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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학살 침묵' 아웅산 수치 인권상 박탈…피와 눈물의 로힝야족 역사

정윤식 기자 jys@sbs.co.kr

작성 2018.11.15 16:4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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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리포트+] 학살 침묵 아웅산 수치 인권상 박탈…피와 눈물의 로힝야족 역사
'살아 있는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 아웅산 수치의 명예가 다시 한번 추락했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가 최고 권위의 인권상인 '양심대사상(Ambassador of Conscience Award)'을 박탈하겠다고 밝힌 겁니다. 수상 9년 만의 일입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아웅산 수치에 대해 "로힝야족에 가해진 미얀마 정부군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로힝야족에 대한 탄압으로 지난해부터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의아한 건 이런 국제 여론과 미얀마 내부의 여론이 사뭇 다르다는 겁니다.

많은 미얀마인들은 로힝야족 탄압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아웅산 수치와 미얀마 정부도 국제 사회의 비판에 크게 개의치 않는 분위기입니다.

'인권을 버리고 민족을 택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는 아웅산 수치. 로힝야족 탄압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요?

로힝야족은 미얀마 땅에서 어떤 존재일까요?

■ 약소국을 짓밟은 제국주의 시대의 그림자…로힝야족 비극의 시작

로힝야족과 미얀마의 갈등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1885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분란의 씨앗은 제국주의 영국의 군대가 미얀마 땅에 주둔하면서부터 싹트기 시작됐습니다. 당시는 공식 영문 표기가 미얀마가 아닌 버마로 지칭되던 시기입니다.

'대영제국'이라고 스스로 칭하던 영국은 버마 최후의 왕조인 알라웅파야 왕조와 치열한 전쟁 끝에 버마 땅을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점령자인 영국군이 맞닥뜨린 건 건 버마인들의 강력한 반발이었습니다. 저항의 선봉에 섰던 이들은 130여 개 민족으로 이뤄진 버마에서 인구 비중 68%를 차지하는 버마족이었습니다.
아웅산 수치 앰네스티 상 박탈 리포트+저항을 막기 위해 제국주의 영국이 선택한 방법은 인종 분리 정책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을 농지에서 쫓아낸 뒤 자신들의 영향 아래 있던 인도 동부 벵갈지역에 살던 이슬람교도들을 이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슬람 이주민들은 중간지배 계층으로 군림했는데 이들의 후손이 로힝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 로힝야족이 8세기부터 해당 지역에 거주했고 남아시아에서 이주해 정착한 오래된 소수민족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이런 주장을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90%가 불교를 믿는 당시 버마에서 소수 이슬람교도가 식민 통치의 중간 지배세력이었다는 점과 그 탓에 종교 간 갈등이 극에 달했다는 겁니다. 버마 땅에 영국이 시한폭탄을 심어놓은 셈이었습니다.

■ 영국과 일본의 2차 세계대전 대리전…죽고 죽이는 복수의 역사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던 제국주의 일본은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령이던 버마를 침공했습니다. 버마 땅을 밟은 일본이 싸워야 했던 상대는 영국군에 의해 지배세력으로 임명된 이슬람교도들이었습니다. 

영국의 지배력을 약화시켜야 했던 일본군은 이슬람교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이슬람을 믿던 로힝야족도 탄압의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일본과 맞서 싸우던 영국은 반일 감정이 고조된 로힝야족에서 의용군을 모집한 뒤 무장시켰습니다. 영국과 일본 두 제국주의 국가의 대리전이 미얀마 땅에서 벌어진 셈입니다.

더 큰 문제는 무장한 로힝야족이 일본군과 싸우지 않고 불교도들을 공격하면서 벌어졌습니다. 민족 갈등에 종교까지 개입하면서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무력을 손에 넣은 로힝야족은 불교 사원과 불탑을 파괴했고 버마족이 대다수인 불교도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상황은 다시 뒤바뀌었습니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버마 정부는 로힝야족을 식민지배의 앞잡이로 보고 탄압했습니다. 불법 이민자로 간주하고 방글라데시 국경 지역인 라카인 서부로 내쫓았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잔재라며 버마라는 이름을 버리고 미얀마를 표방한 군부였지만 로힝야는 여전한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1982년 국적법을 제정해 로힝야족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고 불법 체류자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불교로 종교를 바꾸길 강요하거나 토지를 몰수하는 등 탄압은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적으로 가해졌습니다.

■ "타락인가? 침묵인가?" 아웅산 수치가 무너뜨린 국제사회의 기대
아웅산 수치 앰네스티 상 박탈 리포트+숱한 세월 동안 쌓인 갈등의 역사는 2000년대 들어 더욱 과격해졌습니다. 2012년 로힝야족의 불교도 여성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불교도와 이슬람 교도 간 유혈충돌이 일어나 2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2016년 10월에는 로힝야족 반군 조직을 표방한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의 전신인 무장단체가 경찰 초소를 습격해 9명의 경찰관을 살해했습니다.

ARSA가 2017년 8월 미얀마 정부를 상대로 항전을 선포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미얀마 정부는 ARSA를 테러세력으로 지목하고 대대적인 소탕전에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7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미얀마 정부군을 피해 집을 버리고 방글라데시 국경 지대 등으로 떠났습니다.

로힝야족 사태가 악화할수록 국제 사회가 '미얀마 민주화의 어머니'인 아웅산 수치에게 거는 기대는 컸습니다. 평생을 민주화와 독재 타도에 바친 수치였기에 국제사회의 비난은 더 컸습니다. 국제앰네스티는 양심대사상 박탈에 대해 "아웅산 수치가 한때 자신이 쟁취하고자 싸웠던 가치들을 배반해 상을 유지할 자격을 잃었다"고 비판했습니다.아웅산 수치 앰네스티 상 박탈 리포트+유엔 인권이사회 결의로 조직된 진상조사단은 최근 이사회에 제출한 최종보고서에서 미얀마군에 희생된 로힝야족이 1만여 명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미얀마군에 의한 성폭행과 어린이 살해 등 반인륜적 범죄 소식도 속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유엔은 지난해 9월 이번 사태를 '인종청소' 집단학살' '반인도범죄'라고 규정했습니다.

미얀마의 인종과 종교, 역사를 알지 않고서는 로힝야족 탄압에 대해 쉽게 말하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과거를 아는 것과 반인권적인 탄압을 비판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증오와 극단주의에서 비롯된 폭력은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된다는 사실은 숱한 인류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픽 : 감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