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V] "초동수사만 제대로 했어도…" 끝나지 않은 '대구 여대생 살인사건'

정윤식 기자 jys@sbs.co.kr

작성 2018.10.20 09:05 수정 2018.10.20 16:1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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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뉴스의 새 스토리텔링 영상 컨텐츠 '보이스V'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와 특별한 콜라보레이션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이번 순서는 스리랑카인 피의자가 최근 현지 법정에 다시 서게 되면서 재조명된 '보이스V X 그것이 알고싶다 - 1998년 대구 여대생 살인사건' 편입니다.

1998년 10월 대구에서 채소 가게를 하던 정현조 씨 부부는 이른 아침 늘 그렇듯 바빴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대학교 새내기 딸 은희가 엉뚱하게도 병원에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급히 달려온 엄마 아빠가 마주한 건 싸늘한 딸의 시신이었습니다. 한 여대생의 억울한 죽음. 많은 이들에게 슬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분노를 자아내게 한 대구 여대생 살인사건이 세상에 처음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 대학교 1학년 새내기 정은희 양의 죽음…그녀는 왜 고속도로에 뛰어 들었을까

정은희 양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트럭 운전기사였습니다.

새벽 5시 반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 앞에 뭔가 갑작스레 튀어나왔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피할 수 없었다고 트럭 운전기사는 경찰 조사에서 진술했습니다. 정 양은 뒤이어 달려온 차량에 2차 교통사고까지 당했습니다.

사고가 난 곳은 고속도로인데 주변은 온통 공장뿐이었습니다. 정 양이 다니던 대학교는 물론 집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과연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사고가 일어나기 전날 밤은 대학교 축제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대학교 새내기였던 정 양은 캠퍼스 내 주점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밤 10시 40분쯤 친구 김 군을 부축하고 학교를 나섰습니다. 술은 마셨지만 정 양의 걸음걸이는 이상이 없었다고 합니다.

술에 취했던 친구 김 군은 30분 뒤쯤 학교 앞 길가에서 정신이 들었는데 같이 귀가하던 정 양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정 양이 발견된 건 그로부터 여섯 시간 뒤 차가운 고속도로 위였습니다.

■ 친구들이 찾아낸 피해자의 속옷…그러나 경찰은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해버렸다

그날의 진실은 무엇일까. 다음날 현장에서 중요한 증거물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곧 해결될 것만 같았습니다. 친구들이 사건 현장을 직접 헤집다가 속옷을 찾아낸 겁니다.

[오석현 (가명) / 피해자 대학 동기 : "유품이라도 있을 게 아니냐. 있으면 주워다 주자고 해서. 화장품도 있었고 찢긴 리포트 종이 같은 것들도 있었고."]

실제로 숨진 정 양은 속옷을 입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단순 교통사고로 보기에는 일반인의 눈에도 이상한 정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유가족이 직접 건넨 정 양의 속옷에 대해 국과수 분석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담당 수사경찰 : "젊은 아가씨들이 입는 팬티가 아니고 아줌마들이 보통 입는 팬티였고. 법의학 교수가 (몸에서) 정액이 안 나왔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국과수 의뢰를 미루던 경찰은 결국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단순 교통사고로 사건을 종결했습니다. 가족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가족들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버린 건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고 아버지는 회상합니다.

[정현조 씨 / 고 정은희 양 아버지 : "채소장사 하는 주제에 네가 뭐 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검감정서를 달라고 하니까 네가 부검감정서를 볼 줄이나 아느냐고 하고. 우리가 교통사고라고 하면 교통사고인 줄 알지 어디 진정서를 올린다고 다 해주는 줄 아냐. 나한테 다 온다. 이거 봐라 하면서."]

아버지는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의 계속된 요구에 경찰은 사건발생 5개월 만에 속옷의 국과수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시료가 오염돼 혈액형은 알 수 없었지만 누군가의 정액이 검출된 겁니다.

하지만 경찰은 정 양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다른 근거가 부족하다며 결론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 경찰의 초동수사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은 가족들…그리고 검출된 한 남자의 DNA

정 양의 아버지는 경찰에 재수사를 요구하며 끈질긴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1년 3개월 뒤 속옷에 대한 유전자(DNA) 분석 결과 현장에서 발견된 속옷은 정 양의 것으로 최종 확인됐고 속옷에서는 한 남자의 DNA가 추가로 검출됐습니다.

경찰은 그제야 초기 수사의 실패를 인정했습니다.

[당시 담당 수사경찰 : "청바지에 다리인지 뭔지 하얗게 말린 건 우리도 봤어요. 봤는데 그게 속옷이다 뭐다 피로 범벅이 됐으니까 그 당시에 아무도 펼쳐보지 않았어요."]

성폭행을 당한 정 양이 가해자에게서 도망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범인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DNA 검사가 진행됐지만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딸을 잊지 못하고 지내던 가족들을 놀라게 한 건 지난 2013년 검찰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이었습니다. 딸의 속옷에서 발견된 정액과 DNA가 일치하는 남자를 발견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피의자는 뜻밖의 인물이었습니다.

피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당시 근처 공장에서 일하던 스리랑카인 근로자 48살 K 였습니다. 사건 당시에는 33살로 대구 지역 공단에서 일하던 그는 당시 외국인 근로자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던 인물이었습니다.

[외국인 근로자 / 당시 대구 지역 근무 : "술 많이 마신 여자가 길에 넘어져 있었다고 했고 어디 다리 밑으로 데려가서 성폭행했다 그런 얘기를 들었대요."]

검찰 조사결과 K 는 다른 스리랑카인 공범 2명과 함께 정은희 양을 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피의자 K 는 이미 전에도 성범죄 전과가 여럿 있었습니다. 청소년에게 성 매수를 권유해 벌금형을 받았고 강제추행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습니다. K 가 이 사건의 피의자로 덜미를 잡힌 것도 다른 성범죄로 조사를 받다가 DNA가 일치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 15년 만에 잡은 범인이 무죄 선고를 받던 날…가족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가족들이 꿈에서라도 그토록 잡고 싶었던 범인이었습니다. 검찰은 15년 만에 잡은 용의자에게 특수강도강간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했습니다. 드디어 법의 처벌을 받게 되는가 싶었지만 1심 재판부는 K 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가족들은 상처를 다시 헤집어 파내는 것 같은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종길 / 당시 대구지방법원 공보판사 : "특수강도강간죄에 대해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특수강도강간죄가 성립하려고 하면 첫 번째로는 특수강도가 성립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검사가 제출한 증거를 살펴봐도 피고인 등이 특수강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 입증이 안 된다는 거죠."]

일치한 DNA가 강간의 증거는 될 수 있지만 가방 속의 물건을 훔치려 했다든지 하는 강도 행위의 증거가 없어 법에 정해진 특수 '강도' 강간죄로 처벌하기엔 부족하다는 판결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검찰은 왜 K를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재판에 넘겼을까요?

모든 건 바로 공소시효 때문이었습니다.

[이종길 / 당시 대구지방법원 공보판사 : "강간죄는 공소시효가 만료됐기 때문에 이미 강간죄는 공소시효가 끝나버렸잖아요."]

K 를 처벌하기에는 강간죄의 당시 공소시효가 턱없이 짧았습니다. 특수강간도 10년에 불과했습니다. 사건은 1998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2013년의 검찰로서는 공소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의 중죄를 적용해야 그나마 처벌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러나 K 는 결국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지난해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며 최종적으로 대한민국 법의 처벌을 완전히 피하게 됐습니다.

■ 스리랑카 법정에 세워진 피의자…그러나 혐의는 성폭행이 아닌 '성추행'

DNA 일치라는 증거가 있었음에도 K 는 이렇게 법망을 빠져나갔습니다. 정은희 양의 가족들이 피눈물을 삼키는 동안 K 는 대법원 판결 직후 스리랑카로 강제 출국조치됐습니다.

그리고 1년 3개월 만인 지난 16일, 법무부는 스리랑카 검찰과 공조로 K를 다시 법정에 세웠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이 아닌 스리랑카 법정이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강간죄의 공소시효는 20년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처벌 시효가 진작에 만료됐지만 그쪽에선 시효가 남은 것을 이용해 현지에서라도 법의 처벌을 받도록 한 겁니다.

그러나 스리랑카 검찰은 K 의 DNA가 피해자의 몸이 아닌 속옷에서 발견된 점과 당시 강압적인 성행위를 인정할 추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성추행 죄로 기소했습니다. 성폭행도 아닌 성추행 혐의였습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피해자는 이런 결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18살 딸을 성폭행하고 죽음에 이르게 만든 가해자를 눈앞에 두고도 부실한 초동수사 탓에 처벌하지 못한 나라에서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지난 20년을 살아왔을까요.

[이수정 교수 /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 "순전히 행정처분의 시효가 종료됐다는 이유 때문에 지금 범인을 놔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린 거예요. DNA가 있는데 어떻게 번복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처벌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소시효라는 터무니없는 행정조치 때문에 범인을 뻔히 잡고서도 처벌을 할 수 없는 무력한 사법제도에 약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생각이 되는 거죠."]

■ "스리랑카도 공소시효가 20년인데"…법은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강간 10년, 특수강간 15년, 특수강도강간 25년. 공소시효 개정이나 폐지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면서 우리나라의 성범죄 공소시효 기한도 각각 5년에서 10년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이런 뒤늦은 개정이 유가족에게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정현조 씨 / 고 정은희 양 아버지 : "우리 가족 삶은 진짜 그 뒤로는 즐거움은..웃음은 완전히 가버렸지. 전부 다. 대학시험 쳐서 서울로 가려고 하는 걸 집을 떠나면 너도 고생이고 우리도 돈 많이 들고 이러니까 대구에서 해라. 그러던 중에 사고 나니까 내가 미안한 거야. 나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죄를 지은 자를 찾아내 마땅한 벌을 내릴 수 있는 나라.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는 나라.

피맺힌 가슴을 부여잡고 평생을 살아갈 피해자의 가족들이 가장 바라고 있는 나라일 겁니다.

※ 유가족은 경찰의 부실한 수사를 믿지 못하겠다며 진범은 K가 아니라 따로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가 고 정은희 양의 명복을 빕니다.[보이스V] '초동수사만 제대로 했어도..