루야마 의원은 그제(13일) 동행했던 기자단에게 발언 내용에 대해 사과하며 철회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면서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14일) 소속 정당인 '일본 유신의 모임'에 탈당계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소속 정당은 탈당계를 수리하지 않고, 마루야마 의원을 '제명'하는 극약 처방을 내렸습니다. 마루야마 의원 본인은 트위터를 통해 "무소속으로 의원 활동하겠다"며 의원직은 계속 유지하겠다고 밝혔지만 지역구인 오사카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일본 유신의 모임'으로부터 쫓겨난 셈이니 앞으로의 정치활동에는 상당한 지장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권도 여야를 막론하고 '선을 넘었다'며 마루야마 의원의 망언을 성토하는 분위기입니다.

마루야마 의원이 술로 '사고'를 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15년에는 도쿄 시내에서 술을 마시다가 말다툼을 벌인 남자의 손을 깨물어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마루야마 의원은 금주를 약속하며 '다시 술로 문제를 일으키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면서 여론에 선처를 호소했는데, 2017년 총선에서 3선에 성공하면서 금주 원칙을 '해제'했다고 합니다. 일본 언론들은 대체로 마루야마 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 '자격미달'이라고 지적하는 논조를 보이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문제를 마루야마 의원의 '부적절한 행동 파문'으로 한정해 넘어가려는 속내도 슬쩍 내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루야마 의원이 술김이라고는 해도 일본 헌법 제9조를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전쟁 포기를 규정한 일본 헌법 제 9조일본 헌법 제9조는 전쟁의 방기(포기)와 전쟁 능력·교전권 부인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의 전쟁 또는 무력의 행사를 영원히 포기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軍)을 보유하지 않고, 교전권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아베 정권이 '개헌'의 메스를 대려는 바로 그 부분입니다.

마루야마 의원의 제명은 오늘(15일) 일본 신문들이 모두 크게 다뤘습니다. 진보성향의 신문들은 강한 논조로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지만, 그렇지 않은 쪽에서는 일단 '개인 일탈'을 부각하면서 엉뚱한 기사로 논점을 흐리려는 시도도 보였습니다. 마루야마 의원의 제명 소식을 다룬 기사 아래쪽에 극우 인사의 강연 소식을 넣은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강연 내용을 인용했다고는 해도 제목을 자극적이고 직설적으로 뽑았습니다. "(헌법) 9조야말로 헌법 위반이다"라고요.
5월15일자 산케이신문, 붉은색 테두리 기사의 제목이 "(헌법) 9조야말로 헌법 위반이다"마지막으로 이 발언을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센카쿠 문제에 대해, 종종 '외교교섭으로 해결해 간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 문제에 외교교섭의 여지 따위는 없습니다. 센카쿠 해역에서 요구되는 것은 교섭이 아니라,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물리적인 힘'입니다."

센카쿠는 잘 아시다시피 일본이 중국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지역(중국명 댜오위다오)입니다. 위의 발언에서 '센카쿠' 대신에 '북방영토'를 넣으면 이번에 문제가 된 마루야마 의원의 발언 취지와 그대로 맞아떨어집니다. 과연 누구의 발언일까요?

바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입니다. 아베 총리가 첫 수상이 되기 직전인 2006년에 출판한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美しい國へ)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일본이 '물리적인 힘', 즉 전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개헌'을 통해 실현하려는 것이 아베 총리의 '정치적 숙원'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죠. 이번 마루야마 의원의 '망언 사건'을 그저 개인의 일탈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은 그 발언의 뒤에 일본의 보수 우익 세력을 관통하는 이런 식의 지극히 위험한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