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골룸] 북적북적 160 : 그 여름, 어른학교 아이학교 -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 오디오 플레이어를 클릭하면 휴대전화 잠금 상태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오디오 플레이어로 듣기


혹시 그런 책, 있으신가요? 어렸을 때 읽었습니다. 너무 다시 읽고 싶고, 간직하고 싶은데, 줄거리 같은 건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제목이나 작가를 모릅니다. 그런 책이 있으면, 가끔 너무 애가 닳죠.

온라인에서 보면 '혹시 이 노래 아세요? 너무 찾고 싶은데 따다딴 따다딴 이렇게 시작해요' 이 정도만 써놨는데도 '이거 같은데요?' 하면서 금세 찾아주는 능력자들이 있습니다.

늘 그렇게 어딘가에 물어보고 싶었던 책. '일본 소설인데, 파리를 키우는 1학년짜리, 자폐가 진행되고 있어 보이는 아이와 진짜 좋은 담임 선생님이 나와. 그 아이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하다 고문당해 죽은 한국인 친구의 몫까지 대신 살고 있어. 담임 선생님 말고 다른 선생님이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피를 먹고 살아. 그걸 알고 먹는 사람도 있고, 모르고 먹는 사람도 있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어. 이렇게 삶과 세상을 관통하는 진실된 말을 나는 지금까지도 다시 들어보지 못한 것 같아.'

실은 이 비슷하게 몇 번 얘기를 꺼내보기도 했는데, 희한하게 아무도 안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보물 같은 책이 이렇게 잊혀졌구나… 하고 접었던 소설.

그런데 실은,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에 재출간돼서 수십 쇄를 찍은 스테디셀러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그 제목과 2002년 재출간 버전의 제목이 완전히 달라 저만 모르고 있었던 거예요, 첫사랑을 다시 만난들 이렇게 설렐 것 같지 않습니다.

어른이 돼 수십 년 만에 다시 읽어봐도, 역시, '당신이 죽기 전에 읽어야 할 00권의 책'에 들어간다고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는 세계아동문학사의 걸작. 오히려 아동으로서 읽었던 때에 느꼈던 그 감동은 더욱 커지고, 사회와 어른들에게 던지는 그 예리한 질문들의 모서리가 칼끝인 양 날카롭게 찔러오는 진정한 어른소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를 소개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ABE 88권이라고, 아시는 분이 별로 없이 절판된 듯한 엄.청.난. 아동문학전집이 있었습니다. 제게는 인생전집입니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는 그 88권 가운데 끝에서 두 번째인 87권째 책, '어른학교 아이학교'라는 이름으로 90년대에 국내 출간된 바 있습니다.)

"데쓰조의 이야기는 파리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고다니 후미 선생님은 데쓰조네 담임인데, 결혼한 지 겨우 열흘밖에 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한 지도 얼마 안 되고 해서, 고다니 선생님은 데쓰조의 행동에 기겁을 했다. 고다니 선생님은 교무실로 뛰어 들어와 심하게 구역질을 했다. 그리고는 울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란 교감 선생님이 허겁지겁 교실로 달려가 보니, 데쓰조가 흰자위를 들낸 채 뚫어지게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데쓰조의 발밑을 보고, 처음에 교감 선생님은 무슨 먹음직스러운 과일이라도 떨어져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을 들여다 본 순간, 무심결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두 쪽으로 찢어진 개구리였다. 개구리는 아직도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흩어진 내장이 마치 붉은 꽃 같았다. ......고다니 선생님은 개구리 먹이를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쓰레기 처리장에 들어가서 파리를 잡았다는 아이가 둘 나왔다. 쓰레기더미 위에서 네댓 마리를 잡았다는 아이와 처리장 안에 있는 어느 집 옆에서 병 속에 든 파리 열세 마리를 잡았다는 아이였는데, 고다니 선생님은 병 속에 든 파리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때는 딱히 마음에 두지 않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고다니 선생님은 이제 갓 부임한, 열정이 있지만 아직은 서투른 신임교사입니다. 쓰레기 처리장 안 단지 안의 아이들과 일반 주택 단지의, 이른바 계급과 환경이 크게 다른 아이들이 섞여 있는 이 초등학교는 젊은 교사가 빠른 시간 안에 좌절하거나 냉담해지기 쉬운 곳입니다. 게다가 고다니 선생님의 반에는, 어쩌면 자폐가 진행되고 있는 걸로 보이는 쓰레기 처리장의 아이, 데쓰조가 있습니다. 그 데쓰조가 일으킨, 어른들로선 일견 이해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에서 이 장편소설은 시작됩니다.

(나중에 그 사건을 일으킨 데쓰조의 폭력적 행동의 동기가 밝혀지는데, 데쓰조는 쓰레기 처리장에서 파리들을 마치 반려동물처럼 애지중지하며 소중히 키우고 있습니다.)

고다니 선생님은 때로 절망하지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데쓰조와 담임을 맡은 모든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냅니다.

"고다니 선생님이 보여준 글은 다음과 같았다. <파리는 나면서부터 부모한테 버려진 채 평생 친구도 가족도 집도 없이 혼자 산다. 항상 벌, 거미, 참새 등의 위협을 받지만 남을 위협하는 일은 없고, 먹이라고는 인간 사회의 폐기물 밖에 없다. 파리의 생태는 전혀 아름답지 않지만, 잔인하지 않으며 극히 조촐한, 말하자면 서민들이 사는 모습과 닮았다.> 다 읽고 나서 아다치 선생님이 웃기 시작했다. "뭐야, 이건. 마치 데쓰조 이야기 같잖아?"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렇군. 데쓰조는 가만히 있는데 옆에서 쓸데없이 훼방을 놓는다, 그게 다름 아닌 학교 선생이다, 이거 아니오?" "맞아요.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뭐 그렇게까지 파리 역성을 들어줄 건 없지만, 데쓰조가 이른 봄부터 파리를 길러서 번식시켰다면 세균이 묻어 있는 파리라는 비난은 잘못된 거 아니겠어요?" ......고다니 선생님은 파리 분류책을 꺼냈다. "데쓰, 고다니 선생님이 파리 공부를 하고 싶다고 자기를 제자로 받아 달라는구나. 잘 가르쳐 드려." 아다치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했다."

데쓰조의 할아버지, 바쿠 씨에게도 남다른 삶의 비밀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제가 여태까지 읽어본 일본 소설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이기도 합니다.

"어느새 바쿠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즐거운 표정이 사라지고 없었다. "저는 젊은 시절 도쿄에 있는 W대학에 다녔지요." 고다니 선생님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친구가 있었어요. 좋은 놈이었죠. 김용생이라는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내 평생 그렇게 훌륭한 사내는 본 적이 없답니다." 바쿠 할아버지는 옛일을 떠올리며 눈을 끔뻑거렸다. "그 무렵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습니다. 용생이는 불행한 조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지요. 마침 그런 모임이 있어서, 거기서 조국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던 거예요. 폭탄을 던진 것도,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자기 나라 역사를 공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얘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선생님." 바쿠 할아버지는 얼굴이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김용생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친구라는 이유로 나까지 끌려갔지요." 고다니 선생님은 가슴이 아파왔다. "고문이라는 걸 아십니까, 선생님? 인간은 못 하는 짓이 없어요. 악마가 되라고 하면 당장에 악마가 될 수 있더군요. 그들은 용생이가 공부하던 모임의 회원 이름을 대라며 나를 고문했어요. 천장에 매달고는 대나무 칼로 때리더군요. 그런 짓은 사무라이 시대에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웬걸요. 나도 한창 젊은 나이라 말대답을 한 탓에 초주검이 되고 말았지요.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잠깐이었고, 손톱 밑을 송곳으로 찔리고 뜨거운 물세례를 받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녹초가 돼 버렸습니다.".....


바쿠의 이야기는 제가 지금까지 읽었던 어떤 일본 소설에서도 보지 못한 통렬한 자국 비판이고, 일제강점기에 대한 일본 지식인의 참회입니다. 어렸을 때 이런 책을 읽었던 저로서는, 지금 일본 우익의 득세가 좀 믿기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그래, 역시 일본이란 나라에 그것밖에 없었다면, 어쨌든 지금까지의 일본은 불가능하다, 이 책을 쓴 하이타니 겐지로 같은 지식인들과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연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교사 출신으로, 어느 날 교단을 떠나 작가가 된 하이타니 겐지로는 1974년에 이 소설을 씁니다. 데쓰조는 겐지로의 교사 시절에 실제 모델이 된 학생이 있었던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다니 선생님은 아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데쓰조가 연필을 쥐고 뭔가 쓰고 있었기 떄문이다. 태연한 척하며 슬쩍 들여다보니, 데쓰조는 열심히 글을 쓰고 있다. 고다니 선생님의 가슴이 더 세차게 쿵쿵 뛰었다. 고다니 선생님은 데쓰조가 연필을 놓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말했다. "다 됐어요?" "네에-" 아이들 대부분이 대답했다. "누구 글을 읽어볼까?" 고다니 선생님은 망설였다. 처음으로 데쓰조가 글을 썼으니까 그 글을 읽어주고 싶다. 하지만 만에 하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글이라면, 데쓰조에게 창피만 주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고다니 선생님은 머리가 어찔어찔했다. '아이들을 믿어라!'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데쓰조를 믿자. "데쓰조의 글을 읽어보죠." 고다니 선생님은 데쓰조의 원고지를 손에 쥐고는 급히 훑어 내려갔다.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이번 낭독에서는 데쓰조 이야기에 집중했지만,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여러 학생들과 인물들의 이야기가 풍부하게 얽혀 있습니다. 바쿠 할아버지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고요. 특히 미나코라는, 곧 특수학교로 가게 될 중증장애아를 잠시 받아들여 함께 생활하는 고다니 선생님 반 아이들의 분투와 변화가 굉장히 감동적입니다. 고다니 선생님이 미나코란 장애아를 받아들이면서 겪게 되는 학내외의 갈등도 아주 입체적이고 첨예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은 주인공들, 그러니까 고다니와 아다치 교사, 바쿠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작정 비난하거나 대상화하지도 않습니다. 분명 작가의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작가가 좀 더 사랑하고 지지하는 등장인물들이 있지만, 그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다양한 상황과 입장을 살피고, 담백하고 깊이 있게 사회의 입장차들과 그 이면을 함께 보여줍니다.

특히 소설의 뒷부분은 데쓰조를 비롯한 소설 속 중심 어린이들이 살고 있는 쓰레기 처리장 철거와 이로 인한 아이들의 강제 전학 문제가 큰 축을 이룹니다. 이 과정에서 이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이 오늘날에도 조금도 달라진 바 없이 통렬합니다.

"시로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은 도둑질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네댓 번 하고는 그만뒀지. 하지만 우리 형님은 아무렇지 않게 도둑질을 했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했지. 형제가 일곱 명이나 되었기 떄문에, 제비가 새끼한테 줄 먹이를 나르듯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도둑질을 한 거야." "경찰한테 안 잡혔어?" "잡혔지. 수도 없이 잡혔어. 하지만 또 몇 번이고 도둑질을 했어. 우리 형은 결국 소년원에 들어갔지." 아이들은 겁먹은 얼굴을 했다. "그날 우리 형은 죽었어." 아다치 선생님이 너무나 간단히 말해 버렸기 떄문에, 아이들은 한동안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 형은 미사에 오빠처럼 책 읽는 걸 좋아했어. 형이 죽었을 때, 주머니 속에는 너덜너덜해진 <시튼 동물기> 문고판이 들어있었어. 몇 번이고 읽었던 모양이야." 아다치 선생님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세상에 도둑질을 하고도 태연한 사람은 없어. 선생님은 평생 후회하게 될 착각을 했던 거야. 나는 형님의 목숨을 먹었어. 나는 형의 목숨을 먹고 자랐어." 아이들은 조용했다.

"나 뿐만이 아냐. 우리는 모두 남의 목숨을 먹고 살고 있단다. 전쟁에 반대하다 죽은 사람들 목숨 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먹고 있는 사람도 있고 괴로워하면서 먹고 있는 사람도 있어." 아다치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선생님 형, 불쌍해." 미사에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다치 선생님은 미사에를 따뜻이 안아주었다. "미사에는 마음이 아름다운 아이구나. 저기, 봐. 또 별똥별이 떨어진다. 저 별은 우리 형님이야. 미사에처럼 마음이 깨끗한 우리 형 별 말이야." 아이들은 모두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별은 젖은 물고기의 눈처럼 사랑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은 지 수십 년이 됐지만, 읽자마자 가슴에 박혀 잊어본 적이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먹고 자란다, 는 아다치 선생님의 바로 이 대사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제 머릿속에서 조금은 변형이 돼 있긴 했더라고요. '모든 사람은 타인의 피를 먹고 자란다'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아무튼, 어린 시절에 -어쩌면 좀 늦기 전에-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목숨을 먹고 자란다, 태연하게 먹는 사람도 있고, 괴로워하며 먹는 사람도 있다… 는 말을 읽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다시 읽어도, 삶과 역사와 세상을 관통하는 가장 포괄적인 진실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 말을 어린 시절에 이처럼 아름답고 설득력 있는 걸작에서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제게 언젠가 아이가 생긴다면 꼭 함께 읽고 싶은 책입니다.

이 책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해주셔서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양철북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 <골룸: 골라듣는 뉴스룸> 팟캐스트는 '팟빵'이나 '아이튠즈'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 '팟빵' PC로 접속하기
- '팟빵' 모바일로 접속하기
- '팟빵' 아이튠즈로 접속하기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