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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레이와 시대와 덴노제

이홍천 | 일본 도쿄도시대학 사회미디어학과 준교수

[인-잇] 레이와 시대와 덴노제
5월 1일부터 일본의 연호가 '헤이세이'에서 '레이와'로 바뀌었다. 일본 전역이 온통 축제 분위기다. 헤이세이 마지막 날 밤에는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카운트다운 이벤트가 열렸고 생중계됐다. 연호가 바뀌는 전후 일주일 동안은 모든 방송에서 연호와 관련된 내용을 편성했다.

스포츠 뉴스에서는 레이와 시대 첫 홈런, 첫 골, 첫 득점, 첫 우승 등 최초 관련 보도가 이어졌고, 기업들은 레이와 관련 상품을 쏟아냈다. 연호가 바뀐 첫날을 결혼기념일로 삼으려는 커플들 덕분에 결혼식장과 구청의 혼인신고 접수창구는 종일 붐볐다.

이런 축제 분위기는 '덴노(天皇, 일본의 군주)' 계승이 202년 만에 생전에 이뤄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생전 퇴위는 헌법개정 흐름을 바꿔보려는 덴노가 던진 고도의 정치 행위라는 분석도 있지만, 일본 국민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물러나 상황이 된 아키히토는 3·11 동일본 대지진 때 피해 지역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재해민의 고충을 듣는 모습으로 일본인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 덴노는 한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일본에서 덴노의 위치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헤이세이 30년간 아키히토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았고 헌법 개정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아키히토를 아베 정권이 곱게 볼 리 없다. 이런 사정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번 기회에 덴노제를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서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 64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전에는 천재지변이나 역병이 만연한 경우에도 연호를 바꿨지만, 황위 계승에 한해 연호를 바꾸는 현재의 제도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착되었다. 이는 1979년 '연호법'으로 법제화됐다.

새 덴노의 즉위는 아키히토 상황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덴노가 생전에 자신의 퇴위를 요구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지만, 실상은 과도한 격무로 인한 탈출에 가깝다. 아키히토는 1933년생으로 올해로 85세이다. 일본 남성의 평균 수명을 5년이나 지나쳤다. 일본의 평범한 시민이라면 정년퇴직 후 20년 정도 지난 시점이고 연금으로 노후를 즐기고 있을 때다.

하지만 일반인들과 달리 덴노에겐 정년이 없다.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매년 700건 이상의 공무를 수행해야 한다. 하루 2건 정도의 일정이 연중 이어지는 꼴이다. 각종 행사는 토요일, 일요일에 집중되어 있으니 주말을 즐길 여유가 없다. 주중이라도 한가롭지 않다. 각종 서류가 산더미처럼 밀려오기 때문이다. 매년 5000명이 넘는 서훈, 훈장 수여자의 관련 서류를 보다 보면 휴식을 취하기 쉽지 않는 게 현실이다.

덴노제를 유지하는 데 있어 더 심각한 문제는 후계를 이어갈 자손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30년 전 아키히토가 황위를 계승할 당시 황위 계승자는 7명이었다. 하지만 5월 1일 진행된 즉위식에 참석한 황족은 신 덴노를 포함해 3명뿐이다.

한 명은 아키히토 상황의 동생으로 황위 계승 순위 3위이지만, 이미 고령으로 황위를 이어 받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황위 계승 순위 1위인 아키시노노미야는 현 덴노의 5살 아래 동생이다. 덴노가 80세쯤 물러난다고 해도 75세에 황위를 이어받게 된다. 본인도 고령에 덴노가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황위 계승 순위에는 13명의 여성 황족은 포함되지 않는다. 남성에 한해서 황위가 계승되는 것을 두고 영국의 BBC는 일본의 여성 차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차별은 즉위식에서도 나타났다. 황위의 증표로 전해지는 삼종의 신기를 계승하는 행사에는 황후를 포함해서 여성 황족은 한 명도 참석하지 못했다.

새 덴노는 4일 즉위 축하 행사에 모인 일본인들을 향해서 '여러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퇴위한 상황이 30년 전에 '국민'이라고 표현한 것과 대조적이다. 덴노의 눈높이가 국민들에게 맞춰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덴노가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헌법 4조에 국정에 관한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선거권, 피선거권은 물론 정치적 발언도 허용되지 않는다. 일부이긴 하지만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도 제약을 받는다.

일반인들이면 당연히 누리는 기본적인 권리도 제한 받는 일본의 덴노제는 영국이나 유럽의 왕실과는 사뭇 다른 제도이지만,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키워드임에 틀림이 없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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