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2,200억 대 비리 터진 뒤 금지…'쪽지 예산' 미국처럼 없애면 된다

손석민 기자 hermes@sbs.co.kr

작성 2018.12.30 14:2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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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여전히 씁쓸한 뒷맛을 남겼던, 그러면서도 새해에 또 반복될 것 같은 찜찜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회에서 벌어진 예산안 심사 잡음이었습니다. '밀실 심사', '깜깜이 심사', 또 이른바 '쪽지 예산' 관행은 소나기 식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만 하면 내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일까요? 의회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새해에는 우리도 구태를 탈각(脫却)했음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이른바 '쪽지 예산'이 가능한지 미 하원에서 예산을 다루는 조세세입위원회(Ways and Means Committee)를 찾아가 물어 봤습니다. 로스캠(Roskam) 소위원장은 “한국의 쪽지 예산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서 “미국에서도 한 때 '이어마크(earmark)'라 불리는 비슷한 관행이 있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어마크'는 말 그대로 귀에 거는 표식, 귀표를 뜻하는데 예전에 자신이 키우던 양이나 소의 귀에 소유권 표시를 해뒀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꼬리표 예산 정도가 될까요?
예산심사 미국의회암튼 이런 '이어마크'는 미 의회조사서비스의 연구결과 1994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282%나 증가했습니다. 1994년에 4,155건이었던 것이 2011년에는 1만5,887건으로 폭증했습니다. 그만큼 미국에서도 예산안 심사 도중에 끼워 넣기가 횡행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이어마크 관행은 2011년 돌연 금지됐습니다. 크고 작은 사달이 쌓이고 쌓여 의원들이 못 버틸 정도가 됐기 때문입니다.
 
2005년 알래스카 주의 돈 영(Don Young, 공화당) 하원의원은 공항이 있는 작은 마을과 주민 50명이 사는 섬을 연결하겠다며 2,300만 달러(지금 우리돈으로 250억 원)의 '이어마크'를 끼워 넣었습니다. 연방정부의 신도시건설 관련 종합법안에 이 사업을 쪽지 예산 방식으로 넣은 겁니다. 그런데 이 마을과 섬 사이에는 이미 30분 간격으로 다니는 정기 페리편이 있었습니다. 페리를 타면 10분 만에 건널 수 있는데, 의원이 지역구민을 위한다며 다리를 지어주겠다고 한 거죠. 결과적으로 이 예산은 취소됐습니다. “이 돈은 다른 곳에 더 잘 사용될 수 있다”며 알래스카 주민들이 나서 예산 배정 취소를 촉구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더 노골적인 사례를 볼까요? 1999년부터 2007년까지 51대 하원의장을 지낸 데니스 해스터트(Dennis Hastert)는 자신의 부동산 가까운 곳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려고 2억700만 달러, 무려 2,200억 원의 쪽지 예산을 밀어 넣은 게 들통나면서 전국적인 스캔들의 단초가 됐습니다. 해스터트는 이 밖에도 아동 성추행 등의 비위 사실이 드러나 형사처벌까지 받았습니다. 해스터트 역시 공화당 소속이었는 바, 결국 공화당이 이끄는 의회가 2011년 스스로 나서 '이어마크'를 법으로 금지시켰습니다.
 
비리가 터지면서 여론에 떠밀려 자정 능력이 발휘된 게 미국 판 '쪽지 예산'이라면, 양원제를 택하고 있는 미국 고유의 시스템에서 참고할 부분도 있습니다. 바로 한국 판 '막판 얼렁뚱땅 심사'를 막기 위한 법정 심의 기간 확보입니다.  

미 의회는 정부안과 별도로 의회 자체적으로 예산안을 마련해 12개 위원회에서 심의합니다. 그리고 하원과 상원, 때로는 양원 협의회의 표결 절차를 거쳐 예산안을 법안으로 확정합니다. 이 기간이 길게는 여덟 달이나 됩니다. 예결위원회 혼자서 예산 전체를 결정하는 한국과 달리 권한을 12개 위원회별로, 또 상하원 간에 나눠 상호 견제 장치를 둔 겁니다. 아래의 흐름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① 대통령 예산안 의회 제출(2월 첫째 월요일) → ② 의회 예산 결의안(Budget Resolution) 확정(4월15일) → ③ 의회 예산안 편성(5월15일~9월 말) : 상하원 각각 12개 세출위원회(Appropriations Committee)가 분야별 세출 심의 착수, 위원회 별로 예산안을 법률로서 성안시키는 작업을 하게 됨. 이렇게 상하원을 통과한 예산안은 모두 12개 법률안이 되며 이를 대통령이 서명 후 발효됨 → ③-1. 행정부의 예산안 중간 검토(7월15일) : 대통령 예산안 제출 후 변화된 상황 반영해 의회에 제출, 의회가 논의 중인 예산안에 대한 입장 표명도 겸함. → ④ 대통령의 예산안 서명(9월30일까지) → ⑤ 회계연도 개시(10월1일)

로스캠 소위원장은 “표결 대상이 되는 예산안은 어떤 것이든 표결 전에 반드시 일반에 공개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납세자들은 투명한 절차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충분한 심의 기간과 상호 감시와 견제 절차를 중시하는 미국의 방식은 의원들의 선의(善意)에 맡겨선 날림 예산, 밀실 예산을 막을 수 없다는 경험에서 비롯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