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日 제국군 깃발' 반환하는 美…美日 결속 강화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oneway@sbs.co.kr

작성 2019.02.25 08:11 수정 2019.02.25 08:1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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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가키 히노마루(寄せ書き日の丸).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제국군인들이 품고 다니던 일장기입니다. 무운장구(武運長久), 무사귀환(無事歸還)을 기원하는 문장과 가족, 친지 등의 자필 서명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제국군인들이 전쟁터에서 가족과 고향이 그리울 때 펼쳐보기도 하고, 전사하면 일종의 인식표 기능도 했습니다.

요세가키 히노마루는 국적과 이념을 떠나서 한 사람의 군인이 남긴 흔적이고, 유족들에게는 소중한 유품입니다. 하지만 가혹한 식민통치와 반성 없는 일본 현대 정치를 겪은 한국인에게는 전범기(戰犯旗)입니다. 그렇다면 요세가키 히노마루를 품은 일본 제국군인과 직접 전쟁터에서 싸운 미국인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지난 21일 미 인도-태평양사령부 공식 웹사이트에 흥미로운 보도문이 올랐습니다. 전북 군산의 미 공군 기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미군 간부가 자신의 조부가 보관하던 요세가키 히노마루를 일본 측에 돌려줬다는 내용입니다. 성대하지는 않았지만 근엄하게 거행된 반환식도 상세하게 다뤘습니다.

미국 퇴역 군인이 갖고 있던 요세가키 히노마루가 일본에 반환됐다는 소식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미군 공식 홈페이지에서 비중 있게 다룬 건 유례가 없습니다. 미군 지휘부가 미일 동맹의 무게를 강조하고 일본의 급속한 재무장을 부추기는 최근 추세와 맞물려 미국의 속내가 어렴풋이 읽힙니다. 미중 양극체제로 재편되고 있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친일적'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미국의 행보입니다. 한국이 처신하기가 참 까다로운 구도입니다.
지난 21일 인도-태평양사의 '요세가키 히노마루 반환' 보도문● 미군 현역 최초의 요세가키 히노마루 반환

미 인도-태평양사령부 보도문에 따르면 군산 미 공군 기지에 근무하는 윌리엄 로웰 암스트롱 상사는 지난 14일 일본 타카사키에서 조부가 2차 대전 중 노획한 요세가키 히노마루를 유족들에게 돌려줬습니다. 일본 제국군인 마사시 이토의 요세가키 히노마루입니다. 현역 미군 장병이 처음으로 요세카키 히노마루를 반환한 것이라고 인도-태평양사령부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암스트롱 상사는 "내 할아버지가 이 깃발을 훌륭한 상태로 오래도록 보관해줘서 고맙다", "이 깃발을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주게 돼서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사시 이토의 조카인 미치오 미키 씨는 "수백만 명 전사자들 깃발 중에서 이 깃발이 되돌아와서 놀랍다", "암스트롱 상사 조부의 사려 깊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화답했습니다.

인도-태평양사령부 보도문은 요세가키 히노마루를 일본의 전투 깃발, 행운의 깃발,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인이 담긴 깃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미군 보도문의 요세가키 히노마루 묘사에서 제국주의를 떠오르게 하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요세가키 히노마루는 일본 제국군의 상징입니다. 이번 반환식도 일본 제국주의 전몰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군마 고코쿠 신사에서 열렸습니다. 몇 년 전부터 오본(お盆) 소사이어티라는 단체에서 전 세계에 산재한 요세가키 히노마루를 집중적으로 수집해 유족에게 돌려주는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이번 반환식도 같은 맥락입니다. 인도-태평양사령부 보도문, 오본 소사이어티의 의도야 어떻든 일본이 항공모함 전단을 이끌고 미국과 싸우던 과거 일본 제국주의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입니다.

● 일본도 미국도 변했다…한국의 길은?

인도-태평양사령부의 요세가키 히노마루 보도문을 몇몇 젊은 장교들에게 보여줬습니다. 한 영관급 장교는 "미군이 '2차 세계대전 깃발 반환 세리머니를 홍보하자'고 공식 결론을 내리고 보도문을 올린 것으로 보인다", "미일 간 정치, 군사적으로 아주 가깝거나 앞으로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런 보도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른 한 장교는 "일본군과 싸운 암스트롱 상사의 조부가 이번 일을 좋아했을까?", "현재의 한미일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체제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미국이 명실상부 세계 패권국이 됐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급부상하며 지역 패권국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미국은 중국을 억제하고 일본을 부양해 아시아 안에서 지역적 세력균형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일본은 이에 부응해 전수방위(專守防圍) 원칙에서 슬금슬금 후퇴하며 보통국가, 군사강국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초 일본 도쿄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에서 제리 마르티네즈 당시 주일미군 사령관은 "일본은 엄청난 규모의 최첨단 군사장비를 도입하고 있다", "이는 현재 주변의 위협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런 위협에 장기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주변국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일본의 군비증강에 대해 미군 고위 지휘관이 "올바른 정책 방향"이라고 공식 환영한 겁니다.

마르티네즈 사령관은 이어 한미일과 한일 안보협력을 강조하며 "수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일 양국의 과거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과거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상황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화로 풀릴 과거였으면 세기가 바뀌기 훨씬 전에 한일 두 나라는 동맹을 맺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두 나라의 정치는 미래지향적 통 큰 타협은커녕 앞으로 몇 년간은 '대화 불가'의 관계입니다. 미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을 중심으로, 일본의 군비 증강을 독려하며 중국을 견제하는 아시아 안보협력체제를 구축해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