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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61 : 벽사와 독고를 쥐고 강호에 웃다…'소오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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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초식을 아무리 깬들 살아 있는 초식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법. '살아 있다'는 말을 똑똑히 기억해두어라. 초식을 배울 때는 살아 있는 것을 배우고 초식을 펼칠 때 역시 살아 있는 것을 펼쳐야 한다.… 오악검파에는 어리석은 제자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사부가 전수한 초식만 고집스레 익히면 언젠가는 고수가 될 수 있다 생각하지. 허, 당시 삼백수를 달달 외면 시는 짓지 못할지언정 낭송은 잘하겠지. 남이 지은 시를 외워 그럴듯하게 흉내는 내겠다마는 제 힘으로 시를 써내지 못하면 어찌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겠느냐?"

飛雪連天射白鹿(비설련천사백록) 하늘 가득히 눈이 휘몰아쳐 흰 사슴을 쏘아가고,
笑書神俠倚碧鴛(소서신협의벽원) 글을 조롱하는 신비한 협객이 푸른 원앙새에 기댄다.

이중에서 '소', 강호의 속됨을 웃어버리는 [소오강호]의 완역판이 드디어 한국에도 나왔습니다. 홍콩의 무협소설 작가 김용 선생의 그 [소오강호]입니다. 비호외전, 설산비호, 연성결, 천룡팔부, 사조영웅전, 백마소서풍, 녹정기, 소오강호, 서검은구록,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벽혈검, 원앙도… 김용 선생이 쓴 중장편 무협소설 14부의 각 앞 글자를 따면 저 위의 대련이 나옵니다.

홍콩의 언론인인 김용 선생은 그가 운영하던 신문 '명보'의 구독자 수를 늘리기 위해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가 소설을 쓰던 시기이고 그 다음엔 절필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 14편에 월녀검을 합쳐 15편 말고는 더 없습니다. 중국에서 김용의 소설은 끊임없이 영화와 드라마화가 되고 있습니다. 소오강호는 낯설지 몰라도 임청하, 이연결이 나왔던 영화 [동방불패]를 기억하는 분들 있을 것 같은데 이 영화는 소오강호에서 동방불패가 등장하는 부분을 따로 떼어 각색한 내용입니다.

저렇게 오래된, 그것도 무협소설을, 왜 많이 읽고 계속 다른 창작물을 만드는 거냐, 고 물으신다면 무엇보다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수십 번씩 읽었습니다만, 오랜 만에 다시 꺼내 읽으면 재미가 새록새록 돋습니다. 인물 하나하나,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살아 숨쉬고 고전의 향취가 묻어납니다. 실제 중국의 역사와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도 매우 뛰어납니다. 요즘 말로 '덕후'라 할 만한 이들의 취미생활 같은 시, 서예, 음률, 회화, 요리, 주도 등을 묘사하는 대목은 유튜브 저리가라 할 정도로 생생합니다. 10대 와 20대, 30대에 읽었을 때 느낌도 꽤 다른데 더 나이가 들면 어떨까 싶니다. 무엇보다 어려서 읽었던 책이라 그렇겠지요런.

15편의 작품 중에 재미로나 작품성으로나 수위를 다툴 만한 건, 자타공인 녹정기, 천룡팔부, 그리고 소오강호 정도인데요, 여기 소오강호는 소설의 제목이면서 소설 속 등장하는 칠현금과 퉁소 합주곡의 이름입니다. 무협의 세계를 일컫는 강호, 그 강호를 웃어버리다, 강호의 속됨을 비웃다 정도의 뜻입니다.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무협소설인 만큼 절대무공도 등장하죠. 벽사검법 혹은 규화보전, 그리고 독고구검. 전자는 무공을 익힌 자들이 모두 그 강력한 위력을 동경해 서로 차지하려 덤비는 무공. 좌우 대립을 방불케하는 정파와 사파의 대립 속에 저들 무공을 탐하는 이들의 쟁투와 음모, 속고 속이는 가운데 처절한 승리와 패배, 반전까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저기 있는 이화주는 맛보았소? 저 술은 비취잔에 마셔야 하오. 백낙천은 항주춘망이라는 시에서 '붉은 소매 비단 잣는 솜씨 뽐내고, 푸른 깃발 이화주 파는 주막 보이나니'라고 노래했소. 서호 기슭에 있는 항주의 주막에서 이 이화주를 산다고 생각해보시오. 아아, 그 붉고 푸름의 조화가 이화주를 어찌나 맛깔스럽게 만드는지!"

"그들 역시 무릎 꿇고 절을 했지만 임아행은 일어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영호충이 있는 곳에서는 임아행의 얼굴조차 확실히 볼 수 없었다. 그는 높은 자리에 앉은 임아행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자리의 주인이 임아행이든 동방불패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오늘 밤의 합주로 이 소오강호곡을 아낌없이 쏟아냈으니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이 곡이 존재했고 형님과 제가 함께 연주해냈으니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면리장침이란 곧 단단한 바늘을 숨긴 솜과 같은 것이었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부드럽고 가볍고 폭신폭신한 솜은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지만, 움켜쥐면 솜 안에 숨겨진 바늘이 손바닥을 꿰뚫을 수 있었다… 약하게 쥐면 경상에 그치지만 힘껏 쥐면 중상에 이르는 이치였고, 이는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와 업연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김용 선생이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미명의 권력투쟁이 극심할 때라 이를 소설에서 빗댔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그래서 야심을 드러내면서 공공연하게 오악검파를 합병하려는 음모를 펼치는 좌냉선은 누구, 음흉하게 속내를 숨기면서 한방 역전을 노리는 암투의 화신은 누구… 그렇게 정치인을 소설 속 인물에 비유해 토론하기도 했다고 하죠.

이 소설 완역판이 나온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어떤 기사들이 쏟아졌는지 궁금해 찾아보니 몇 개 없었습니다. 요즘 기자들이 잘 몰라서 그런 것 같다는데… 한편으로 그럴 법도 합니다. 제가 해적판으로 읽은 것도 20년 전이니까요. 그럼에도 고전의 힘은 한때 반짝 유행과는 다르니 더 많은 새싹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천룡팔부와 녹정기 완역판도 내년 이후 출간하려는 계획이 있다던데 그것 또한 잘 진행됐으면 합니다.

*출판사 김영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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